한 이십년 쯤 전, 나의 직업은 '한국어교사'였다. 그러니까,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언어를 가르치는 일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문화, 철학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언어 사용자의 환경이나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알기 어렵고 경우에 맞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람은 한국어를 사용하므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이런 말은 언제 사용할 수 있는지',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다른지', '왜 같은 뜻인데도 이 문장에서는 쓸 수 없는지' 등 구체적으로 답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역사와 문화, 환경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굳이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문장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어휘 하나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말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어와 언어문화를 연구하다보면, 우리말에 담겨 있는 삶의 지혜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중에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우리말을 소개한다. 우리말 어휘를 소재로 삼아 미래를 기대하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에세이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어의 어휘를 소개하는 책으로도 볼 수 있다. '별이나 우주'를 이야기하면서 내 삶을 반추하는 글을 쓸 수도 있고, '자연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삶을 읊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바로 우리말,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를 빗대어 삶을 이야기한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책을 읽으며 우리말이 품고 있는 '소망'을 함께 찾아 본다.
'까짓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별거 아니니까 툭툭 털어버리자'라는 느낌이 들며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 까짓것의 의미를 '까지'와 비교해서 보면 '그 정도까지는 괜찮다'는 느낌이 있다고 한다. 즉,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의미다. 까짓것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마음도 덜 괴롭고 우울함도 줄어든다. (P.44 요약)
'고통'은 사전에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괴롭다'와 '아프다'가 합쳐진 말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말을 합쳐서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을 동의중첩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큰 상처보다 자신의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를 더 아프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일도 당사자에게는 가장 힘든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통(痛)이고 정신적으로 아픈 것은 고(苦)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통은 부정적인 생각을 수반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괴로움의 순간이 성장의 환희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해'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공감을 나타낸다. '어떻게 해?'는 '방법'을 물어보는 의문문인데,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도 사용한다. 감탄문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이때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하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어떻게 해'는 큰 슬픔에 빠진 사람이나 굉장히 좋은 일이 생긴 사람에게도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반대의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속뜻은 비슷하다. 즉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공감을 아주 잘 표현한 말이지만,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도 위로는 전달할 수 있다.
저자는 인생에서 제일 괴로운 단어로 '혼자'를 떠올린다. '혼자'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철저히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은 혼자의 고통을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혼자'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외로움'도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고립도거나 버려진 느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대가족에다가 늘 함께 어울려야 하는 사회활동 때문에 '혼자'가 되는 상황이 되면 외로움의 크기가 상당히 컸을거라 생각된다. 요즘은 혼자 뭔가를 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시대이기에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스스로 '혼자'의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닌 '따돌림'의 결과일 때는 부정적인 단어로 작용을 한다. 혼자라는 말은 '하나'라는 말과 통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하나가 자기 존재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낱'이 되고 만단다. 한낱은 하나하나가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외로움과 두려움의 이유가 된다.
어휘를 통해 인생의 쓰고 단 맛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에세이와 어휘 설명서의 어중간한 지점에 있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뜻과 느낌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