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우선 나는 몇 가지 단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은 1년에 몇 번씩이나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보통 조공이라고 부른다. 명의 황제는 비록 형식적이고 사후적인 행위이긴 했지만 조선의 국왕을 공식적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를 책봉이라고 한다."(P.21)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과 청은 군신관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청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기념한 3대 명절, 즉 성절, 정단, 동지에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은 절사로 통칭되었다. 이 세 가지 절사 외에 경조사나 기타 중요한 외교 사안이 발생했을 때 보내는 사신은 별사라고 한다. 절사든 별사든 조선의 사신은 국왕 명의로 작성하 표문을 지참하였는데, 이런 표문에는 응당 선물, 즉 예물이 뒤따라야 했다. 조공 사절이 가져가는 예물을 방물이라고 불렀다."(P.66)
건륭제는 10년에 한 번씩 만수절을 베이징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칠순 만수절 또한 베이징에서 기념하리라 예상하였다. 황제의 칠순은 청의 건국 이래 처음 맞이하는 경사였으며, 중국 역사 전체를 보아도 통일 이후 그 시점까지 고희의 경지에 이른 황제는 여섯 명 정도였다. 그런데 건륭제는 자신의 칠순 생일을 여느 생일과 다름 없이 보내고 싶다면서 고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사실은 자신의 생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건륭제가 칠순을 맞을 당시 조선의 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건륭의 칠순을 그냥 넘기지 않고 '특별한 축하'를 하였다. 이전까지는 없던 일이었기에 '축하'를 위한 '진하표문'을 가져는 가되 분위기를 봐가면서 제출을 하기로 하였다. 절사로 간 조선의 사신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바꾸거나 일정을 조정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하였다. 보통 조공을 위해 사신들이 중국을 가거나 하면 조공으로 바쳐야 하는 방물의 전달만을 생각하기 쉽다. 우리에게 사신들이 실제로 한 일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데, 이 책을 통해 일부지만 사신들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책의 3부에서는 절사로 갔던 박명원의 '봉불지사'소동을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은 학생 때 배우기도 했기에 기억에 있다. 다만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이 사건을 해명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해놓았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열하일기』의 최대 특징은 역시 조선인이 직접 겪은 '열하 이야기'를 최초로, 그것도 빼어난 글솜씨로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일 것이다. 연행록 작품들은 대개 베이징에 다녀온 이야기였지만, 『열하일기』에는 제목이 표방한 대로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열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열하일기』 전체 분량의 30~40퍼센트가 직접 또는 간접의 열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박지원은 자신을 포함한 조선 사신 일행이 겪은 열하 이야기를 「태학유관록」, 「찰십륜포」, 「반선시말」, 「황교문답」, 「행재잡록」등에 집중적으로 펼쳐놓았다."(P.153)
이 중에서 「찰십륜포」에 묘사된 건륭과 판첸의 만남은 청과 티베트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 특별한 가치를 인정 받아 많이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박명원이 이끌었던 1780년 진하 특사의 활동에서 나온 산물이므로 당연히 박명원 일행의 사행활동을 이해해야 한다.
4부로 가면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박명원의 '봉물지사'를 어떻게 변호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중국 예부의 거짓을 밝혀 적음으로써 박명원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하고, 사건의 발생 시점을 교묘하게 섞어놓음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게 만든다. 대놓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그의 책이 건륭과 판첸의 만남이라는 논쟁거리 외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지 않은가.
5부에서는 조선과 청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표면에 드러난 결과와는 달리 그 이면에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지고 협상도 하고 정세도 바꾸는 것이 외교이다. 1780년의 열하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중요한 분수령이 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열하일기』는 문학작품으로서도 훌륭하지만 조선의 외교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위기에 처한 박명원을 변호하는 글로서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다시 『열하일기』를 읽는다면 1780년 그 시기의 한국사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