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문집 (천줄읽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박지원 지음, 박수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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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활자본 17권 6책으로 간행된 박영철본 《연암집》에 실린 산문 237편 중 42편, 《열하일기》에 실린 글 중 10편이 실려 있는 책이다. 연암 박지원이라하면, 조선후기 실학자로 열하일기, 허생전으로 기억되며 정조의 문체반정과 연관하여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다.

이 책은 [사이에서 생각하기], [문장가의 마음], [생활의 발견], [현실과 사회]로 구분하여 글을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이 중에서도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문장가의 마음]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127페이지까지 쑥쑥 읽히다가 이후부터 힘이 좀 빠진다.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읽히는 힘이 다르게 작용하는 듯하다.

"본 것이 적은 사람은 백로를 기준 삼아 까마귀를 비웃고 물오리를 기준 삼아 학의 긴 다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사물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는데 저 혼자 의심해 화를 내며 한 가지라도 생각과 다르면 만물을 모조리 비방한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 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리는 것이다." p.16~17

고정관념을 꼬집고 있는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분명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배우지만 사회에 나와서 보니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많은 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준이 모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데 말이다. 연암은 까마귀 날개의 진실을 알려주면서 사회적 모순과 고정관념을 비판하고 있다.

연암의 글을 읽다 보면 적절한 비유와 인용을 통해 상황에 맞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을 알게 된다. 연암 산문집의 많은 이야기가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라고 이야기한다.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린 것이고, 칭찬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비유하자면 귀울음이나 코골이와 같다. (중략) 자기 혼자만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또 자기가 깨닫지 못한 것은 남이 먼저 아는 것을 싫어한다. 귀울음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하니 하물며 병이 아닌 경우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코골이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주면 화를 내니, 하물며 병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귀울음은 듣지 못해도 내 코 고는 소리를 일깨워준다면 작가의 뜻에 가까우리라." p.85~87

연암의 비유가 돋보이는 글이다. 글을 쓰는 일과 독자의 비평을 비유하고 있다. 내 귓속에서 앵앵 우는 소리는 남이 들을 수 없다.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나는 들리는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코 고는 소리는 잠을 자는 나는 듣지 못하지만 곁에 있는 이들은 시끄러워한다. 옆 사람이 일깨워주려 하지만, 난 코를 곤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네는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나? 앞을 보면 뒤를 못 보고, 왼쪽을 돌아보면 오른쪽을 보지 못한다네. 왜 그럴까?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게 되고 눈과 공간이 너무 가깝게 된다네. 차라리 방 바깥으로 나가 문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다네. 한쪽 눈만을 집중하더라도 방 안의 물건을 죄다 볼 수 있지." p.94

연암이 알려주는 책읽기의 요령이다. 책의 내용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요약하여 그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글쓴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사심을 없앤 다음 깨달음을 얻는 독서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글쓰기에 있어서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의 삶과 정서를 노래해야한다고 알려준다. 이를 조선의 노래, 조선풍이라고 한다. 연암은 우리의 주체성을 높이는 발언을 한 것이다. 강정과 개암을 통해 일상적인 글이 더 참되고 훌륭한 글임을 밝힌다. 평범한 말이나 일상의 언어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도 잘 알고 있지만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진부하게 쓰지 말고 진실되게 쓰는 것이다. 문장이 화려하고 눈길을 끈다고 해서 좋은 글이 아니다.

친구를 잃은 슬픔에 관해 쓴 글은 읽다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아아, 슬프다네! 내가 예전에 친구를 잃은 슬픔은 아내를 잃는 것보다 크다고 말한 적이 있네. 아내를 잃은 자는 그래도 두 번 세 번 재혼을 할 수 있고, 서너 차례 첩을 얻어도 안 될 것이 없네. 옷이 터지거나 찢어지면 깁거나 꿰매고, 그릇이 깨지거나 이지러지면 다시 새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지. 혹 나중 아내가 전처보다 낫기도 하고, 혹 나는 늙었지만 새 아내는 예쁘고 어려 신혼의 즐거움이 초혼과 재혼 간에 차이가 없을 수도 있네. 친구를 잃은 아픔에 이르면, 내가 요행히 눈이 있긴 하나 내가 보는 것을 누구와 함께 할 것이며, 내 요행히 귀가 있긴 하나 내 듣는 것을 누구와 함께 듣겠는가? 내 요행히 코가 있긴 하나 내 냄새 맡는 것을 누구와 함께 맡겠는가? 내 요행히 마음이 있긴 하나 내 지혜와 깨달음을 누구와 더불어 같이 한단 말인가?"p.163~164

친구와는 할 수 있는 일을 왜 아내와는 같이하지 않는 것일까? 친구를 잃은 슬픔이 아내를 잃은 슬픔과 비할 것이 못된다고 하니 그저 헛헛할 뿐이다. 그래도 저 글에서 아내를 남편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생각하고 나니, 섭섭하던 마음도 사라진다.

연암의 글을 읽다보니 그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해제가 있어서 읽는데 도움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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