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유달리 라이벌의식을 갖는 '상대'가 있다. 다른 이가 했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 '상대'가 그렇게 했다고 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한국과 일본이 그러하다. 스포츠에서 한일전이라도 벌어지면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응원을 하고, 지기라도 하면 역적이 되어버리는 분위기 말이다. 두 나라 사이에 얽힌 문제들은 언제쯤 풀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설계하고 이끈 사무라이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무라이'는 비열한 이미지가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사무라이에 관해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그나마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희화화된 사무라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물론 보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닌자들을 떠올렸을 정도로 나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근대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나는 일본의 천황제라든가, 정치세습이라든가 하는 것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근대 일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서가명강 시리즈는 책을 읽기 전에 주요 키워드를 설명해준다. 이 키워드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연호(年號)는 특정 군주 즉위 후 통치 기간을 일컫는 용어다. 일본 역사상 천황의 가문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기에 천 년이 넘게 이어져오는 전통이라고 한다. 막부(幕府)는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천황을 신앙적 존재로 두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다스렸던 무사 정권을 말한다. 이 막부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유신이 선포되면서 근대 일본이 열리게 되었다. 근대 일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천황의 존재는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한다. 사무라이는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러 농촌이 아닌 도시로 이동하여 살게 되고 주군에게서 봉록을 받는 존재로 바뀌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전 분야에 걸쳐 서구화에 성공한 메이지유신은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개혁이다. 1853년과 1854년, 미국 동인도함대의 함선이 일본으로 와 미일화친조약을 맺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막부의 쇄국정책이 끝났다. 에도 막부 말기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가 된 것은 '존왕양이'이다. 그리고 1867년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납한 대정봉환 사건은 에도 막부와 막부 시대의 끝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소개한다.

19세기는 일본에서 유학과 주자학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메이지유신은 서구의 문물에 자극받아 이루어졌지만, 유학, 그 중에서도 주자학과 같은 수준 높은 교육과 학습이 없었더라면 일본인들이 근대화로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도, 이토 히로부미도 모두 '독서하는 사무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오다 노부나가와는 종류가 다른 사무라이다. 유학이라는 건 사람을 정치에 관심 갖게 만든다. 유학에 접한 사무라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투 대신, 천하대사의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p.29

독서하는 사무라이. 이 책의 부제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에서도 강조하는 내용이다. 사실 칼을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책을 읽어서 사상의 토대를 튼튼하게 만들고,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혔기 때문에 변화의 시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인 사무라이층 내부의 다툼과 그 영향으로 일어났다. 변혁은 이루어졌지만 보수세력이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수행하였기 때문에 사회질서가 무너지지 않고 안정성을 유지하며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대중은 정치참여에 관심이 덜하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정치성향은 2명만 모여도 드러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 관련 서적을 구해 필사하고 읽었다. 주자학, 양명학, 국학, 미토학, 병학을 가리지 않고 섭렵했으며 서양 정보를 모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죄수들을 상대로 [맹자]를 강의했고, 수감 기간 동안 독서에 열중해 554권의 책을, 1856년에 505권의 책, 1857년애 385권의 책을 읽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3년간 약 1500권의 책을 더 읽었다고 하니 독서광이라고도 부를만 하다. 요시다 쇼인은 학문은 곧바로 정치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공부의 장을 정치토론의 장으로 만들고 이를 장려하곤 하였다.

인구 100만의 도시 에도는 수많은 사숙과 독서모임이 유명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사무라이들은 한학, 난학, 병학, 의학 등을 공부하였고, 이런 모임에서는 정치 얘기가 벌어졌다.

"현재 일본 사회가 국제적인 마인드를 중시하고 아시아와의 협력을 중시할 때는 료마가 곧잘 소환된다. 반대로 일본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아시아에 대해 날선 자세를 보이는 정치세력은 요시다 쇼인을 즐겨 소환한다. 쇼인은 강렬하고 어둡지만 료마는 명랑하고 밝다." p.166

역사 인물을 지금의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다들 똑같은것 같다.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는 사후 우상화되었다. 메이지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역적임에도 나라의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서구화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민족적 상실감을 사이고를 통해서 만회하려고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양명학과 주자학을 배웠다. 20세 무렵 공부 모임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표적 고전을 학습했는데, 여기에는 역시 오쿠보 도시미치도 있었다고 한다. 사이고는 사숙을 열어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한비자], [근사록], [자치통감강목] 등의 책도 반복해서 읽었다.

유학을 비롯한 학습활동이 활발해지고, 신분보다는 개인적 능력이 지위를 결정하면서 하급 사무라이 출신의 리더들이 정치적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오쿠보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이고가 무력 동원의 수훈갑이라면 그는 정치공작 면에서 일등공신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유신'을 표방했다. 700년간 계속된 사무라이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서양화를 추구하였지만, 유신으로 천황에게 대권을 돌려주었다.

책을 읽고 학습을 한다는 것은 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하고, 국제 정세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시야를 확대할수 있다. 봉건제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커다란 변혁의 순간에도, 오도가도 못하는 코로나 정국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 이 도서는 21세기북스의 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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