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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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작가의 글이라는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공 동구와 세상 아이들에게 가정의 행복을 위해 묵묵히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면, 이 책은 설이를 통해 세상을 향해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달라"고 소리친다.



설이는 예쁜 옷을 입고 바구니에 담겨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구출된 아이다. 설이는 그 잔인한 장면을 자신의 의지로 살아나왔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왜곡된 기억. 그 기억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걸까?

원장님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나를 꺼낸 그 일에는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 그때 내가 운 덕분에 반대로 세상은 부끄러움을 조금 덜었다는 점이다. 예쁜 옷을 입은 아기가 음식물 쓰레기통 속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부끄러운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예쁘고 아무 생각 없는 별이 되는 대신 피곤하고 부끄러운 유기아동이 되어서 세상의 몫이 되어야 마땅할 창피함을 대신 짊어졌다. 과연 이 바보 같은 세상은 그런 생각을 해보기나 했을까? 자기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알기나 하려는지. 세상이 나에게 그 빚을 갚을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나는 또 다시 그때와 똑 같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듣지 않으려는 목구멍을 재촉해 소리를 쥐어짜내야 했다. 두터운 무감각의 장막을 뚫고 지겨운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질러야 하는 것이다. 창피함은 또 내 몫이 될 것이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P.26~27

설이는 세번의 파양을 겪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다.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이모가 있고, 비록 요양병원에서 살고 있지만 설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원장님도 있다. 설이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도록 공부를 하고 또 했다. 워낙 머리가 좋은 아이기도 했지만, 필요가 행동을 견인해내듯 노력을 통해 이뤄낸 성과였다.

설이가 아프거나 파양이 되어 마음의 병이 생겼을 때마다 늘 힘이 되어주는 곽은태 선생님은 설이가 좋아하는 의사선생님이다. 3번이나 파양되어 왔지만 곽은태 선생님의 집으로 입양을 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할 정도이다.

“네, 감기도 그렇잖아요. 어떤 감기는 입원까지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냥 잘 쉬면 낫기도 하니까요. 무엇이 필요한지는 설이가 가장 잘 알 거예요. 쉬고 싶으면 쉬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하고, 설이가 하고 싶은대로 두시면 돼요.”

“알았지 설아? 언제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야 몸도 마음도 튼튼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힘든 줄도 모르고 아픈 것도 이겨내거든.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란다. 알겠지?” p.16

나중에 곽은태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를 되돌아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설이가 보는 곽은태 선생님이면서 내 아이에게는 시현이가 보는 곽은태 선생님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나쁜'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는 모두들 '선한' 행동을 한다. 보육원의 원장님이 그러했고, 곽은태선생님이 그랬다. 우상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그랬고, 시현이 엄마가 그랬다. 설이를 입양하려했던 양부모님들도 그랬다. 그들은 모두 '설이'를 '진짜 내 아이'처럼 보지 않았다. 그랬기때문에 설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했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내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곽은태 선생님은 아들의 그 멋진 공연을 보러 오지 않았고 시현이 엄마는 그런 공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울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바닷가재 레스토랑에서 시현이 바닷가재가 맛없다고 삐죽거리는 것이 생각났다. 그들은 각각 최고의 것을 눈앞에 놓고도 그건 하나도 좋은 게 아니라고 손발을 내저었다. 가족이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이다. p.177

가족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족'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고 힘들 때 가족만큼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외동으로 키우는 아이를 보며 형제가 없어서 외롭겠다고 혀를 차는 어른들을 많이 만난다. 정말 그럴까? 그들은 가족이 있어서, 형제가 많아서 외롭고 쓸쓸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까? 즐겁고 행복한 일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하하호호 웃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을까?

입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아이들에게 가족은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영재원으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고 있는 아이들에게 '미래'는 아름다울 것이라고,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아이들이 상류층이라는 이름으로 살 확률은 높다. 설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해주던 이모도 '문제집'을 풀게 하고 학원을 보내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지만 결국 설이는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자신만의 방법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설이'보다는 '시현이'에게 더 눈길이 갔다. 설이처럼 당차게 자기 인생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시현이의 부모처럼 살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해줄 수 있는 능력을 부러워할 지도 모른다. 정작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작가는 진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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