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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장 폴 뒤부아, 이 사람은, 아니, 이 사람의 작품은, 나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타네씨~]에서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줬다가, [이 책이 너와 나를]에서 열광하게 하더니, [프랑스적인 삶]에서는 인내심을 요구했다.
어쨌거나, 내 인내심은 그의 작품을 견뎌냈고, 그 결과는, 무난하다.
책의 초반부에서 지루함을 느끼면 책을 덮어버리는 내가 끝까지 읽었다는데에 일단 박수를 보내자.
그 지루함이, 소재나 주제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장폴뒤부아의 문체에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성에서 오는 것인가..
아마도 이 책이 프랑스적이 아닌 한국적인 삶이었다면 그 몰입은 쉽게 이루어졌을 듯하다.
즉,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거나, 남녀관계(동거나 결혼)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 나와 같이 지루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참고 읽어보자. 까짓거 정 지루하면 대통령 한 두명쯤 건너뛰면 어떠랴...
폴 블릭의 인생에서 몇 년쯤 모른다고 대수냐 라고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괜찮다. 읽다가 궁금하거든 그때 다시 앞을 보지 뭐.
폴 블릭이 일반적인 프랑스인이 아니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덧붙여진 프랑스인이다.
아주 질곡 많은 삶을 겪음으로써, 소설 속 사건을 이루는 조건 말이다.
뒤로 갈수록 그의 사람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남의 불행을 재미있다고 말하는 건 좀 어폐가 있나?
대학을 졸업한 폴 블릭이, 떠밀리다시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 대신 전업주부가 되어 생활하다가, 취미로만 끝날 줄 알았던 사진작업으로 돈을 벌고, 아내가 배신하고, 아내가 죽고, 아이들이 성장하여 분가하고, 딸이 정신병을 앓게 되는 과정들이 이 책의 지루함을 날려버리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 이전의 사건들에서는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조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면, 폴의 결혼 이후의 삶에서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냥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양념일 뿐이다.
여기서 잠깐,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나는 이말에 반대한다. 일본의 문학이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는 이유 중에 하나를 무국적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한국적인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 혹은 이국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을지 모르지만, 그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은 세계가 공통점으로 관심을 가진 문제라야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책이 초반부의 프랑스적인 색채의 영향에서 벗어날 즈음에야 나의 지루함이 날아가고 주인공의 삶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동거를 많이 하는 편이고 결혼은 많이들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거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도 사회보장혜택을 결혼한 것과 동등하게-혹은 비슷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은 후에는 그 책임이 막중하다고 한다. 그러니 결혼보다 동거를 택하는 사람이 더 많을듯하다. 물론 이 책 속 등장인물들처럼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말이다. 폴 블릭의 삶이 일대 전환을 맞는 것이 그의 결혼과, 안나의 출산과 맞물리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또, 아내가 일하고 남편이 전업주부로서 사는 모습도 소설 속에서는 특별한 거부감을 느낄 수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불행은 끝없이 생성되는 듯 보이지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주인공의 모습은 없다. 오히려 딸 마리와 함께 산 정상에 올라 새로운 꿈을 꾸고 희망을 안게 되는 모습이 건강해보이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