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평전
박현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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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마지막 독서는 이 책 '정조평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 표지가 무척 마음에 안든다. 서점에서 이 책을 봤다면 미안하지만, 절대 손에 들지 않았을 디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정조의 리더십에 대한 관심때문이고, 얼마 전 박현모 저자의 '세종처럼'을 읽고 좋았던 기억때문이다. 최근 리더와 리더십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도 하나의 이유일 터이다.
주말 아침 책 한 권을 들고 카페에 갔다. 이 책은 카페에 들고 가서 읽을만한 소재는 아니지만, 집안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머리말에 보면 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에 대해 국왕 정조의 개혁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의 근본은 인생에 달려 있고, 먹을 것이 풍족해야 교육의 효과도 나타날 것이라며 국정의 첫 번째 목표를 경제 개혁으로 정했다고 한다. 또한 정조는 정치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는 문제에서 벗어나 온 신민이 다같은 동포이자 한 집안 식구처럼 화합하고 오복을 더불어 누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정조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달랐다. 적재 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여 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을 가능케 하였으며 정조 자신이 탁월한 학문 능력을 갖춘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그런가 하면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모습을 통해 정치가로서도 탁월함을 인정받았다. 그런가하면 그의 사후에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부정적 시각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그간의 정조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미적 감각과 디자인 능력에 대해서도 말한다. 수원 화성이 문화유산으로 선정된데는 정조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미적 감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조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평생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립을 보면서 자랐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었다. 왕이 될 때에도 반대하는 신하들을 보았으며, 즉위한 후에도 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 정조는 승마를 즐기고 병법과 무예에 뛰어난 왕이었다. 유약하고 힘이 없는 왕이었다면 그 세월과 풍파를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다.

2장에서는 어린 시절의 정조를 이야기한다. 유난히 책을 좋아했다는 정조는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를 보면 좋아했고, 첫돌 때는 노리갯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을 펴들고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조를 할아버지인 영조가 엄청 예뻐하였다. "유년기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상황을 겪고도 정조가 꿋꿋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주고 칭찬해주는 '기댈 언덕'으로서의 할아버지 영조가 있었던 것이다."(p.40) 그리고 정조는 자기 관리에 엄격하였는데, 영조의 세심한 성격과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도세자를 보고 자란 정조가 자연스레 터득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정조는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우수했을뿐더러 여러 경험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탁월했다. 한마디로 정조는 회복탄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 때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정조에게는 칭찬과 격려 중심의 교육을 시행한 것도 효과를 보았다."(p.46) 육아와 교육에 있어서 '회복탄력성'과 '칭찬과 격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정조의 회복탄력성은 독서 토론에 의해서도 강화되었다고 한다.

4장에서는 규장각과 정조의 지식경영을 다룬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제일 먼저 한 것은 기관을 만들고 자료를 제시하고 인재를 충원하는 것이었다. 인재 양성과 관련해서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국비로 연구에 매진하게 하는 제도이다. 규장각은 크게 도서의 수집과 편찬, 국왕과의 토론 및 자문, 세자와 초계문신을 위한 교육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에서 경연을 통해 고전에 대한 문제제기에서부터 시작해 강의를 마칠 때까지 주도권을 쥐었다. 정조는 강의의 목적을 '말로 인해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은 '그 의문으로 인해 의문을 풀게'하고 마지막으로 그 의문을 푸는 과정에서 '사람의 선심을 감발하게 하는'것이 강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즉 공부 자체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격하고 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신하들을 지나치게 가르치려 하여 신하들이 수동적이게 하고, 창의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5장에서는 정조의 인재경영을 엿볼 수 있다. 정조는 탕평의 의미를 '편당'을 제거하고 남과 나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직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은 버리겠다는 것을 밝혔다. 분열된 정치를 지양하고 대동단결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내용이 아닐까? 정조는 이를 위해 이열치열의 통치방법을 썼는데, 한 당파에서 반역자가 나오면 그를 반대 당파의 반역자와 대비해 다스리고, 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충신과 대비해 표창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정책은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정치를 보는 것에서 벗어나 우열론의 관점에서 정치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누구의 의견이 보다 우수한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 신하들이 이러한 정책을 찬성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재 등용의 방식을 통해 사람의 능력을 보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그들의 개성을 살리는 정치를 하였다.

정조는 달빛의 메타포를 자주 사용하였다. "달빛은 부드러운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달은 어두운 밤 많은 이들의시선을 수렴하는 구심점이다. 사람들은 구름에 가리지 않은 달을 직접 보고 싶어 한다. 직접성이야말로 달빛 메타포의 요체인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달과 시내 사이에 끼어 있는 구름에 임금과 백성 사이의 간신배 내지는 탐관오리를 비유하곤 했다." (p.191)



 
정조는 인재의 개성과 강점을 발견해 활용하는데 뛰어났다. 이전에 세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왕 본인의 뛰어난 능력만이 아니라 인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신분과 당색을 뛰어넘어 인재를 발탁하고, 각각의 역량 차이를 인정하여 단점이 아닌 장점,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을 부각하는 강점경영의 인재쓰기를 한 것이다. 이는 정조 시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쓸 만하다면 당파가 무엇이고 신분이 무엇이건 간에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와 정치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한국 정치가 떠올랐다. 정조는 이익을 탐한다 하여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하는 것이라면 해롭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의 정치는 개인의 이익만 취하는 듯하여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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