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운디드 폰 A Wounded Fawn, 2022

감독 : 트래비스 스티븐스

출연 : 사라 린드, 조시 루벤, 몰린 바, 레안드로 타웁, 타니아 에버렛 등

등급 : TV-MA

작성 : 2023.10.06.

“경고는 농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즉흥 감상-

초현실주의 예술가인 ‘레오노라 캐링턴’의 말은 살짝, 경매장에 앉아있는 사람들로 시작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는 ‘에리니에스의 분노’라는 이름을 가진 청동상에 입찰가를 붙이기 시작하는데요. 결국 낙찰 받은 여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잠시, 아쉽게 물건을 낙찰 받지 못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찾아오는데…….

다른 건 일단 그렇다 치고 즉흥 감상의 의미를 알려달라고요? 음~ 고가의 미술품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기 전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그 내용이 영화 후반부에서 경고처럼 작동하는 장면이 나오자, 위의 즉흥 감상을 적어본 것인데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작품은 ‘분명 경고를 하는데도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제목은 어떤 의미냐고요? 음~ ‘Wounded’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부상을 입은, 다친, 마음이 상한, 마음을 다친, 부상자들’과 같은 풀이가 보입니다. 그리고 ‘Fawn’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엷은 황갈색의, 생후 1년이 안 된 새끼 사슴’이라고 풀이가 나오는데요. 흐음. 제목이 가진 숨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제목과 영화의 내용을 어떻게 연결시키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남자를 ‘순수한 존재’로의 각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죠, 감독님?

이거 제목이 ‘우먼스 폰드 Woman’s Pond’아니었냐고요? 음~ 반갑습니다. 동지시군요. 사실 저도 이 작품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질문하신 분과 같이 제목을 인식했던지라, 영화를 보는 중에 혼란을 느꼈었습니다. 분명 여인이 나오기는 하는데 연못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고 해도 감상문을 쓰기위해 원제목을 다시 확인했음에도, 새로운 혼란이 가중되자 위의 문단을 적어본 것인데요. 저와 비슷한 착각의 여정을 걸으신 분이 있으니 이거 반갑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냐고요? 음~ 시작은 제법 흥미로웠지만, 본론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술을 읽는 감성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상황 자체가 이해의 벽을 넘어가서 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 작품은 애초에 이해를 바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었던 걸까요? 익숙한 상황에 파괴되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혼란과 결말에 이르는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지금도 명확하게 답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 멋진 해석이 가능한 분이 있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으면 하는군요.

이번 작품은 이미 영화 시작부분에서 설명을 다 해주기 때문에,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고요? 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 죄인을 응징하는 존재하는 존재이며, 복수와 응징을 상징하며,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정의를 추구해 사악한 자들이 속죄할 때까지 그들을 추적하며 고통을 주는 여신들’이라는 설명까지는 좋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비록 악당이기는 해도 고통을 받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데요. 차라리 영화 ‘브레인 데드 Brain Dead, 1990’가 더 착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건, 저뿐이었을까 싶습니다.

그럼, 영화 ‘탄생/재탄생 birth/rebirth, 2023’의 감상문으로 이어보며, 이번 기록은 여기서 마칠까 하는데요.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적어보면, 죄를 지은 사람은 사실 피해자와 함께 죽었고,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예술품의 이야기가 반영된 영원한 고통의 지옥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다른 의견 있는 분은 손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덤. 오늘부터 ‘[RG] 건담 GP01FB 풀 버니언’의 조립이 시작됩니다!

TEXT No. 3705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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