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스룸을 보다가 손석희가 이 시를 읽는데, 눈물이 많은 나는 또 울컥하였다.

시와 친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외국시인의 감성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여서 브레히트 시집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브레히트 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타인의 삶>이다.

1984년 동독. 조지 오웰의 소설처럼 당시 동독에서는 비밀경찰과 감청요원들이 30만명이 넘을 정도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감시대상이었다. 영화는 그런 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작가 드라이만과 비밀경찰 비즐러의 이야기다.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삶을 감시하다가 결국 그의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에 동화되어 버리는데, 그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브레히트의 시다. 드라이만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슬쩍 가지고 나온 시집을 자기집 소파에 누워 읽어보는 장면과, 드라이만의 선생님이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슬픔에 찬 드라이만이 선생님이 선물했던 악보인 <아름다운 영혼의 소나타>를 연주할 때 그걸 도청하던 비즐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봤을때 이미 영화의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예술을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면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이념은 신봉할 수가 없다. 레닌도 그랬다지 않나. 베토벤의 `열정`을 계속 듣는다면 혁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드라이만도 말한다. ˝이 곡을 진심으로 듣고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비즐러는 감시를 소홀히 하고 결정적으로 드라이만에게 도움을 준 사건으로 한직인 우체국으로 쫓겨나 평생 캄캄한 방에서 편지봉투 뜯는 일이나 하게 되는데, 그러는 사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을 맞이한다. 그리고 정말 멋진 엔딩씬이 기억난다. 맑스 서점에서 자신을 위한 책을 한권 사는 비즐러!

오늘 아침 첫눈이 펑펑 내리는 걸 보면서 어젯밤 들은 시가 떠올랐고, 브레히트 덕분에 멋진 영화 한편이 떠올라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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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B. 브레히트 -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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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12-03 1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타인의 삶>은 두고두고 간직하는, 그런 영화이지요.^^
첫눈다운 눈이 펑펑 내리신 날~ 눈같이 하얗고 행복한 날 되세요~~

살리미 2015-12-03 14:39   좋아요 2 | URL
눈 내린걸 철없이 좋아하기만 하는 것도 사실은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이 길에 어딘가에 나서야 하는 사람들, 눈 치울 걱정부터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싶어서요.
그치만 오늘 아침엔 너무 눈이 예쁘게 펑펑~ 내렸고, 시적 감성이 없는 저로서는 그 눈을 보면서 어젯밤 들었던 시가 좀 뜬금없이 떠올랐고.. 오후에 시간이 나면 영화나 다시 한번 볼까.... 그러고 있답니다^^
철없다 그러더라도 눈을 소복이 담은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기분이 덩실덩실 해지는건 참을 수가 없네요~~
저녁에 이렇게 내렸더라면 바로 소주 한잔 하러 나섰을거에요 ㅎㅎ

cyrus 2015-12-03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술을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오로라님의 말씀을 다르게 생각합니다. 과거 권력자들은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예술가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예술을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치면 정치권력과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용했어요.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게르만 민족의 역동성을 발견했고, 스탈린은 자신을 우상화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독려했고, 그렇지 않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도록 활동을 제한시켰습니다. 예술을 자신의 권력 수단으로 이용한 권력자들은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민족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성향은 개인의 이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라님의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다만, 예외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어요.

살리미 2015-12-03 20:16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예술에 대한 사랑이 광기로 변해버린 경우도 있네요. 어떠한 사랑이든 그게 집착이 되면 본질이 흐려지겠죠. 개별적인 존재의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는 예술이라면 이미 예술이 아닌 권력이고요. 저 영화를 떠올려보면서 차갑고 냉철했던 비즐러에게도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감성이 있었기에 행동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거였어요. 동독에서 그런 예술가들을 권력을 다지는 도구로 쓰고 싶어했던 것과는 달리 진짜 예술은 결국은 전체주의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라고요.

새아의서재 2015-12-03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약간의 시차가 있었지만 좀전에 팟방에서 뉴스룸을 들었어요. 집안일하면서 들은거라서..이게 시라는 건 놓쳤구요. 듣고나서 저도 많은 생각을 했더랬어요. 활자로 보니..좋네요. 고맙습니다.

살리미 2015-12-03 20:19   좋아요 0 | URL
늘 느끼는 거지만 손석희의 뉴스브리핑은 참 좋아요~^^ 감성을 최대한 걷어내야 하는 뉴스라는 매체에서 사람들 마음을 톡톡 건드려주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기억의집 2015-12-0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타인의 삶 디비디로 있는데, 플레이어가 없어 몇년 동안 썩히고 있어요. ㅠㅠ

살리미 2015-12-03 20:20   좋아요 0 | URL
아... 안타깝네요 ㅠㅠ 근처 도서관에 가져가셔서 보시면 안될까요? 미디어실이나 전자열람실 같은데서요.

기억의집 2015-12-03 20:40   좋아요 0 | URL
도서관이 멀어서 안 가게 되더라구요. 버스 타고 가자니 버스요금이 아깝고.. ㅎ

고양이라디오 2015-12-03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삶> 참 인상깊은 영화였어요ㅎ
좋은 시 감사합니다~^^

살리미 2015-12-03 20:24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도 보셨군요~ 참 두고두고 생각나는 영화에요. 우리랑 비슷한 상황이었어서 그런지....

고양이라디오 2015-12-03 21:02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봐서 우리랑 비슷한 상황이란 생각을 못했었는데... 정말 그렇군요ㅠㅠ

살리미 2015-12-03 21:10   좋아요 1 | URL
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상을 잘 모르니까 그 시대가 배경인 영화들이 참 좋더라고요. 독일의 경우는 우리랑 같은 분단상황에서 통일을 이루었기때문에 특히 동독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 같은점과 다른 점들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통일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통일이 되었는데도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봐 알리지 못했던 <굿바이 레닌>이란 영화도 정말 재밌었어요.

고양이라디오 2015-12-03 22:20   좋아요 0 | URL
<굿바이 레닌> 먼가 제목만으로도 재밌을 것 같은 영화네요ㅎ
보고싶은 영화 목록에 올려둘께요ㅎ~ㅎ

2015-12-03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5-12-04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도 휴머니즘이라야 예술이고 권력의 나팔수가 되면 타락하죠.

살리미 2015-12-04 08: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예술이라는 것이 목적성을 가지게 되면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뽈쥐의 독서일기 2015-12-0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이 영화 아름다워서 참 먹먹했던 기억이... ㅠㅠ 피아노 한 곡 제대로 못 치는 제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막상 브레히트는 흘려들었는데 오로라님 덕분에 좋은 시 읽고 가요. 왜 대단하다는 지 알 것 같네요.

살리미 2015-12-04 10:58   좋아요 0 | URL
저도 피아노 한곡 제대로 못쳐서....ㅠㅠ 독일 영화 특유의 약간 투박하면서도 진중한 아름다움이 느껴졌었죠~ 영화에서도 브레히트의 시가 낭송되긴 하는데 이 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오래된 기억이라 잘은 모르겠는데.... 그저 브레히트라고 하니 그 시집이 생각났어요^^ 이참에 한번 브레히트 읽어볼까?..... 또 생각만 하고 있고요....
그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라는 말이 요즘 너무 공감이 가기도 하니까요.

해피북 2015-12-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오로라님 덕분에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되 정말 좋아요^~^ <타인에 삶>이라는 영화는 다행스럽게도 네이버에서 볼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브레히트 시집도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아마도 손석희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듣게되면 더 여운이남을거 같아요 요것도 티비팟으로 찾아봐야겠어요 ㅎㅎ

살리미 2015-12-05 14:41   좋아요 0 | URL
다행이네요. 이 영화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특히 엔딩씬이 너무 맘에 들었어요!!
그리고 손석희의 뉴스브리핑도 꼭 찾아보세요^^ 역시 아나운서의 발음이 최고예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