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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을 수 있다면 1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그래, 자의든 타의든 바닥까지 내려간 이상, 남은 건 올라가는 일뿐이다. 온 힘을 다해 발뒤꿈치로 바닥을 치고 올라가면 된다. 여기 이미 바닥을 친 자와 아직 바닥에 닿지는 않았으되 바닥을 딛고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겠다며 그곳을 향해 가는 자가 있다.
어두운 과거를 간직한 카미유 포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어리숙한 이웃, 필리베르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와 함께 사는 요리사 프랑크는 카미유와 비슷하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인물로 가족이라고는 폴레트 할머니뿐이다. 안나 가발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함께 있을 수 있다면』은 위태롭고 불완전한 이들 4인의 '인생의 부상자'가 더이상 물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바닥을 '탁' 치고 올라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연애 소설이자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멀찌감치 떨어진 점처럼 살아온 이들이 우연한 계기로 '함께 있게 되면서'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으로 변하듯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현실적이면서도 로맨틱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두 권 합쳐 약 800쪽에 달하는 분량인데 술술 읽힌다. 안나 가발다 스스로가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벼른 탓인지, 가끔은 능글맞고 또 느끼한 부분도 있지만, '맞아, 이런 게 사랑이었어!'라고 할 정도로 감정 묘사가 풍부하다. 혹시 지금 일(또는 꿈)에 지쳐 있거나 인간관계에 시달리거나, 지금 곁에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이 당신에게 그 세 가지 측면으로 여러 질문을 던질 테니.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인물과 감정 위주로 진행되는 작품이라 아무래도 인물이 참 매력적이다. 다만 카미유는 너무 예민하고 뾰족해 위태롭고, 프랑크는 상처가 너무 많아 감당하기 버거우니 엉뚱하고 어설프지만 친절한 필리베르와 마마두에 더 마음이 기운다.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따돌림까지 받았던 필리베르와 시바의 여왕 마마두는 극의 재미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멜리아에>의 여주인공 오드리 도투가 카미유 역을 맡아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졌던데, 작중인물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다.
필리베르는 카미유에게 프랑크를 소개하면서 '손에 닿는 것이면 뭐든 뜯어고치는 사람'이라 말했다. 낡고 망가진 것들을 죄다 고치는 사람이라던 그는 실제로 '망가진' 카미유의 거식증을 해결하고, 사랑 앞에 한껏 움츠러든 그녀를 당당히 두 발로 서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왕자님을 만나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가 더 부유하고, 남자는 가진 게 없으니.
겨울 없이 봄이 오는 법은 없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는 영영 봄이 안 올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늘 그렇듯 봄은 조용히 어느새 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만물이 움츠러든 추운 겨울이 끝나고, 다시 새싹이 트는 봄날을 맞이하는 느낌의 소설이다.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온통 여기저기 부서지고 다친 이들이 마침내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로부터 삶의 의미를 깨닫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느 시인이 그랬다. 이유가 있어서 봄이 오는 게 아니듯, 이유가 있어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힘이 나는 게 아니라고. 프랑크에게 딱 어울리는 그런 시인데, 애석하게도 시인이나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가족에서부터 친구, 연인, 동료에 이르기까지 나를 둘러싼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돌이켜 보게 한다. 상호 간의 감정 교류와 소통이 없는 관계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더러는 위험하기까지 한지, 또 사랑 앞에서 겁을 먹고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사랑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사실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랑은 나의 언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상대가 알아듣게 표현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사실 '네가 좋아.',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같은 말이 어려운 말은 아닌데, 카미유처럼 사랑 앞에서 쭈뼛대고 머뭇거리다 놓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끝까지 기다려준 프랑크가 고맙다.
" ‘행복하다‘는 게 뭐니? 그거, 요즘에 유행하는 새로운 말인가 보지? 행복, 좋아하네! 우리가 장난질이나 하고 개양귀비꽃이나 꺾으러 다니려고 이 세상에 온 줄 아니? 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너무 순진한 거야, 이것아." (1권, p. 63)
까짓것,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지, 뭐. 따지고 보면 이건 또 다른 신호야. 내가 거의 밑바닥에 닿긴 했지만, 완전히 닿은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고. 안 그래? 아직 더 힘을 내야 해. 이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더 버텨야 해. 그러면 바닥에 닿을지도 몰라. (1권, p.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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