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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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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맛있는 옥수수가 자란다. 그 마당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사는 거위들에게 어느 날 철학자 거위가 나타나, 더는 마당에 갇혀 있지 말고, 하늘을 나는 거위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라 말한다. 거위들은 몇 달간 철학자 거위의 말을 분석하고 비평하지만 끝내 아무도 날지 않는다. 왜? 옥수수는 너무 맛있고, 앞마당은 안전하니까. 키에르케고르의 우화에 나오는 이 거위들은 미나리 마을의 달팽이들과 닮았다. 




주인공 달팽이는 자신은 왜 이름이 없는지, 왜 다른 동물보다 느린지 알고 싶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면, 다른 달팽이들로부터 비웃음만 살 뿐이다. 달팽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을을 떠나 수리부엉이와 거북이 등 다른 동물들에게 지혜와 조언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반항아'라는 이름을 얻고, 다른 동물들과 달리 왜 자신이 유독 느린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달팽이에게 '반항아'라고 이름을 지어준 건 유독 말이 느리던 거북이다. 거북이는 반항아라는 이름은 두려움이 없는 자가 아니라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붙이는 이름이라고 했다. 모두가 서두르며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애를 쓸 때도 '그렇게 빨리하려고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꼭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해지는 걸까?'라며 듣기 거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반항아라는 거북이의 말에 달팽이는 용기를 얻는다.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크리스토프 라무르 (Christophe Lamoure)는 자신의 철학 에세이 『걷기의 철학』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이 느린 움직임ㅡ느림은 움직임을 함축하므로ㅡ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다. 달팽이가 느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달팽이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는 건 그가 다른 동물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느림'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되기도 하고,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달팽이는 거북이 머리 뒤에 자리를 잡자마자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어. 그랬더니 거북이는 대뜸 질문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그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는 거야.


동화책은 대체로 두세 번 읽는다. 다시 읽을 때 처음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보여서다. 초반에 수리부엉이를 만나러 너도밤나무를 오르던 달팽이의 힘겨운 움직임도 두 번째 읽을 때 보였다. 다람쥐와 거미줄을 피해 가까스로 나무 꼭대기에 도착하니 별빛 가득하던 밤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동이 텄다. 달팽이는 나무를 오르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심지어 그때는 길고 긴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기존의 체제나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건 도처에서 목숨을 위협해오는 다람쥐와 거미줄을 피해 밤을 꼬박 새우고 나무 꼭대기를 오르는 달팽이의 처지와 같지 않을까. 




루이스 세풀베다의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를 읽고 든 몇 가지 생각


"원래 그래"라는 말에 담긴 무관심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달팽이를 다른 달팽이들은 시종일관 무시하고, 윽박지르고, "원래 그래"라는 말로 질문을 원천봉쇄한다. 나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 10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단연 상위에 올릴 만큼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을 참 싫어한다. 듣기도 싫고, 잘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말만큼 자주 들리는 말도 없다. 특히 화자와 청자의 권력이 같지 않을 때 이 말은 치명적이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며 함께 살기

<민들레 나라>를 떠난 달팽이는 부엉이와 거북이에게 도움을 받고, 개미와 딱정벌레, 두더지에게 도움을 준다. 달팽이의 선행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은 도움을 또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Pay Forward' 방식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단체에서 소외당하던 달팽이가 다른 집단과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맺고, 긍정적 가치를 실현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달팽이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어쨌든 달팽이와 똑같이 생긴 '(민들레 나라의) 다른 달팽이'들일 텐데, 왜 그들은 그토록 못마땅해하기만 하고, 밀어내려고만 했을까. 



나이 많은 달팽이들은 왜 안 보일까?

루이스 세풀베다는 '나이 많은 달팽이들'을 못마땅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달팽이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한다. 그들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에 거부감이 크고,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기존의 <민들레 나라>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으러 떠난 달팽이와 무리가 결국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나이 든 달팽이가 단 한 마리도 없었던 사실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비통하다. 



고통은 희망의 자취일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과정은 고되다. 몸도 힘들지만, 매 순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정신적으로도 힘이 많이 든다. 달팽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 몸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흰 액체가 남았다. 그리고 그 흰 자국 위로 민들레 이파리가 새로 돋아났다. 고통은 분명 아프다. 고통이라는 게 대체 단발성이 아닌 데다 더러는 연달아 찾아와 영 맥을 못 추게 한다. 그런데도 일부에서 끊임없이 고통이 아름답다거나 되려 기회가 된다고 말하는 건, 그 허옇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은 자리에서 민들레 이파리가 자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힘이 든 달팽이들이 그 길 위에 허연 액체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민들레 이파리는 그곳에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추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든 견뎌내기만 하면 훗날 '역시 그때 견디길 잘 했어'라고 생각할 때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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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읽어주는 그림책 -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게 되는 그림책 치유 카페
김영아 지음 / 사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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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심리학자이자 독서 치유상담사가 스무 권의 그림책으로 다친 마음을 치유하도록 돕는 책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내 안의 나를 알기', '내가 나를 사랑하기', 그리고 '타인과의 소통'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1장, 외롭고 열등감에 허덕이는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하며2장, 타인과 안전거리를 유지해 살라고 말한다3장.  1장과 2장은 챕터를 구분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어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무방해 보인다.  




특히, 책에 소개된 심리학 용어 두 가지가 핵심 메시지와 상통한다. 하나는 'Here & Now'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분화 (Differentiation of Self)'다. 상담심리학에서 중시한다는 'Here & Now'는 자아를 인식하는 첫걸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아는 것을 말한다. 많은 이들이 지금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결과, 쉽게 분노하고 좌절하며, 낮은 자존감에 견디지 못하고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왜? 자아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자아분화란 생각과 감정을 구분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능력이다. 즉, 『내 마음의 그림책』의 독자가 할 일은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동화책은 걱정인형이 나오는 영국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겁쟁이 빌리 (Silly Billy)』와 데미의 『빈 화분 (The Empty Pot)』이다. 걱정인형(Worry Doll)은 과테말라와 멕시코에서 유래한 작은 인형으로 밤에 베개 아래에 두고 자면 모든 걱정과 근심을 대신 가져다 준다고 알려져 있다. 호기심에 검색해 보니, 쇼핑몰에서 2천~8천 원대 가격에 판매 중이다. 내 걱정과 근심을 대신 짊어져 줄 인형이라니, 하나쯤 가져도 괜찮겠다.  




중국 옛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데미의 『빈 화분』은 전형적인 어른에게 더 권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기에 그렇게 살았다가 혼자 '바보'가 된 느낌에 억울했던 적이 있다면 더욱 권하고 싶다. 애초에 익힌 씨앗을 받은 줄도 모르고 1년 동안 싹을 틔우려고 부단히 애를 써 온 핑이 크게 실망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분노의 지수와 표출에 관한 부분이 흥미롭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에 분노를 느낄 때 그 분노를 수치화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분노에도 지수가 있고, 어느 만큼 표현해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단다. 그 사람의 분노는 5일 수도 있고, 10일 수도 있는데 '분노가 5라면 5만큼, 10이라면 10만큼 표현해도 된다 p. 71'고 한다. 책에는 없지만 검색해 보니 분노지수를 평가하는 테스트도 있던데 분노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을 수치화한다는 게 한편으로는 낯설다. 만약 A라는 사람에 대한 내 분노지수가 50이라서 화를 냈는데, A에게는 분노지수가 5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반대로 누군가의 분노를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사족_
그림책으로 마음을 치유하자는 책은 사실 많다. 이때 많은 경우 독자를 '어른이'로 한정하는데 사실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모든 그림책이나 동화책이 주제나 내용 면에서 오로지 아이를 위해 쓰인 책이라고 보기 어렵고, 나이 먹은 어른이라고 모두 '내면의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며, 타인과 소통에 능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공자 말대로 모든 40세가 불혹인 것은 아니잖은가. 즉, 성인에게 그림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굳이 '어른이'라거나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은 이들'이라는 식으로 독자를 칭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구태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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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이별
박동숙 지음 / 심플라이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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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에는 반드시 이별이 뒤따르기에 기뻐할 만큼 슬퍼할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왜 아플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랑에 빠질까? 본래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머리로 태어난 인간을 제우스가 반으로 쪼개놓았다고 하니 '나의 반쪽'을 그리워하는 게 당연한 건가.




『어른의 이별』은 지난 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보내온 라디오 청취자들의 이별을 토대로 만든 책이다. 사연을 읽는 동안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 <Love Is A Losing Game>이 사운드트랙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플레이되는데 안 그래도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 '사랑은 늘 지는 게임'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란 게임에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게 돼 있고, 또 더 아프기 마련이다. 자신이 패자라는 걸 가장 잘 알면서 게임판을 떠나지도 못한다. 혹시라도 이길 줄 알고 게임판을 못 떠나는 게 아니다. 패자는 본능적으로 본인이 질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사랑밖에 모른다던 어느 노랫말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사랑에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다만 사랑에 모든 걸 걸 용기나 순수함까지는 없었다. 


사랑이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고

사랑해도 안 되는구나, 좌절했던 시절도 있었어. (P. 55)


어느덧 시간은 흘러, '사랑해도 안 되는구나'라며 내 몫의 좌절을 들고나와야 할 때도 있었다. 누구의 사연으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오래전의 기억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나에게는 내 사랑이 가장 아프지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아파하고, 아닌 걸 알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하루를 마치고 인제 그만 편히 쉬어도 되는 순간에 저 어딘가에서 누군가 주섬주섬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고 생각하니 목이 탄다. 누군가는 끼니를 거르고, 세상 모든것이 그 사람을 떠올린다며 당혹스러워 하고 화도 내보다가 기어코 눈물을 쏟는다. 지금 저이는 얼마나 힘들까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그의 눈물이 오롯이 사랑으로 인한 거란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 더 오래 사랑하는 쪽은 언제나 아픈 법이다. 무뎌지기 위해 얼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의 많은 이들은 여전히 사랑을 권한다. 프랑스 소설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말처럼 '욕망이 불을 질러놓고 결국 재가 될지언정,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눈물이 날지언정'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은 언제나 옳으니까. 



사랑이 끝났다고 누구를 혹은 무엇을 탓할 필요는 없다. '~를 했더라면' 또는 '~를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며 이미 일어난 일을 후회하거나 반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뒤늦게 바랄 필요도 없다. 그저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어쩌면 그대는 그대에게 주어진 작은 인연을 붙들고 너무 큰 부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래, 그대도 참 많이 외로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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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없는 여름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심혜경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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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어 보고 싶을 만큼 깊이 있는 대사, 현학적이면서 시니컬한 주인공의 독백, 잔잔한 배경음악, 연기 못하는 배우는 낄 자리가 없는 "진짜 배우"들이 총출연하는 여성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시리 허스트베트의 『남자 없는 여름 (원제: The Summer Without Men)』은 프랑스 출신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이 만든 영화 <다가오는 것들 (원제: L'Avenir)>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구석이 제법 많다.

 



『남자 없는 여름』은 60세 신경과학자(보리스)가 20대 여자에게 반해 결혼생활을 '일시 정지(pause)'하자며 30년을 같이 산 아내(미아, 대학교수)를 떠나면서 시작한다. 기대보다 이야기의 줄기는 단순한데, 그 줄기를 타고 자라는 잎이 풍성하다. 등장인물이 원체 많고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가득 짊어진 데다 문학과 심리학, 철학 등 한데 뒤섞여 있다.



남편의 '일시 정지' 선언으로 완벽하던 가정이 볼썽사납게 해체된 후 미아는 "당신은 대체 왜 나를 떠났을까?"라는 질문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스트레스로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결국 미아는 대학 강의를 미루고, 남편과 같이 살던 아파트를 떠나 친정엄마가 사는 고향 미네소타로 가서 10대 여자아이들에게 시 창작을 가르치면서 상처를 치유한다.




80이 훌쩍 넘은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이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죽음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섯 마리 백조(엄마, 조지, 레지나, 페기, 애비게일)'의 대척점에는 이제 막 시 짓는 법을 배우는 10대 소녀들(앨리스와 '조폭 4인방: 제시카, 애슐리, 니키, 조앤)이 있다. 멋 부린다며 고딕 화장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또래 남학생에게 설레는 학생도 있고, 수업에 충실하지 않은 아이도 있고 목이 빠져라 수업을 기다리는 아이도 있고, 왕따를 당하는 아이도 있다. 




더 무엇을 갈망해야 하나 싶을 만큼 이미 많은 걸 이룬 50대 중반의 대학교수의 삶도 남편의 외도 앞에서는 이토록 속수무책이다. 강의를 미뤄야 할 만큼 '자기 연민'에 빠져 버린 미아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편뿐이다. 미아는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남편, 그러니까 남자 없이 여름을 보내야 한다. 딸 데이지, 동생 베아트리스, 다섯 노모와 여학생들, 이웃들, 그리고 S 박사까지 남편의 빈 자리를 여자들이 메워줌으로써 미아의 삶은 복원된다. 



미아는 '그 여름의 일'을 되돌아보면서 운명의 지침 하나하나가 다음 인생의 고비에 전환점이 되는 걸 알았다고 했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철학교사이던 나탈리도 그랬다. 남편의 외도로 삶이 요동친다. 그러나 끝내 이겨내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살아가겠다는 의지도 되찾는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던 나탈리처럼 미아는 '우리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낯설게 하기, 그리고 거리 두기 방식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모두 만화 속의 등장인물이며, 갈팡질팡하는 삶을 사는 어릿광대의 얼굴을 하고, 가는 곳마다 대단한 문젯거리들을 내지르는 존재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다는 생각은 곧 사라지고, 더럽거나 비극적이거나 한낱 슬프게만 보인다.  <남자 없는 여름> 중에서 




미아는 비극과 희극은 남자와 여자처럼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더 많다며 그저 알맞은 순간에 정확하게 이야기를 끝맺는 게 포인트라고 했다. 미아의 말을 듣고 보니,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라던 찰리 채플린이 어쩜 틀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가까이서 또는 얼마나 멀리서 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확히 인생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인생은 희극이나 비극이 아니라 희비극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인물의 심리에 기대고, 이른바 '명대사'라고 꼽을 만한 대사들이 줄을 잇는 작품이다. 그러나 결말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을 필두로 한 여러 문학 작품과 철학, 역사, 심리학, 그리고 신경학까지 거친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맥이 빠진다고 할까. 굳이 말하자면, 이 책에서 가장 진부한 게 바로 결말이라 평점에서 0.5점은 빼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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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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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가족이 등장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을 책으로 읽으면 이런 느낌일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 아직은 공주님이 되는 게 꿈인 어린 딸, 남편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지만 너무나 듬직한 슈퍼우먼 아내, 그리고 아내 옆에서 능글美를 폭발하는 이기호 작가까지 이 집 식구는 모두가 '러블리'하다. 웃음이 빵 터질 만큼 엉뚱하거나, "MSG 친 게 아니고, 진짜 이렇게 말했다고요?"라고 묻고 싶을 만큼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찌르거나, 아니면 어째 "바보처럼 보이는" 답변 (예를 들어, 이기호 작가가 아버지에게 "슈퍼 파워"를 외치던 대목. 내가 다 부끄러웠지만 가장 재미있고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까지 총망라한다.  




이기호 작가의 글에는 꼭 들어 있는 요소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재미다. 부담 없고, 가식 없고, 꾸밈없는 글에 키득거리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나 아쉬움이 들 때가 많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한 방이다. 아무리 작가라지만 이 짧은 분량으로 어떻게 이렇게 울고 웃기나 궁금해서 한번은 시선을 붙드는 문장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실 뜯어보면 그렇게 멋들어진 말도 아니고, 세상 처음 보는 말도 아니다. 옷으로 치면, 비싼 브랜드도 아니고, 실험적인 디자인도 아니고, 그냥 대문짝만하게 '세일'이라는 문구가 달린 '인터넷 최저가' 옷을 대충 골라 입고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강력할 수가 없는 거다. 웃기는 건 정말 웃기고, 코끝을 찡하게 하는 건 정말 콧물을 닦아내야 할 정도로 코끝을 찡하게 한다. 재주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랜선이모'를 불러 모을 만한 세 아이는 사랑스럽고, 능글미에 '허풍+엄살+허당미'라는 귀한 쓰리콤보까지 장착한 이기호 작가는 40대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건 멋짐이 폭발하는 아내다. '이런 마인드여야 결혼해 살겠구나' 싶을 만큼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멘트를 불쑥 남기는 건 일도 아니다. 남편에게 감동을 주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시크한 듯 보이나 말도 안 되게 감동적인' 발언과 행동을 늘 준비한다. 마감에 쫓기는(실제로는 마감기한을 넘긴) 작가 남편을 위해 거짓말을 해 가며 혼자 아이를 낳는가 하면, 몇 해씩 자투리 돈을 모아 만든 목돈을 시아버지 병원비로 투척하고,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첼로를 배우고 싶다는 "로맨틱이라 쓰고 허황된이라 말할 꿈"을 꾸는 남편을 위해 냉큼 첼로를 사다 주고 초등 4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초급반에 넣어주는 아내라니! 어머니는 강하다. 그러나 아내도 슈퍼 울트라 급으로 강하다.

  

 


더위마저 오락가락하는 요새 같을 때 편하게 누워 읽기 좋은 책으로, 읽다 보면 오래전에 찍은 가족사진이라도 한번 꺼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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