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없는 여름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심혜경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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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어 보고 싶을 만큼 깊이 있는 대사, 현학적이면서 시니컬한 주인공의 독백, 잔잔한 배경음악, 연기 못하는 배우는 낄 자리가 없는 "진짜 배우"들이 총출연하는 여성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시리 허스트베트의 『남자 없는 여름 (원제: The Summer Without Men)』은 프랑스 출신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이 만든 영화 <다가오는 것들 (원제: L'Avenir)>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구석이 제법 많다.

 



『남자 없는 여름』은 60세 신경과학자(보리스)가 20대 여자에게 반해 결혼생활을 '일시 정지(pause)'하자며 30년을 같이 산 아내(미아, 대학교수)를 떠나면서 시작한다. 기대보다 이야기의 줄기는 단순한데, 그 줄기를 타고 자라는 잎이 풍성하다. 등장인물이 원체 많고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가득 짊어진 데다 문학과 심리학, 철학 등 한데 뒤섞여 있다.



남편의 '일시 정지' 선언으로 완벽하던 가정이 볼썽사납게 해체된 후 미아는 "당신은 대체 왜 나를 떠났을까?"라는 질문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스트레스로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결국 미아는 대학 강의를 미루고, 남편과 같이 살던 아파트를 떠나 친정엄마가 사는 고향 미네소타로 가서 10대 여자아이들에게 시 창작을 가르치면서 상처를 치유한다.




80이 훌쩍 넘은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이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죽음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섯 마리 백조(엄마, 조지, 레지나, 페기, 애비게일)'의 대척점에는 이제 막 시 짓는 법을 배우는 10대 소녀들(앨리스와 '조폭 4인방: 제시카, 애슐리, 니키, 조앤)이 있다. 멋 부린다며 고딕 화장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또래 남학생에게 설레는 학생도 있고, 수업에 충실하지 않은 아이도 있고 목이 빠져라 수업을 기다리는 아이도 있고, 왕따를 당하는 아이도 있다. 




더 무엇을 갈망해야 하나 싶을 만큼 이미 많은 걸 이룬 50대 중반의 대학교수의 삶도 남편의 외도 앞에서는 이토록 속수무책이다. 강의를 미뤄야 할 만큼 '자기 연민'에 빠져 버린 미아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편뿐이다. 미아는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남편, 그러니까 남자 없이 여름을 보내야 한다. 딸 데이지, 동생 베아트리스, 다섯 노모와 여학생들, 이웃들, 그리고 S 박사까지 남편의 빈 자리를 여자들이 메워줌으로써 미아의 삶은 복원된다. 



미아는 '그 여름의 일'을 되돌아보면서 운명의 지침 하나하나가 다음 인생의 고비에 전환점이 되는 걸 알았다고 했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철학교사이던 나탈리도 그랬다. 남편의 외도로 삶이 요동친다. 그러나 끝내 이겨내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살아가겠다는 의지도 되찾는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던 나탈리처럼 미아는 '우리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낯설게 하기, 그리고 거리 두기 방식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모두 만화 속의 등장인물이며, 갈팡질팡하는 삶을 사는 어릿광대의 얼굴을 하고, 가는 곳마다 대단한 문젯거리들을 내지르는 존재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다는 생각은 곧 사라지고, 더럽거나 비극적이거나 한낱 슬프게만 보인다.  <남자 없는 여름> 중에서 




미아는 비극과 희극은 남자와 여자처럼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더 많다며 그저 알맞은 순간에 정확하게 이야기를 끝맺는 게 포인트라고 했다. 미아의 말을 듣고 보니,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라던 찰리 채플린이 어쩜 틀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가까이서 또는 얼마나 멀리서 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확히 인생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인생은 희극이나 비극이 아니라 희비극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인물의 심리에 기대고, 이른바 '명대사'라고 꼽을 만한 대사들이 줄을 잇는 작품이다. 그러나 결말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을 필두로 한 여러 문학 작품과 철학, 역사, 심리학, 그리고 신경학까지 거친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맥이 빠진다고 할까. 굳이 말하자면, 이 책에서 가장 진부한 게 바로 결말이라 평점에서 0.5점은 빼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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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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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가족이 등장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을 책으로 읽으면 이런 느낌일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 아직은 공주님이 되는 게 꿈인 어린 딸, 남편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지만 너무나 듬직한 슈퍼우먼 아내, 그리고 아내 옆에서 능글美를 폭발하는 이기호 작가까지 이 집 식구는 모두가 '러블리'하다. 웃음이 빵 터질 만큼 엉뚱하거나, "MSG 친 게 아니고, 진짜 이렇게 말했다고요?"라고 묻고 싶을 만큼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찌르거나, 아니면 어째 "바보처럼 보이는" 답변 (예를 들어, 이기호 작가가 아버지에게 "슈퍼 파워"를 외치던 대목. 내가 다 부끄러웠지만 가장 재미있고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까지 총망라한다.  




이기호 작가의 글에는 꼭 들어 있는 요소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재미다. 부담 없고, 가식 없고, 꾸밈없는 글에 키득거리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나 아쉬움이 들 때가 많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한 방이다. 아무리 작가라지만 이 짧은 분량으로 어떻게 이렇게 울고 웃기나 궁금해서 한번은 시선을 붙드는 문장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실 뜯어보면 그렇게 멋들어진 말도 아니고, 세상 처음 보는 말도 아니다. 옷으로 치면, 비싼 브랜드도 아니고, 실험적인 디자인도 아니고, 그냥 대문짝만하게 '세일'이라는 문구가 달린 '인터넷 최저가' 옷을 대충 골라 입고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강력할 수가 없는 거다. 웃기는 건 정말 웃기고, 코끝을 찡하게 하는 건 정말 콧물을 닦아내야 할 정도로 코끝을 찡하게 한다. 재주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랜선이모'를 불러 모을 만한 세 아이는 사랑스럽고, 능글미에 '허풍+엄살+허당미'라는 귀한 쓰리콤보까지 장착한 이기호 작가는 40대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건 멋짐이 폭발하는 아내다. '이런 마인드여야 결혼해 살겠구나' 싶을 만큼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멘트를 불쑥 남기는 건 일도 아니다. 남편에게 감동을 주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시크한 듯 보이나 말도 안 되게 감동적인' 발언과 행동을 늘 준비한다. 마감에 쫓기는(실제로는 마감기한을 넘긴) 작가 남편을 위해 거짓말을 해 가며 혼자 아이를 낳는가 하면, 몇 해씩 자투리 돈을 모아 만든 목돈을 시아버지 병원비로 투척하고,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첼로를 배우고 싶다는 "로맨틱이라 쓰고 허황된이라 말할 꿈"을 꾸는 남편을 위해 냉큼 첼로를 사다 주고 초등 4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초급반에 넣어주는 아내라니! 어머니는 강하다. 그러나 아내도 슈퍼 울트라 급으로 강하다.

  

 


더위마저 오락가락하는 요새 같을 때 편하게 누워 읽기 좋은 책으로, 읽다 보면 오래전에 찍은 가족사진이라도 한번 꺼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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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두 시 나의 도시 - 지금 혼자라 해도 짙은 외로움은 없다
조기준 지음 / 책들의정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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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조기준은 뮤지컬 배우였다가 글을 만지는 편집자도 됐다가 이제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꾼단다. 대체 몇 살이길래? 자그마치 불혹(不惑)이다. 좀 더 자세히는 불혹의 싱글이다. 지난여름 <막돼먹은 영애씨>의 작가 한설희의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로 40대 비혼 여성의 싱글라이프를 훔쳐본 뒤로, 같은 나잇대의 남성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읽었는데 40대의 삶이라고 30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갓집에 갈 일이 늘어나고, 불쑥불쑥 독거사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만 빼면. 




똑같은 마흔이어도 기혼자의 삶은 미혼자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같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기혼자로 사는 게 비혼자로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반대로 비혼자로 사는 게 기혼자로 사는 것보다 '낫다'고도 말할 수 없다. 각각의 경우 장단점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둘은 우월을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 두 가지를 대립 구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설희의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와 마찬가지로 조기준의 『밤 열두 시, 나의 도시』도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웃음과 솔직함을 무기로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거나 공감을 구한다. 




미혼이든 비혼이든 결국 예전보다 그 수가 훨씬 더 많아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당분간 이 추세는 계속될 거로 보인다. 결혼했든 안 했든 그건 그냥 개인 선택의 결과다. 안 하든 못 하든, 어쨌든 그 사람의 인생이고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신경을 쓰나. 마찬가지로 비혼이든 미혼이든 당사자 역시도 남의 눈치 볼 필요 없다. 각자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부러워할 게 아니라 출생률 감소에 따른 대책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궁리하는 게 더 시급하다. 




40대의 이른바 '공감 에세이'는 결국 타인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40대가 되어서도 결혼 안 하고 사는 처지'를 밝히고, 타인의 공감을 구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이 아닐까? 데카르트나 니체, 또는 칸트 역시 평생 독신이었다는 얘기를 가져올 필요조차 없었다. 타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가는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이든 둘이어야 잘 사는 사람이든 '잘'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사노 요코의 의사가 젊은 세대의 비혼에 우려를 표했을 때 그가 답하지 않았나. "세상이 좋아져 결혼 안 해도 살기 괜찮아진 것뿐"이라고. 




저자 조기준은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단다.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계속 바꾼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밤 열두 시'는 오늘이 내일이 되는 시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이라서 좋단다. 직업을 수차례 바꾼 거로도 모자라 여전히 많은 것을 꿈꾼다. 해외여행은커녕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자기 집에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다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이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 그의 말대로 '모든 일에 조심스러워지고, 모든 일에 쉽게 나서지 못하게 되는 그런 때를 관통(p. 118)'하면서도 여전히 꿈꿀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결혼을 못 했든, 안 한 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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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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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메이 올콧이 1868년 미국에서 『작은 아씨들』을 선보인 후 약 100년이 지나 이곳에서 박경리가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전자는 남북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이 된 어머니와 네 딸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조선 말기부터 1910년 한일병탄 이후의 경남 통영을 배경으로 한 김봉제 가문의 이야기이다. 딸들을 내세운 동서양의 두 작품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겸 같이 읽었는데 전자가 엄격한 청교도적 가치를 시종일관 유쾌발랄한 분위기에서 전하는 반면, 후자는 저주받은 가문의 이야기를 시종일관 침울하고 비통한 분위기에서 전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한 점과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재능 있던 둘째(용빈과 조)가 되려 딸들 중에 가장 늦게 제 짝을 만나거나 못 만난 점은 공교롭게도 같다.  




김약국의 딸들은 무려 3대에 걸친 김봉제 가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영미권에는 '김 씨 딸들의 저주 (The Curse of Kim's Daughters)'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는데, 봉제-봉룡 형제에게서 시작해 (봉룡의 아들) 성수와 그의 딸들에게로 이어지는 가문의 저주는 비극적인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층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의 제목인 '김약국'은 김봉룡의 아들, 김성수를 가리킨다. 그의 어머니 숙정은 송 씨 아들 욱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사주가 안 좋다며 혼인이 삐그러지면서 오만불손한 봉룡에게 시집가 끝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까지 잃은 성수는 백부 봉제와 백모 송씨의 집에서 눈칫밥을 얻어먹다 약국을 물려받고 한실댁과 결혼한다. 둘은 딸 다섯을 낳아 어장을 운영하며 부족함 없이 잘 살아가지만 곧 김약국의 집안에 연이어 비극적인 사건이 터진다.





모파상의『여자의 일생』에서 주인공 잔느가 그랬다. 운명이 일생 자신을 악착같이 괴롭혔다고. 『김약국의 딸들』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도 운명의 악착같은 괴롭힘을 피하지 못한다. 일찍 과부가 된 큰딸 용숙은 유부남 의사의 아이를 낳아 제 손으로 죽이고, 든든한 아들 노릇을 하던 똘똘한 둘째 용빈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얼굴이 고운 말괄량이 셋째 용란은 머슴과 사귀다 아편쟁이 연학에게 시집가 맞고 살고, 넷째 용옥은 언니 용란을 흠모하던 기두의 아내가 돼 비극적 죽음을 면치 못하고, 막내둥이 용혜는 용빈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공부하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돼 고향으로 돌아온다. 특히 어머니 한실댁을 빼닮아 늘 지나치게 순종적이던 용옥이 유독 어머니와 함께 가장 허탈한 죽음을 맞는 건 주목할 만하다.  





인상적인 캐릭터는 한실댁과 셋째 용란이다. 한실댁은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고, 자녀 특히 딸에게는 엄격한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 고생과 박복의 아이콘이다. 자손 귀한 집에 시집와 첫아들을 먼저 보낸 후 연달아 딸만 낳아 평생 가슴에 철천지한을 품고 살고, 팔자 사나운 딸들 때문에 인병까지 얻었기에 부디 저승길이라도 편하기를 바랐건만 한밤중에 비명횡사해 어느 인물보다 탄식을 자아낸다.


 


특히, 셋째 용란은 "한국판 마담 보바리"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딸 다섯 중에 얼굴이 제일 고와 부잣집에 시집갈 줄 알았더니 하필 집에서 부리는 하인과 연애를 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처녀가 밤마다 서방질한다고 온 동네 소문난 탓에 용란은 아편에 중독된 성불구자에게 시집가 인생이 꼬여버린다. 용란만 따로 떼어내도 충분히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인생길은 험하다. 신분을 뛰어넘은 한돌과의 사랑, 아편에 중독된 남편에게 당하는 폭력, 자신을 남몰래 흠모해온 기두의 애정과 애증의 줄타기까지 용란의 인생길은 온통 가파르기만 하다. 




홍섭이 떠난 후 비탄에 잠긴 용빈에게 선교사 케이트가 그랬다. "인생이란 사철이 봄일 수는 없잖아?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고 한겨울이 오면 헐벗고 떨어야 하지만, 이내 봄이 오지 않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 돼요."라고. 용빈은 희망을 잃은 게 아니라 누군가 자기의 희망을 앗아갔다며 남은 거라곤 절망뿐이라 했다. 친일파이자 고리대금업을 하던 정국주 같은 인물을 빼면 용빈을 포함한 거의 모든 등장 인물에게 눈곱만큼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살을 에일 만큼 찬 바람이 분다고 마냥 체념하고 있기에는 저 어느 길목에서 코가 빨개진 채 기다리는 봄의 햇살이 너무 유혹적이다. 설령 김약국의 집안에 운명의 저주가 있었다 쳐도, 용빈과 용혜라면 그 지긋지긋한 끈을 끊어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부디 믿음을 잃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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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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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 (John Bunyan)의 『천로역정 (원제: Pilgrim Progress)』의 엄격한 청교도적 가치를 강조하고, 네 자매와 어머니를 통해 페미니즘적 시각을 부각한 작품이다. 긴 분량과 반복되는 지루한 설교조의 문장은 저자 특유의 유머와 흥미진진한 네 딸의 로맨스로 잘 가렸다. 아무래도 둘째 딸 조의 절친한 친구인 '이웃 소년 로리의 짝 찾기'가 인기몰이에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싶은, 소위 말하는 '밑밥'이 잘 깔린 작품이기도 하다.  



작은 아씨들은 페미니즘 소설로 평가받는다. 경제력을 상실한 아버지는 실질적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는 어린 딸에게 가려져 역할이 미비하다. 또, 마치 씨 부부를 비롯해, 첫째 딸 메그와 존에게서도 가부장적인 전통을 탈피해 서로 존중하고 협조하는 부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딸들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며, 남자의 경제력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한다. 특히, 가장 연약하고, 수줍음이 많아 의사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던 셋째 딸 베스를 가장 먼저 생을 마감하는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나름의 한계도 보인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팔고, 글을 써서 생활비를 책임지고, 부잣집 남자의 구애를 뿌리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글쓰기)에만 몰두하던 조에게 저자는 갑자기 펜 대신 빗자루와 행주를 쥐어주고 새로운 가치와 기쁨을 발견하게 한다. 조는 '멋있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p. 311)'이고, 부모님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며 '신의 섭리이자 신이 내린 임무' 운운하는 대목은 허탈하다. 애초에 <좋은 아내들>이란 당혹스러운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 걸 고려하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설상가상으로 '멋있는 여주인공이 아닌 평범한 여자' 조는, 늙고 못생기고 가난한 바에르 교수를 남편으로 맞이한다. 아무리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로리와 조를 부부로 맺어주기 싫었다고 해도, 일찍부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탐색하고, 그것으로 가족을 부양할 만큼 경제력과 재능을 연마한 젊은 여성을 끝내 늙고 가난한 교수의 아내로 설정한 건 못내 아쉽다. 늙은 로체스터가 화재사고로 한쪽 팔과 눈을 잃고 나서야 제인 에어의 차지가 됐을 때의 서글픔과 맞먹는다.  




늙고 가난한 남편이라도 조라면 씩씩하게 잘 살아낼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을까?  새 세상을 갈망하며 될 수만 있다면 혁명가가 되고 싶다던 재능있고 성실한 고작 스물네 살의 조에게 마흔이 넘은 가난한 남편이라니! 혁명가가 싫고, 되고 싶지도 않다던 에이미보다, 아니 에이미만큼 조도 분명 행복하겠지?  "늘 이래요. 재미있는 건 모두 에이미 차지이고 난 일만 해야 하죠. 정말 불공평해요. 오, 정말 너무하다고요! (p. 120)"라며 미래의 남편과 제 인생이 걸린 줄은 꿈에도 몰랐던 외국 여행 기회를 놓쳐 아쉬운 마음에 소리 지르던 조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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