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홍수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나에게도 이성(異性)으로 인하여 가슴 절절한 시기가 있었던가? 그렇구나, 있구나... 가슴 한쪽 귀퉁이에 꼭꼭 숨겨둔 실연의 아린 추억들... 세월의 더깨에 이젠 희미해졌어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앙금으로 남아있구나. 그 시절의 치기를 생각하면 그저 먹먹하여 로맨스소설(이하 로설)을 조금 회피하는 편이다. 100권의 책을 읽는다면 한 두어 권 읽을까. 어쩌다 가끔 기욤 뮈소의 로설이나 인연 있는 몇몇 작품을 읽었으나, 구태여 로설을 찾아서 읽진 않았었다. 아직도 내게 사랑은 아픔이 더 많은 느낌의 단어이기에…….

 

여기서 잠깐!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왜 로설을 더 좋아할까? 이런 의문은 진화심리학으로 보통 설명되더라.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일! 그러다보니 연애와 결혼에 대한 심리가 대중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살아 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받는 로버트 트리버스(R. Trlvers)의 부모 투자 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에 의하면 자식에게 많이 투자(임신과 출산, 육아와 양육)하는 여성은 짝짓기 상대를 신중히 고르는 반면, 자식에게 적게 투자하는 남성은 많은 짝짓기 기회를 얻기 위해 경쟁하도록 진화했다네. 그러니 남성들에게 있어 번식을 높일 수 있는, 즉 젊은 여성과 정신적 헌신 없이 무차별 관계할 수 있는 포르노그래피가 남성 판타지의 세상이라면,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안전한 번식을 보장하는, 강하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져 바람을 피울 염려가 많은 남성이 여주인공을 만나 그야말로 평생 자신에게만 헌신·맹세하는 운명적 만남의 로맨스 소설이 여성들의 로망이 되는 거다. 그래서 로설에는 새드엔딩보다 해피엔딩이 대세란다. 독자들은 여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감정이입)하여 대리만족의 몽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 결국 로설=진화심리학의 산물? ^^

 

<눈꽃>! 아주 이쁜 사촌 여동생의 이름이 설화이기에 은근히 끌린 로설이다. 이 소설을 읽어보니 감성 충만의 매력적 주인공 캐릭터가 확실히 여성 독자를 홀릴 만하다(남성 독자들에겐 글쎄...). 남주인공의 캐릭터를 잠시 보자. 제이어드 에이드리언.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금융그룹인 에이드리언뱅크의 은행장이며 실질적 주인인 에드워드 에이드리언의 유일한 직계 손자이다(당연히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수퍼울트라캡숑, 능력과 야심은 메가톤짱). 생긴 거는 또 어떻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지. 편안한 옷차림으로도 절대 가려지지 않는 저 부유하고 우아한 분위기, 차가우면서도 오만하고 지적인, 무심한 은회색 눈동자의 키 큰 사내. 서영이 데이빗과 결혼을 앞두자 술 냄새 가득 풍기며 나타나 강렬한 눈빛으로 "나는......, 너 못 보내."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라고 말하는 나쁜 남자. 그리고 사흘 후, 결혼을 일주일 앞둔 서영은 밤을 함께 보낸다... 한마디로 유전적으로도 우수하면서 헌신적인, 갖출 것 다 갖춘 캡짱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런 우월성보다 더한 페이소스가 있으니, 그것은 서영과의 우연과 만남이 반복되는 이면에 흐르는 제이어드의 심적 흐름이다. 우연은 운명을 낳는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여자인 것 다 아니까,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여자이니까" 그렇게 놔주고 싶었건만 서영을 처음 본 그날(아래 참조)부터 심장에 박힌 가시 하나. 속절없이 타는 가슴을 삭일 방법이 없어 그저 맴돌기만 한다.

 

지루한 기분으로 보스턴 거리를 운전할 때 보이던 낡은 포드 자동차 하나. 그리고 그 뒤에 앉아 열린 창문에 기댄 채 거리를 바라보며 화하게 웃던, 맑고 까만 눈동자의 열 살 정도 된 동양인 소녀. 바람에 흩날리던 단발머리.

순간적으로 지나간 그 빛을 그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무작정 따라가 버렸고, 그날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제어하지 못하는 욕심 하나가 하루하루 자라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멀리서 지켜보고 맴돌아야 했다. 149쪽

 

어쨌거나 열 살 조금 넘은 소녀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맑은 눈동자에 끌려 제이어드는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따뜻한 웃음, 깨끗함, 떨림…….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해진 느낌을 받는다. 사랑의 이렇게 찰나의 끌림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서영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본다. 어느덧 소녀는 예쁜 고등학생이 되었고, 함박눈이 내렸던 그날 저녁, 그때까지 아무 말도 못했던 그의 입술에 수줍은 소녀의 입술이 닿았다. 무거운 책임감과 어두운 기억만이 있었던 제이어드의 인생에 그렇게 따뜻함이 되어 찾아왔던 소녀의 입맞춤. 그런데 그 소녀가 여자가 되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그의 곁에, 함께 있었다.

 

"얼마면 돼?" 가을동화에서 원빈이 송혜교에게 했다는 대사인가? _사랑, 웃기지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_ 제이어드는 "이건 그냥 가벼운 감정이라고. 갖고 싶었던 것을 갖지 못해 쌓였던 성욕일 뿐이고, 그 갈증이 해결되면 너 따위는 모두 잊힐 거라고. 그리고 너도, 그럴 거라고. 이렇게 느껴지는 떨림도 모두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서영이 재벌의 정부나 하면서 인생을 대강 살아 나갈 수 없는 여자라는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너랑 자고 싶어."……. 소리는 서영의 가슴 속에 그대로 창이 되어 박혀 버렸다... "하룻밤에 백만 달러." 제이어드의 담담한 제안에 서영은 "언니랑……, 잤어요?" "내 언니랑 잔 남자는 내게 형부 아니면 남이에요. 그 외엔……, 안 돼요." 떨리는 목소리로 서영은 거부하고, 한참 뒤 제이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 버린다. 사랑의 근원은 욕망이련가. 차도남의 나쁜남자 캐릭터가 물씬하다. 그러면서도 서영을 짝사랑하고 배려하는 제이어드의 마음이 시리기만 하다. 아참, 러브스토리의 통속적인 플롯, 삼각관계. 여기서는 제이어드를 사랑하는 민영과 서영 자매, 서영을 사랑하는 데이빗과 제이어드의 사각관계이나, 제이어드와 서영에 8할의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언니 민영이 제이어드를 좋아한 건 서영의 순수를 포장하기 위한 그냥 곁가지일 뿐...)

 

눈꽃! snowflower. 눈꽃은 서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커피숍의 상호이기도 하지만, 소설 전반을 가로지르는 사랑의 은유이자 독자의 감성을 어루만지는 메타포가 된다. 눈은 소설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도구이며, 서영과 제이어드의 마음을 연결하고 표현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 춥고 시린 크리스마스 새벽, 하얗고 푸른, 아름다운 눈꽃 속에서 서영을 기다리던 제이어드. 서영이 고교시절, 눈이 엄청나게 내려 전기도 전화도 불통이던 날,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걸어갈 때 마술처럼, 기적처럼 "타. 집에 데려다 줄 테니."라고 말한 까맣고 커다란 차 안의 키 큰 남자. 그 겨울, 그날부터 눈이 그렇게 많이 오던 날 세 번의 데이트. 그 세 번째 날, 짧고 아쉬웠지만, 그 뒤로 그들에게 다가왔던 어렵고 서러운 시간들을 모두 지배해 버렸던 그 수줍은……, 입맞춤. 그 때 서영은 차장 밖의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던 작은 눈송이들이 마치 눈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그 때 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남자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눈이 더 이상 안 왔기 때문이라나...^^  

 

남녀상열지사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상사에 불과하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짝사랑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향하기까지 겪어야하는 시련의 파고가 애처롭다. 에이드리언가에 천한 피가 섞이길 원하지 않는 제이어드의 어머니 사라 회장의 위협적인 견제구를 서영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래서 이 소설은 해피한 엔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새드 엔딩? 이 글을 적으면서 중·후반부 주요 스토리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새로운 독자의 몫이기에 언급을 유보하는 게 맞을 듯하다. 눈이 시린 듯한 사랑이 무엇인지, 눈꽃 같은 애틋함과 설렘을 느껴보려면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옛날 하이틴로맨스나 할리퀸문고와 그 궤적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품격과 감동은 몇 수 위의 로설이다.

 

이 책은 2008년 출간 이후 이번에 약간의 손을 본 후 재출간한 책이라 한다. 앞선 책을 읽지 않아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캐릭터 중심의 플롯 짜임이 괜찮았고 매끄럽게 읽혔다. 다만 캐릭터를 사건에 빠트리는 후반부의 위기와 클라이맥스에도 불구하고 그 역동성은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워낙 신데렐라 막장 드라마가 판치다보니 나의 감성이 웬만한 스토리에는 무감각해져 버린 탓이리라.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겐 사랑을 잃고 고글도 쓰지 않은 채 설원을 활강하는 제이어드의 잿빛 슬픔이 가장 인상적이었구나. 난 그 마음 안다. _실연을 하도 많이 당하다 보니...^^_ 그래서인지 제이어드의 감정 흐름을 좀 더 깊이 있게 풀어내었다면, 예를 들어 슈베르트의 마왕처럼 활강과 내면의 소리를 주고 받는 장면이었다면 더 좋았을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이래저래 운명적 만남을 좋아하는 로설 마니아는 읽어볼만한 책인 듯하다. 도종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르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경영/자기계발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

출판계에서는 여름이 대목인가?
경영 경제 분야에 꽤 굵직한 책들이 출간되어 5권만 고르기가 정말 쉽지 않다.
특히 피터 드러커 교수의 책을 넣을까말까 한창 고민하다가 빼어버렸으니...
휴가철에 사람들이 책 좀 읽는가 보다.

---------------------------------


1.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교수의 논조는 모두 함께 잘 사는 경제주의에 있는 거 같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그러고 보니 어느 새 장 교수 책 안 빼먹고 많이 읽었구나... 역시 부키...

 

2. 탐욕 경제 - 부의 분배 메커니즘을 해부하다 ㅣ 화폐전쟁 5  

쑹훙빙의 책도 장 교수 책 만큼이나 필독서이지... 출간될때마다 안읽어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영미식 자본주의의 시각이 아닌 신선함이 있지... 

또 슈퍼 글로벌 금융위기가 올건가? 갑자기 요즘 인터넷을 달구는 중국예언이 생각나네. 8/19 러시아 지역 전쟁 9/10 3차 대전 일어난데요~~~^^

 

3. 신호와 소음 - 미래는 어떻게 당신 손에 잡히는가 

<뉴욕타임스>에서 15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아마존>에서는 ‘올해의 책(논픽션 부문)’으로 선정된 책... 카피 한번 잘 뽑았다... 당연 관심...

 

4. 애자일 셀링 Agile Selling - 판매 채널의 혁신 ㅣ accenture 시리즈 5  

 조직의 성장 전략을 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 하니 눈이 한 번 더 가네...

은근 응용이 될 듯한 책이라 끌렸다.

 

5. 수신제가- 강유병거

너무 좋은 책이 많아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택했다. (너! 유혹적이야!)

동양고전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지갑 털어 사기엔 좀 그렇고... 이 책이 신간평가단 책으로 선정되면 엄청 좋으련만... 이런 책 잘 안되더라... 읽어보고 싶네... 정말 그러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지기 2014-08-07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8월 추천 도서(5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파트장 드림

표맥(漂麥) 2014-08-07 10:08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항상 수고하십니다. 더운 여름, 시원한 나날 되시길...^^
 
루시퍼의 해머 세트 - 전3권 래리 니븐 컬렉션 7
레리 니븐.제리 퍼넬 지음, 김찬별 옮김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래리 니븐Larry Niven! 대단하다. 그의 <링월드>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이 책<루시퍼의 해머Lucifer's Hammer>도 상당히 흥미진진한 A급 읽을거리이다. SF마니아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수준의 지구 종말 소설! _야아~ 이렇게 한 줄만으로도 충분한 독후 같건만... 이 이상 더 뭘 어떻게 덧붙일 게 있남. 그래도 3권이나 되는 책이니만큼 조금 아쉽다보고 조금만 더 주절거려 보자._

 

일단 기본적인 사항을 정리하면 이 책의 메인 테마는 지구와 혜성의 충돌이다.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에서 총 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원작은 놀랍게도 출간연도가 1977년도이다. 약 37년 전의 책인데도 읽는데 별로 어색함이 없으니 그 어찌 대단하다 하지 않으리. 요즘의 젊은이들은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을 알까? 아폴로-소유즈 도킹 계획이 성공한 게 1975년 7월 17일이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나온 이 책에 미국의 아폴로와 소련의 소유즈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스페이스랩)에 도킹하는 장면을 책으로 실감나게 풀어내고 있으니 당시의 과학수준에 픽션을 더한 소설이라고도 하겠다. 아폴로에는 컴퓨터가 있지만 소유즈에는 없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엄청난 과학 진보와 함께 소련 몰락의 전주곡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앗! 여기서 하나 더! 1968년 '이카루스'라는 이름의 소행성이 지구 가까이 접근하면서 세계종말의 공포가 많이 퍼졌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f/Apollo-soyuz.jpg/799px-Apollo-soyuz.jpg

 

처음 1권을 읽을 땐 각권마다 각각의 리뷰를 쓸 생각이었는데, 2권에 들어가니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더라. 눈을 뗄 수 없는 흡인력... 그래서 그냥 내달려 끝까지 읽고 이렇게 한 방에 쓰게 되었다. 1권(1부 대장간)은 혜성의 발견과 지구 충돌 전까지의 과정을 여러 캐릭터를 통해 전개하고 있는데 화려한 우주쇼를 예측하면서도 농담처럼 지구와의 충돌 가능성이 회자된다. 혜성의 발견자는 아마추어 천문학자이며 백만장자 팀 햄너와 십대소년 가빈 브라운. 거의 동시에 혜성 발견한 것으로 인정되어 국제천문학회로부터 '햄너-브라운'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다. <투나이트쇼>에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발음을 잘못하여 '해머-브라운'이라고 하면서 '신의 해머'란 별칭이 쓰이게 되는데, 책의 제목과 관련되는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튼 햄너-브라운이 지구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마치 악마가 거대한 해머로 여러 차례 후려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충격일 것입니다(1권 170쪽)." 물론 혜성은 진짜 해머가 되고 말았고...

 

해일이 일어나겠죠. 워싱턴은 물에 잠길 겁니다. 동부 해안 대부분은 산꼭대기까지 모두 잠길 겁니다. 하지만 확률은 낮습니다. 아주 낮아요. 예측대로라면 굉장한 빛의 쇼를 보는 것으로 끝날 겁니다. 그냥 그 정도요." (1권221쪽)

 

2권(2부 해머)은 정말 서스펜스가 압권이다. 스쳐 지나가리라 믿었던 혜성은 지구 곳곳을 강타하고... 그 충격과 혼돈의 아수라장은 전율과 함께 시간을 멈추게 하는 듯이 빨려들게 한다. 바다의 굉음이 모든 말소리를 집어삼키고, 더운 비의 장막이 먼저 덮친 후 이어서 고층건물보다 더 높은 거대한 파도의 벽이 다가온다. 우뚝 솟은 물의 장벽은 동쪽으로 진행하며 대서양 남부를 모두 쓸어버리고 남극 빙하를 깨트리고 북반구 전역에 메가 쓰나미의 위력을 떨친다. 도시는 바다로 변해버린다. 해머의 충돌로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성층권까지 기둥처럼 솟구쳐 오르면서 수백만 톤의 흙과 먼지를 빨아올렸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여섯 개의 나선형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또한 충격파로 땅은 흔들리고 솟구친 후 다시 흔들린다. 지각이 흔들리자 도처에서 지진과 화산폭발이 이어진다. 이런 위기를 틈타 중국은 소련에 핵공격을 하고, 미국과 소련이 손을 잡아 보복 핵공격을 한다. 불타는 지옥! 문명은 이렇게 사그라진다...

 

3부(2권) '산자와 죽은 자', 4부(3권) '운명의 날, 그 이후'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자 그나마 남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산자들의 처절한 다툼이 일어난다. 다가오는 빙하기도 문제지만 우선은 살아남아야 한다. 먹거리 확보가 관건이고 모든 도덕적 가치는 생존이라는 명제와 혼재된다.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빙하시대의 시작과 문명의 끝을 더듬다 보니 인간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이상에 대해 저절로 생각해 보게 되더라. 이 책을 단순한 B급 장르소설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다. 간간히 등장하는 남녀상열지사가 의외로 주된 뼈대가 되고 흥미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다음 독자를 위해 아껴둬야겠다. 여기서 더 시부렁대면 이런 장르에선 욕먹기 십상이지...  _ 더 알고픈 분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소개를 읽어볼 것. 엄청 잘 썼네..._ 

 

http://bearalley.blogspot.kr/2008/11/larry-niven-cover-gallery-part-1.html

 

이 책을 읽는 내내 지금까지 내가 본 블록버스터 재앙 영화가 떠오르더라. 초반 혜성의 등장과 중반 지구와의 충돌에는 영화 아마겟돈(Armageddon), 딥임팩트(Deep Impact), 애스터로이드(Asteroid)가 오버랩 되다가, 이어 2012와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에서 봤던 슈퍼 울트라 해일과 아수라장이 떠올랐고, 3권으로 접어들자 매드맥스(Mad Max)와 워터월드(Waterworld)가 생각나더만. _그러고 보니 이런 장르의 영화를 내가 참 즐겨봤구나. 하긴 SF영화는 거의 다 챙겨본 듯..._  이렇게 이 루시퍼의 해머 이후에 나온 많은 지구 멸망 영화가 이 책의 묘사와 상당히 닮아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종말의 혼돈이 서로 비슷하기에 그런 거지만, 역설적으로 이 책이 종말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방증이라 하겠다.  

 

번역도 무난하다. 하지만 번역자가 남성인지라 욕설의 번역이 직설적이란 것이 옥에 티(?). 예를 들어 아마도 Fuck나 Screw 류의 욕인 듯한데 이걸 "좆 까"로 번역하는 용기(?)가 아주 남성적이다. 하긴 사내들끼리 흔히 하는 욕이긴 하지^^. 그래도 그 장면에서 좀 더 순화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배 째~, 엿 먹어~도 있잖은가. 어쨌거나 읽어볼만한 킬 타임용 공상과학소설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별 점수로 나타내면 1권은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엮어나가므로 별★★★★, 점층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2권과 3권은 당연 별★★★★★. (물론 인문 기준이 아니라 SF장르 기준이다. 오해마시길)

 

남도는 폭염주의보가 이어질 모양이다. 어제는 강풍에도 불구하고 열대야 현상으로 잠을 약간 설치기도 했다. 이런 날엔 그저 머리 쓰지 않는 이런 책이 제격이다. 즐겁고 짜릿한 책읽기였다.

참고로 혜성과 지구 충돌이 실제 일어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괜찮은 동영상을 소개하면서 이만 끝을 맺어야겠다.

 

○ 딥임팩트, 지구는 멸망할 것인가 1부
http://youtu.be/VXFnC8yQ8AM
 
○ 딥임팩트, 지구는 멸망할 것인가 2부
http://youtu.be/csrcNE_P_M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도세자!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의 아들이며, 영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는 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의 아버지이다. 왕세자임에도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임오화변 壬午禍變),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閑中錄)을 남겼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히고설킨 속사정에 대해서 이 분야 학자들 간에 상당한 이견(異見)이 있는 듯하다. 역사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어질 수도 있겠으나 내막을 잘 모르는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진실이 무엇인지 중심잡기가 힘들어지는 사안이다.
사도세자에 대하여 나름 정립을 한 것은 오래 전 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나서였다. 뚜렷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영조가 두 가지 콤플렉스(어머니 숙빈 최 씨의 비천한 신분, 경종 독살설)를 딛고 왕이 되기까지 노론 세력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사실과, 이후 하나 뿐인 아들 사도세자가 노론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론을 가까이 하자 이를 우려한 노론의 공작으로 영조는 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줄거리였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은 이덕일 선생의 논지와 완전히 대척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이선생의 논지는 사도세자가 미쳤기 때문에 영조가 뒤주에 가둬 죽였다고 기록한 혜경궁의 논리적 틀을 비판 _한중록은 혜경궁이 노론 가문이었던 친정을 옹호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왜곡한 거짓기록_ 하면서 이 사건을 붕당정치의 희생물로 보고 있으나, 정교수는 이런 당쟁희생설을 철저히 반박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불쌍한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좀 더 공정하게 보자는 거다. 정교수는 광증설이건 당쟁희생설이건 영조가 세자를 죽인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로 '반역죄(역모)'를 들고 있다(211쪽). 세자는 이성을 잃으면 홧김에 '칼을 차고 가서 아무리나 하고 오고 싶다'는 _칼로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_ 등의 극언을 하곤 했던 모양이다. 영조는 아들이 미쳤다고 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세자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에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세자라는 막강한 권력의 속성상 그대로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뒤주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인데,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가도 폭넓게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한 저자의 분석에 나름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현재의 권력(영조)이 광폭무도한 미래 권력(사도세자)을 징계한 사건으로 파악했다는 건데, 특히 아래에 인용한 부분을 읽었을 때 영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권력의 개념이 어슴프레 보이더라. 또한 저자가 풀어내는 '권력과 인간'에 얽힌 속성도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  
책 후반부의 전개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입장에서 풀어나간다. 사극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금등지서의 비밀'이 흥미를 더하면서 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와 정조가 걸어간 길, 정조의 죽음과 한중록, 혜경궁 홍씨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한중록에 대한 정교수의 견해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중록은 일견 정조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조의 논리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은 분명 정조가 조성한 논리에 대한 반박이다(319쪽)"…….

 

 권력은 아름다운 보석이다. (중략) 권력은 수중에 넣기 전에는 자기 것이 아니지만, 일단 소유하면 주체와 대상의 동일화가 일어난다. 내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내가 되는 것이다. 권력이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한다. 원래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니 오로지 자기만이 가질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논리가 비약하기도 한다. 동일화가 더욱 잘 진행되면 나중에는 그것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까지 생긴다. 자신은 그것을 지킬 책임이 있고 그 일이 자기의 의무라는 생각에 이른다. (중략) 책임으로 핑계를 대지만 따지고 보면 이 역시 권력욕이다. 권력과의 동일화는 임금도 다르지 않다. (325~326쪽)


이 책은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에 매주 한 꼭지씩 연재한 48회의 초고를 바탕으로 엮었다는데, 읽을수록 '우리시대의 명강의'에 부족함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 내용도 읽을거리였지만 무엇보다도 부록으로 소개되어진 <선행 저술 비판>이 백미였다. <사도세자 당쟁희생설 비판>, <길 잃은 역사대중화 ―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 <이덕일의 반박에 대한 비판> 중 두 번째 '길 잃은 역사대중화'는 <역사비평 2011년 봄호>에 실려 논란이 되었던 글로써 참으로 읽어둘만한 논지였다. 평소 이덕일 선생 등 비주류 사학자들의 소설 같은 역사서를 많이 읽는 나로서는 균형적 역사인식이 무엇인지 가늠해 보는 아주 좋은 책읽기였다.
나는 여기서 두 전문가의 어느 한쪽에 마음을 주기 어렵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도 일컫는 영·정조 시대의 밝음 이면에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어둠이 존재하고, 이를 바라보는 사학자 간의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했을 뿐이다. 간단하게 느낌을 정리한다면 이선생은 행간을, 정교수는 실증적 논거를 중시하여 담론을 이끌어간다고 느꼈다. 이선생의 관점도 신선했고, 정교수의 학자적 반론도 정말 탄탄해 보였다. 역사 전문가도 아닌 내가 누구 편을 들 처지도 아닌지라 영조의 편집증이 _자신의 태생적 불안에 의한 일종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한다_  낳은 사도세자의 광증과 그 비극적 결말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사건의 배경과 경과, 나아가 그에 대한 담론의 변화까지 알아야만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고 해석오류를 줄일 수 있다는 거다. 이즈음에서 E. H. 카의 역사관을 다시 생각해 본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보다 객관적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첨언 :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한 기술은 한중록, 승정원일기, 영조실록 등에서 나타나는데, 세자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와 천둥 공포증 증상을 보이다가 걸핏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계증(驚悸症)으로 이어지는 등 마치 '종이에 물이 젖듯' 병증이 깊어졌다고 한다.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衣帶症)'이 심해지면서 가학증으로 연결되는 대목은 사뭇 안쓰럽기만 하다. 옷을 입으려고 애쓰다가 여의치 않으면 충동적으로 시중드는 사람을 죽이곤 했다는데, 잔혹하기도 하려니와 그 수효가 여럿인지라 이미 군주로서의 품격과 자질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다는 후궁 ‘빙애’ 마저 죽였고 아내 혜경궁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분열증까지 간 모양이니 더 말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경영/자기계발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남도는 흐리다.

장마권의 찌푸뚱한 하늘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커피가 땡기는데, 동료는 자꾸만 작설차를 따라준다. 은근~ 입안이 깔끔한게 이거 다시 녹차에 길들여지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7,8월엔 달달한 로설 계열도 읽어볼 거 같다. 더위에 머리쓰기 싫은 탓이리라...

 

1. 중국 천재가 된 홍 대리  

홍대리 시리즈 치고 안괜찮은거 없더라... 중국에 대해서는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으이...

 

2. 당신이 경제학자라면 - 고장 난 세상에 필요한 15가지 질문

<경제학 콘서트>의 팀 하포드 책. 이 타이틀 만으로도 읽어줄만한 책이란 느낌이...
 

3. 브릴리언트 - The Brilliant Thinking

브릴리언트... 창조적인 감각은 성장의 씨앗! 이 시리즈 괜찮더라.

 

4.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 마음을 움직이는 경제학

요즘 이 책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주 보이더라. <괴짜경제학>의 저자들인 모양인데...

 

5. 친절한 자기소개서 작성법 

이런 책이 정말 도움이 될까? 천편일률적인 자소서는 바로 휴지통인디... 신입사원 지망자들이 뭘 참고하는지 알고싶어지네...  평가단 중 꼭 내 혼자만 선택할거 같애... 궁금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지기 2014-07-0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7월 추천 도서(5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파트장 드림

표맥(漂麥) 2014-07-08 08:46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큰바람이 올라온다네요... 후덥한 세상. 항상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