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홍수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나에게도 이성(異性)으로 인하여 가슴 절절한 시기가 있었던가? 그렇구나, 있구나... 가슴 한쪽 귀퉁이에 꼭꼭 숨겨둔 실연의 아린 추억들... 세월의 더깨에 이젠 희미해졌어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앙금으로 남아있구나. 그 시절의 치기를 생각하면 그저 먹먹하여 로맨스소설(이하 로설)을 조금 회피하는 편이다. 100권의 책을 읽는다면 한 두어 권 읽을까. 어쩌다 가끔 기욤 뮈소의 로설이나 인연 있는 몇몇 작품을 읽었으나, 구태여 로설을 찾아서 읽진 않았었다. 아직도 내게 사랑은 아픔이 더 많은 느낌의 단어이기에…….

 

여기서 잠깐!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왜 로설을 더 좋아할까? 이런 의문은 진화심리학으로 보통 설명되더라.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일! 그러다보니 연애와 결혼에 대한 심리가 대중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살아 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받는 로버트 트리버스(R. Trlvers)의 부모 투자 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에 의하면 자식에게 많이 투자(임신과 출산, 육아와 양육)하는 여성은 짝짓기 상대를 신중히 고르는 반면, 자식에게 적게 투자하는 남성은 많은 짝짓기 기회를 얻기 위해 경쟁하도록 진화했다네. 그러니 남성들에게 있어 번식을 높일 수 있는, 즉 젊은 여성과 정신적 헌신 없이 무차별 관계할 수 있는 포르노그래피가 남성 판타지의 세상이라면,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안전한 번식을 보장하는, 강하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져 바람을 피울 염려가 많은 남성이 여주인공을 만나 그야말로 평생 자신에게만 헌신·맹세하는 운명적 만남의 로맨스 소설이 여성들의 로망이 되는 거다. 그래서 로설에는 새드엔딩보다 해피엔딩이 대세란다. 독자들은 여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감정이입)하여 대리만족의 몽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 결국 로설=진화심리학의 산물? ^^

 

<눈꽃>! 아주 이쁜 사촌 여동생의 이름이 설화이기에 은근히 끌린 로설이다. 이 소설을 읽어보니 감성 충만의 매력적 주인공 캐릭터가 확실히 여성 독자를 홀릴 만하다(남성 독자들에겐 글쎄...). 남주인공의 캐릭터를 잠시 보자. 제이어드 에이드리언.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금융그룹인 에이드리언뱅크의 은행장이며 실질적 주인인 에드워드 에이드리언의 유일한 직계 손자이다(당연히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수퍼울트라캡숑, 능력과 야심은 메가톤짱). 생긴 거는 또 어떻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지. 편안한 옷차림으로도 절대 가려지지 않는 저 부유하고 우아한 분위기, 차가우면서도 오만하고 지적인, 무심한 은회색 눈동자의 키 큰 사내. 서영이 데이빗과 결혼을 앞두자 술 냄새 가득 풍기며 나타나 강렬한 눈빛으로 "나는......, 너 못 보내."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라고 말하는 나쁜 남자. 그리고 사흘 후, 결혼을 일주일 앞둔 서영은 밤을 함께 보낸다... 한마디로 유전적으로도 우수하면서 헌신적인, 갖출 것 다 갖춘 캡짱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런 우월성보다 더한 페이소스가 있으니, 그것은 서영과의 우연과 만남이 반복되는 이면에 흐르는 제이어드의 심적 흐름이다. 우연은 운명을 낳는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여자인 것 다 아니까,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여자이니까" 그렇게 놔주고 싶었건만 서영을 처음 본 그날(아래 참조)부터 심장에 박힌 가시 하나. 속절없이 타는 가슴을 삭일 방법이 없어 그저 맴돌기만 한다.

 

지루한 기분으로 보스턴 거리를 운전할 때 보이던 낡은 포드 자동차 하나. 그리고 그 뒤에 앉아 열린 창문에 기댄 채 거리를 바라보며 화하게 웃던, 맑고 까만 눈동자의 열 살 정도 된 동양인 소녀. 바람에 흩날리던 단발머리.

순간적으로 지나간 그 빛을 그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무작정 따라가 버렸고, 그날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제어하지 못하는 욕심 하나가 하루하루 자라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멀리서 지켜보고 맴돌아야 했다. 149쪽

 

어쨌거나 열 살 조금 넘은 소녀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맑은 눈동자에 끌려 제이어드는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따뜻한 웃음, 깨끗함, 떨림…….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해진 느낌을 받는다. 사랑의 이렇게 찰나의 끌림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서영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본다. 어느덧 소녀는 예쁜 고등학생이 되었고, 함박눈이 내렸던 그날 저녁, 그때까지 아무 말도 못했던 그의 입술에 수줍은 소녀의 입술이 닿았다. 무거운 책임감과 어두운 기억만이 있었던 제이어드의 인생에 그렇게 따뜻함이 되어 찾아왔던 소녀의 입맞춤. 그런데 그 소녀가 여자가 되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그의 곁에, 함께 있었다.

 

"얼마면 돼?" 가을동화에서 원빈이 송혜교에게 했다는 대사인가? _사랑, 웃기지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_ 제이어드는 "이건 그냥 가벼운 감정이라고. 갖고 싶었던 것을 갖지 못해 쌓였던 성욕일 뿐이고, 그 갈증이 해결되면 너 따위는 모두 잊힐 거라고. 그리고 너도, 그럴 거라고. 이렇게 느껴지는 떨림도 모두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서영이 재벌의 정부나 하면서 인생을 대강 살아 나갈 수 없는 여자라는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너랑 자고 싶어."……. 소리는 서영의 가슴 속에 그대로 창이 되어 박혀 버렸다... "하룻밤에 백만 달러." 제이어드의 담담한 제안에 서영은 "언니랑……, 잤어요?" "내 언니랑 잔 남자는 내게 형부 아니면 남이에요. 그 외엔……, 안 돼요." 떨리는 목소리로 서영은 거부하고, 한참 뒤 제이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 버린다. 사랑의 근원은 욕망이련가. 차도남의 나쁜남자 캐릭터가 물씬하다. 그러면서도 서영을 짝사랑하고 배려하는 제이어드의 마음이 시리기만 하다. 아참, 러브스토리의 통속적인 플롯, 삼각관계. 여기서는 제이어드를 사랑하는 민영과 서영 자매, 서영을 사랑하는 데이빗과 제이어드의 사각관계이나, 제이어드와 서영에 8할의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언니 민영이 제이어드를 좋아한 건 서영의 순수를 포장하기 위한 그냥 곁가지일 뿐...)

 

눈꽃! snowflower. 눈꽃은 서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커피숍의 상호이기도 하지만, 소설 전반을 가로지르는 사랑의 은유이자 독자의 감성을 어루만지는 메타포가 된다. 눈은 소설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도구이며, 서영과 제이어드의 마음을 연결하고 표현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 춥고 시린 크리스마스 새벽, 하얗고 푸른, 아름다운 눈꽃 속에서 서영을 기다리던 제이어드. 서영이 고교시절, 눈이 엄청나게 내려 전기도 전화도 불통이던 날,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걸어갈 때 마술처럼, 기적처럼 "타. 집에 데려다 줄 테니."라고 말한 까맣고 커다란 차 안의 키 큰 남자. 그 겨울, 그날부터 눈이 그렇게 많이 오던 날 세 번의 데이트. 그 세 번째 날, 짧고 아쉬웠지만, 그 뒤로 그들에게 다가왔던 어렵고 서러운 시간들을 모두 지배해 버렸던 그 수줍은……, 입맞춤. 그 때 서영은 차장 밖의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던 작은 눈송이들이 마치 눈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그 때 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남자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눈이 더 이상 안 왔기 때문이라나...^^  

 

남녀상열지사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상사에 불과하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짝사랑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향하기까지 겪어야하는 시련의 파고가 애처롭다. 에이드리언가에 천한 피가 섞이길 원하지 않는 제이어드의 어머니 사라 회장의 위협적인 견제구를 서영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래서 이 소설은 해피한 엔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새드 엔딩? 이 글을 적으면서 중·후반부 주요 스토리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새로운 독자의 몫이기에 언급을 유보하는 게 맞을 듯하다. 눈이 시린 듯한 사랑이 무엇인지, 눈꽃 같은 애틋함과 설렘을 느껴보려면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옛날 하이틴로맨스나 할리퀸문고와 그 궤적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품격과 감동은 몇 수 위의 로설이다.

 

이 책은 2008년 출간 이후 이번에 약간의 손을 본 후 재출간한 책이라 한다. 앞선 책을 읽지 않아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캐릭터 중심의 플롯 짜임이 괜찮았고 매끄럽게 읽혔다. 다만 캐릭터를 사건에 빠트리는 후반부의 위기와 클라이맥스에도 불구하고 그 역동성은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워낙 신데렐라 막장 드라마가 판치다보니 나의 감성이 웬만한 스토리에는 무감각해져 버린 탓이리라.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겐 사랑을 잃고 고글도 쓰지 않은 채 설원을 활강하는 제이어드의 잿빛 슬픔이 가장 인상적이었구나. 난 그 마음 안다. _실연을 하도 많이 당하다 보니...^^_ 그래서인지 제이어드의 감정 흐름을 좀 더 깊이 있게 풀어내었다면, 예를 들어 슈베르트의 마왕처럼 활강과 내면의 소리를 주고 받는 장면이었다면 더 좋았을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이래저래 운명적 만남을 좋아하는 로설 마니아는 읽어볼만한 책인 듯하다. 도종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르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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