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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사랑
린다 하워드 지음, 김선영 옮김 / 신영미디어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로맨스 소설에서는 결코 사랑의 순결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only one 또는 just one!을 외치지요. 사랑의 순결성, 사랑의 운명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작가는 과거의 사랑을 과감히 '착각'으로 돌려세우는 놀라운 행동들을 합니다. 다른 장르 소설들의 유연한 태도에 비하면 몹시 경직되어 있고 유아적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일례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박완서의 《그리움에 관하여》라는 소설에서는 새로이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는 노년의 남녀 두 사람에게 각각 과거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과거에 깊이 사랑하였기에 현재에 또다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로맨스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내사랑(주인공)"을 만나는 순간 과거에 했던 것들을 "착각이었어!"라고 밀어붙여버리는 과감성을 보여줍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식이지요. 과거에 서로를 보고 불꽃이 파바박 튀지만, "아닐거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른 사람과 살아간다. 그러나 그 과거의 불꽃을 잊지는 않고 있다가 현재에 다시 만나게 되면 불꽃에 화약과 장작을 던져넣는 것이 되는 셈이랄까요.
로맨스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랑의 순결성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심장이 하나이듯, 사랑도 하나, only, 또는 just one이 로맨스라는 장르내에서의 사랑의 유일한 본질이 됩니다.
물론, 과거의 연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야 하겠습니다만. 과거의 연인이 아주 싸가지 없고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에 대한 애정을 싸그리 없애 버리게 되고, 과거의 연인이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다면, "친근하고 편한 것이 나는 사랑인줄 알았어~ 그런데 이남자(또는 이여자)를 만나보니 아니야~"가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맨스 소설에서 굳이 사랑의 순결성을 주장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확실히 그로 인하여 '착각'이 되어 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열받지요. 그야말로 니가 하면 로맨스, 내가 하면 불륜이냐? 라고 덤비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
요 근래, 제가 읽은 린다 하워드의 소설 세편은 이러한 just one에 관한 강박증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입니다.
[마지막 약속]에서 그레이는, 페이스가 아직도 많이 어릴 때에 불빛에 비친 페이스의 몸매에 불끈(^^ 어디가?)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꽃의 파바박, 이지요. 그 이후로 어떤 여자도 페이스와 비슷한 자극을 그레이에게 준 남자는 없습니다.
[사라의 사랑]에서 롬 매튜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아내 다이앤과의 결혼식장에서 사라를 보고 또 불끈(^^) 합니다. 그 이후에도 수영장에서 우연찮게 보고 또 불끈(^^) 합니다. 그는 내내 사라에 대해 신경이 거슬려 하지요.
[내사랑 에반젤린]에서 에반젤린 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미망인이지만, 죽은 남편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기에 가지는 호감'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나이가 먹은 뒤, 스스로의 심리에 대한 해석을 내리지요.
이런식으로, 로맨스의 작가는 "두번의 사랑"을 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변명 꺼리를 만들어 둡니다. 그러니까, just one이 되어야 하는 사랑의 순결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는 변명을 하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사랑의 순결성은 자녀에 대한 사랑에 가서는 또 달라집니다. 물론 이성간의 사랑과 자녀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사라에 관해서는 "다이앤이 당신을 준비해 준 거라고 생각해"라고 유연하게 받아들였던 롬은 아이에 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힘들게 덮어놓은-아물려놓은, 이 아니라- 상처를 덧들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은 과거를 부정하고 잊는 것으로 순결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자녀에 대한 사랑은 현재(또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순결성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것은, 로맨스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랑의 순결이, 오직 남녀간의 사랑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자녀, 양자녀, 의붓자녀, 동생, 조카 등등으로 확대되어 거의 위아더 월드, 수준이 되는 것이 또한 로맨스의 특징이니까요.
이랬건 저랬건, 다시 사라의 사랑으로 돌아가 보지요.
다이앤과 사라는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입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다이앤은 직업여성이 되는 것이 꿈이고, 사라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남편을 훌륭히 내조하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롬의 출현으로 두사람의 꿈은 정반대로 실현되고 맙니다. 롬이라는 영향력 넘치는 이 남자는, 다이앤을 자신의 가정으로 들어앉혔고, 사라를 다른 누구도 사랑 할 수 없는 여자로, 결국 직업여성이 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 상태로 5-6년이 흘러, 세사람의 관계는 조심스런 외면으로 평형상태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만, 다이앤과 두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립니다.
가족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가족과도 같았던 친구,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들, 내가 사랑하는 친구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사랑 할 수 있었던 아이들을 잃은 여자가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집니다.
여기서부터 작가는, 약간,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사실 사랑의 순결성과, 과거의 가정이 완벽했음을 병행시키기란 과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나는 "그때는 다이앤이었고, 지금은 사라야."라고 한다면 롬의 심리 상태는 좀 더 쉽게 와 닿았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는 끊임없이 "다이앤이었을 때도 사라였다."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것을 주입받은 독자는 아이를 거부하는 롬의 마음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느끼게 되지요.
결국,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치이는 꼴이라고 할까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아이의 임신-출산 과정을 통해 소설 전체가 흔들거리고 있는 것은 작가의 이러한 이율배반성 때문입니다.
모든 로맨스 작가들이, 조금만 과거의 사랑에대해 관대하고 유연해 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던 소설입니다.
ps. 그러나 또, 웃기게도, 로맨스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그 just one, only one 때문이니까요. 결국은 포기할 수 없는 이율배반성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