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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어령샌님의 그 예리한 명문을 좋아한다. 박학다식함과 다양한 관심사에서 흘러나오는 그 눈부신 레토릭에는 60년대의 그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찬사를 아니바칠 수는 없다. 뛰어난 작가라는 데는 동의하지 못하나 뛰어난 문학 평론가, 문화 평론가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령샌님은 확실히, 복잡한 현상들을 단순화 시키고, 그것들에서 공통점을 뽑아내어 화려한 비유를 구사해내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야기들만을 가지고서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 천재라 칭하기 아깝지 않다. 그야말로 천재니까. 한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도 천재이듯, 얕지만 그토록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천재는 천재다. 곡학아세도 천재적으로 해 낸달까. 그래서 밉지가 않다.
한국 문화론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이 책은, 두고두고 이어령 선생님을 찬양하는 소재로 쓰이면서 또한 공격하는 소재로 쓰였다. 지프차(서양문물)에 타고 바라본 동양, 이라는 소재의 한국문화를 비하하는 내용의 이 책은 한 시대(60년대)를 풍미한 베스트 셀러였고, 전쟁 직후의 참담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학과 엽전의식에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게으름의 상징같은 장죽과, 허위의식의 상징인 갓, 무식함의 상징같은 한복 바지, 관광을 하러가서는 도시락만 까먹고 오는 무지. 그것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8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어령이라는 한 사람을 공격하는 재료가 되었다. 당신은, 그렇게도 한국 문화를 비하했던 사람이 아닌가, 당신이 과연 한국의 석학이라 칭해져도 좋은 일인가.
가끔. 선생님의 옆에서 선생님을 뵈올때면, 그 순진함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사람을 기함시킬만큼 순진하기만 한 면이 있는 우리 선생님은 순진한 만큼 솔직하고, 솔직한 만큼 꾸밈이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분의 그러한 솔직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20대의 중반을 지나면서, 전쟁직후의 한국, 그 참담함 속에 써 내려갔던 이 책을 70세 기념 전집의 첫번째 책으로 내 놓으면서도 어령 샌님은 자신의 잘못과 판단 미스를 숨기거나 꾸미려고 하지 않았다. 게으름의 상징이었던 장죽을 노인 우대와 과학적인 산물로 다시 묘사하고, 허위의식의 상징이었던 갓을 아름다운 것, 우리 민족이 멋있는 민족이었음의 증거로서 내 놓고, 무식함의 상징같았던 한복 바지의 그 넓은 허리를 넉넉한 포용력으로, 관광을 하러 가서는 도시락만 먹고오는 무지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외부의 세계조차 나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훌륭한 예술 정신인 것으로 묘사해 내면서, 어령 샌님은 솔직하고 순수하게 말한다.
그 책을 쓰던 40년 전의 나는 어렸고, 당시의 한국은 지독한 가난과 배고품으로 움츠러 들고 있던 땅이었느라고. 나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따끔한 일침을 가하여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랬노라고. 그래서,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노라고, 그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그 솔직함이, 그 순수함이 의외로 가슴을 울렸다. 자신이 했던 말을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간에 그대로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할 줄도 알고, 그것을 바꿀 줄도 아는 그 당당함이 멋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무언가에 대한 판단은 얼마든지 바뀐다. 그 바뀌어가는 모습조차도 긍정하는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
난 어령 샌님이 참 좋다. ^______________^
ps. 이 책의 문장들은 사실, 어령샌님 특유의 눈부신 레토릭이 별로 없다. ^^;;; 레토릭을 기대한다면 『말로 찾는 열두 달』을 읽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