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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소년은 항구에서 태어났다. 말만 앞 세우는, 말 외에 행동이라고는 무차별 폭력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항구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하기 싫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 어른 중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년이었다. 그저 그것이 전부였다. 섹스보다는 키스가 해 보고 싶었던 열일곱살의 소년이 열 여덟살이 되고, 그 도시에 다시 봄이 왔을 때, 이해못할 폭력도 함께 왔다.
"육하원칙으로 해 보자."
우리는 그렇게 했다. 먼저 '누가?' 부터 시작했다. 답은 바로 나왔다.
"정글복 입은 군인들이."
정글복 입은 군인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패거리 중에는 이미 그 부대에 자원해서 복무를 하고 있다는 이도 있었고 지원 신청을 해두고 시험을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그다음은 '언제?'였다. 이것의 답도 간단했다.
"지금."
"어디서?"
"여기서."
"무엇을?"
"사람들을."
"어떻게?"
"때린다."
모두 쉬웠다. 단 하나를 빼고. 남은 것은,
'왜?'였다.
거기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다. 영식이 말했다.
"데모 진압하러 왔을 거야."
"그렇다면 더 이상하잖아. 왜 군인이 온 거지? 경찰 많은데."
"그러게 말이야. 그게 경찰들 밥 먹고 하는 일이잖아."
..........
"뭔가가 잘못되어서 여기가 이렇게 돼버린 거 아닐까?"
육하원칙으로 해보자던 이가 자기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치 대답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대답이 불가능했다.
p.177-179
한창훈은 서사에 강한 작가다. 그는 그 도시의 시민들이 맨주먹의 시위를 하다 보도블럭을 깨 돌을 들고, 끝내 총을 들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서술해간다.
교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한 아이를 때리면 첫날은 그냥 얻어맞는다. ... 하지만 둘째 날 교사의 매질이 되풀이 되고, 여전히 맞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불만이 쌓인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억울함은 아픈 것만큼이나 참기 힘든 것이다. 셋째 날은 매 맞기를 거부하며 이유를 말해달라고 항변한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억울함은 모범생을 하루아침에 문제아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p.189
평범하고 소박했던 한 도시의 소시민들은 그렇게 변해갔다. 억울하니까. '왜?'라는 질문에 도저히 대답할 길이 없는 폭력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군대를 가 본 적도 없는 어린 소년이 돌을 던지고 총을 잡게 만들었다. 한강의 소설에서 나온 바, 한번 쏘아보지도 못할 그 총을.
소년은 동호가 지키고 있었을 시체 영안실을 찾아간다. 소년의 친구, 진숙의 연인 영기는 그 곳에 누워 있었다. 목과 쇄골이 만나는 지점에 총을 맞고. 동호의 친구 정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 희생되어.
소년은 자신이 어찌 해야 하는지를 학교와 교사에게 묻는다. 집에 가만히 있는데도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군인에게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를. 그러나 학교로 대표되는 사회와 정부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학교, 소년은 졸업도 하기 전에 사회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무정부 사회는 사람들의 반란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부가 그들의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생겨났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가 무슨 국가의 자격이 있을까.
소년은 시위 현장에서 만난 생물교사에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학생은 묻고 교사는 답을 하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 생물교사역시 자신의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학생에게 들려줄 뿐이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에스키모들이 썰매에 개를 묶을 때,"
생물교사는 잠깐 동안 말을 끊고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이었다.
"젊고 튼튼한 개들 사이에 늙고 병든 개 한 마리를 끼워넣는다고 한다."
"......."
"그리고 채찍질을 하는데 그 늙고 병든 개만 집중적으로 때린다는 거다."
.....
"그 개는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게 되지. 그 개의 처절한 비명이 다른 개들에게 공포심을 준다는 거야. 그래서 찍소리 못 하고 썰매를 끌게 되는 거야."
......
"그 사령관은 그게 필요한 거야. 공포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혼란이."
나는 공포와 혼란, 이라는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그가 그것을 원했다면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의문점이 남았다. 왜?
p.203-204
이 소설의 리뷰를 쓰는 것은 힘들다. 나 역시 소년과 똑같이 끊임없는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을 듣고도 또다시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그래도 왜? 라는 질문을 해야하니까. 그런데 왜? 그러나 왜? 왜? 왜? 도대체 왜???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206
그 도시의 소년들이 묻는다. 죽어버린 정배가, 영기가, 그 죽은 시체를 지키고 있던 동호가, 이유없이 연행되어 죽을만큼의 폭행을 당하고 도망친 인호가, 친구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소년이. 그러니 이제는 어른들이 대답할 차례다. 답은 교사의 몫이라기보다는 어른의 몫이니까. 그러하기에 노인들은 대답하기가 궁해서 죽어버리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궁한 대답이라도 대답하라. 그 대답에 또 다시 왜? 라는 질문이 이어지더라도 그 왜? 라는 질문이 끝날 때까지.
당신들은 응당 그러해야 한다. 죽지 말고 대답하라. 왜? 라는 질문이 끝나기 전에는 당신들은 죽을 자격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