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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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 책의 서두에 있어도 가장 나중에 읽고, 에세이를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 말미에 있어도 가장 먼저 읽는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작가의 말이 나의 마음에 확 와 닿았다. 그래서 이 책의 리뷰는 이 책의 말미에 실린 김영하의 작가의 말의 일부를 따오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2012년 가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보다 많은 것이 낯설었다. 사 년 남짓 해외를 떠도는 사이에 한국 사회는 또 많이 변해 있었다. 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는 없다. 그 전이 어땠는지부터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워낙 빨리 변화하는 나라여서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p. 207, 작가의 말


2014년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일단은 나의 포지션이 변해 있었다. 미취학 영유아 둘을 데리고 떠났던 나라에,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일곱살 아이 둘을 데리고 돌아왔으니까. 나의 스위치를 애엄마 모드에서 학부모 모드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남의 이야기같던 사교육 시장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어지러웠다. 이곳이 내가 떠났던 그 나라 맞나 싶었다. 낯 설어도 이렇게 낯 설 수가 없었다. 


김영하는 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는 없다 라고 말했지만 나는 적어도 한가지는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다. 떠나기 전만해도 외제차 옆은 주차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는데 불가능할 정도로 외제차가 넘쳐났다. 세대에 한대꼴로 외제차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우디와 벤츠 사이에도 주저없이 차를 넣는다. 피할 수가 없으니. 김영하라면 이 현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할까. 뭔가 시크한 어조로 한국 경제의 현황에 버무려 멋들어진 설명을 내놓지 않았을까. 사 년 남짓 해외를 떠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무엇이 가장 낯설었을지 궁금하다.


나는 김영하의 시크한 어조를 좋아하는데 김영하의 chic는 세련되고 멋있다기보다는 냉소적이다. 세상에서 한발쯤 발을 빼고 영화 관찰하듯 보는 느낌이랄까. 언제나 김영하는 그랬다. 그 사건의 현장에 뛰어든 당사자나 경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를 견지한다. 그런 어조는 소설을 쓰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전달은 명쾌하고 산뜻했다. 그는 구질구질하게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작가의 말에 그대로 설명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가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 208-209, 작가의 말


그러니까, 김영하의 보는 방식은 곧 본 것에 대해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다. 그 현상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가 된다. 관찰을 하고, 그 관찰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놀라운 화학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현상이 김영하라는 촉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탄생 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이건 그야말로 연금술이다. 글을 읽는 내내 야~ 진짜 똑똑하거든 이 작가는. 어쩜 이런 생각을 다 해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한때 김국진이 우리나라 최고의 개그맨이었을 때,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국진을 혼자 방에 가두어 놓고 뭐하고 있나 몰래 관찰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이 생각을 현실로 옮기면 미저리 버금가는 호러물이지만, 상상만을 하면 최고의 개그물이 된다. 때때로 나는 김영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 똘똘한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나? 뭐 이런 느낌. 


이 책을 출간 된 직후에 읽었다. 그러니까, 2014년 9월에.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간다>를 읽고 나서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챕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 115-116,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은, 광주의 이야기가 왜 역사나 다큐가 아닌 영화나 소설로 기록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진실을,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하는 최고로 효과적인 매체이니까. 내가 김영하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이런 똑똑한 통찰력 때문이다. 이 낯선 세상에 아직까지는 반드시 필요한 촉매라서. 이 낯선 세상을 이해하고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니까.


ps.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에 이어 '읽다' 와 '말하다' 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약 석달 간격으로 출간할 예정이라는데 석달 지났다! 작가와 출판사는 약속을 지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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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마미식 수납법 - 매일매일 조금씩 내게 필요한 것만 남기는 인간적인 집정리
까사마미 지음 / 동아일보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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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엄마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걸레는 언제나 수건과 동일 수준의 청결도를 유지했고, 방바닥은 늘 보송했다. 하도 여러번 삶아 희끗한 색으로 변질된 엄마의 수건에서는 늘 햇살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3M 수세미는 엄마의 최고 애용품이었고 덕분에 투명한 유리컵은 얼마되지않아 자잘한 기스덕에 희뿌옇게 되었지만 깨끗함만은 보장할 수 있었다. '쓰뎅' 냄비부터 크리스털 컵까지 엄마의 초록색 수세미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엄마는 정리 정돈엔 젬병인 사람이었다. 좁은 집에 많은 아이들, 그만큼 많은 살림이었지만 수납공간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은 집에서 엄마는 늘 짐을 들었다 놨다 먼지만을 닦았다. 깨끗했지만 어질러진 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의 집을 떠난 게 20년 전이다. 하숙을 하다 자취를 하고, 다시 신접살림을 꾸리고, 친구와 둘이 쓰던 하숙방에서 원룸으로, 다시 복도식 구형아파트에서 먼 외국 낯선 구조의 집에서 다시 새아파트로. 그 사이 둘이었던 가족은 셋에서 넷이 되고 짐은 점점 늘어났다. 오천권이 넘어가면서 헤아리기를 포기한 책들과, 어느새 세대로 늘어나 버린 재봉틀과 엄청나게 사들인 그릇들의 틈바구니에서 더는 엄마식 살림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정리 정돈은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크다. 요즘같이 시어른을 모시고 살지 않는 것이 보편화 된 환경에서 엄마의 살림법은 딸에게로 전수되었다. 새로 살림을 시작하는 딸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엄마의 방법 외의 방법을 모르므로 엄마의 방법대로 집안을 정돈한다. 나의 경우에 그건 최악의 방법이었다. 살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으면 당장 등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한다.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나는 알라딘을 찾는다. 알라딘 검색창에 살림법, 수납법 등등의 검색어를 입력했고 열권이 넘는 책을 주문했다. 음, 나는 스케일이 크다.(스파르타의 페르시안 왕 '나는 관대하다' 어조로 읽어야 한다.)


감히 말하건대, 종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할 책이 태반이었다. 집안을 정리하고자 쓰레기를 생산하는 형국이니까. 살림 관련 책들을 집필하고 출간하는 집필자들과 출판사들에게 이르노니, 볼만하고 쓸만한 수납도구를 만드는 능력이 그리 흔한 능력이 아니라네. 책에서 나오는 수준의 수납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수납관련 책을 사지도 않을걸세. 이미 필요 없을테니.


그 와중에 걸려든 책이 이 책이다. 


까사마미는 네이버의 유명 수납, 살림, 인테리어 블로거....라고 한다. 난 블로그를 잘 방문하지 않으므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모르겠고,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단, 살림 레벨 중급 이상자들에게만.


초기의 나처럼 완전 쌩초짜로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난해하다. 집이 좁은 사람들에게도 맞지 않다. 수납의 기본중에 기본은 공간의 확보다.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별 반개 뺐다. 


자, 이제 나 살림 좀 잘 하고 싶어서 살림하려고 애 좀 써 봤어, 우리집 그럭저럭 빈공간은 있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펼쳐보자. 구석구석 요긴하고 쓸만한 아이템들이 꽤 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물건을 사용하기 편하게 수납하는 법이 많다.


역시나, 옷 접는 방법은 대체 옷을 이렇게 공들여 접어서 뭘 어쩌겠다고, 싶긴 하지만. 그래서 별 반개 또 뺐다. 


157개의 아이디어로 나누어서 정리된 책의 구성도 찾아 보기 좋아서 도움이 된다. 


이제, 엄마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주택과 나의 아파트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엄마는 여전히 깨끗하지만 어질러진 집을 가지고 있고, 나는 깨끗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정돈 된 집을 가지고 있다. 


까사마미,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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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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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항구에서 태어났다. 말만 앞 세우는, 말 외에 행동이라고는 무차별 폭력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항구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하기 싫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 어른 중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년이었다. 그저 그것이 전부였다. 섹스보다는 키스가 해 보고 싶었던 열일곱살의 소년이 열 여덟살이 되고, 그 도시에 다시 봄이 왔을 때, 이해못할 폭력도 함께 왔다. 


"육하원칙으로 해 보자."

우리는 그렇게 했다. 먼저 '누가?' 부터 시작했다. 답은 바로 나왔다.

"정글복 입은 군인들이."

정글복 입은 군인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패거리 중에는 이미 그 부대에 자원해서 복무를 하고 있다는 이도 있었고 지원 신청을 해두고 시험을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그다음은 '언제?'였다. 이것의 답도 간단했다.

"지금."

"어디서?"

"여기서."

"무엇을?"

"사람들을."

"어떻게?"

"때린다."

모두 쉬웠다. 단 하나를 빼고. 남은 것은,

'왜?'였다.

거기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다. 영식이 말했다.

"데모 진압하러 왔을 거야."

"그렇다면 더 이상하잖아. 왜 군인이 온 거지? 경찰 많은데."

"그러게 말이야. 그게 경찰들 밥 먹고 하는 일이잖아."


..........


"뭔가가 잘못되어서 여기가 이렇게 돼버린 거 아닐까?"

육하원칙으로 해보자던 이가 자기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치 대답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대답이 불가능했다.


p.177-179


한창훈은 서사에 강한 작가다. 그는 그 도시의 시민들이 맨주먹의 시위를 하다 보도블럭을 깨 돌을 들고, 끝내 총을 들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서술해간다. 


교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한 아이를 때리면 첫날은 그냥 얻어맞는다. ... 하지만 둘째 날 교사의 매질이 되풀이 되고, 여전히 맞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불만이 쌓인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억울함은 아픈 것만큼이나 참기 힘든 것이다. 셋째 날은 매 맞기를 거부하며 이유를 말해달라고 항변한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억울함은 모범생을 하루아침에 문제아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p.189


평범하고 소박했던 한 도시의 소시민들은 그렇게 변해갔다. 억울하니까. '왜?'라는 질문에 도저히 대답할 길이 없는 폭력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군대를 가 본 적도 없는 어린 소년이 돌을 던지고 총을 잡게 만들었다. 한강의 소설에서 나온 바, 한번 쏘아보지도 못할 그 총을. 


소년은 동호가 지키고 있었을 시체 영안실을 찾아간다. 소년의 친구, 진숙의 연인 영기는 그 곳에 누워 있었다. 목과 쇄골이 만나는 지점에 총을 맞고. 동호의 친구 정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 희생되어.


소년은 자신이 어찌 해야 하는지를 학교와 교사에게 묻는다. 집에 가만히 있는데도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군인에게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를. 그러나 학교로 대표되는 사회와 정부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학교, 소년은 졸업도 하기 전에 사회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무정부 사회는 사람들의 반란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부가 그들의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생겨났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가 무슨 국가의 자격이 있을까. 


소년은 시위 현장에서 만난 생물교사에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학생은 묻고 교사는 답을 하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 생물교사역시 자신의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학생에게 들려줄 뿐이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에스키모들이 썰매에 개를 묶을 때,"

생물교사는 잠깐 동안 말을 끊고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이었다.

"젊고 튼튼한 개들 사이에 늙고 병든 개 한 마리를 끼워넣는다고 한다."

"......."

"그리고 채찍질을 하는데 그 늙고 병든 개만 집중적으로 때린다는 거다."


.....


"그 개는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게 되지. 그 개의 처절한 비명이 다른 개들에게 공포심을 준다는 거야. 그래서 찍소리 못 하고 썰매를 끌게 되는 거야."


......


"그 사령관은 그게 필요한 거야. 공포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혼란이."

나는 공포와 혼란, 이라는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그가 그것을 원했다면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의문점이 남았다. 왜?


p.203-204


이 소설의 리뷰를 쓰는 것은 힘들다. 나 역시 소년과 똑같이 끊임없는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을 듣고도 또다시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그래도 왜? 라는 질문을 해야하니까. 그런데 왜? 그러나 왜? 왜? 왜? 도대체 왜???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206


그 도시의 소년들이 묻는다. 죽어버린 정배가, 영기가, 그 죽은 시체를 지키고 있던 동호가, 이유없이 연행되어 죽을만큼의 폭행을 당하고 도망친 인호가, 친구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소년이. 그러니 이제는 어른들이 대답할 차례다. 답은 교사의 몫이라기보다는 어른의 몫이니까. 그러하기에 노인들은 대답하기가 궁해서 죽어버리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궁한 대답이라도 대답하라. 그 대답에 또 다시 왜? 라는 질문이 이어지더라도 그 왜? 라는 질문이 끝날 때까지.


당신들은 응당 그러해야 한다. 죽지 말고 대답하라. 왜? 라는 질문이 끝나기 전에는 당신들은 죽을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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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1-2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었나요,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로 끝나잖아요. 그게 정말 너무 답답했어요, 아시마님.

아시마 2015-01-27 12:09   좋아요 0 | URL
솔직히, 광주 이야기인줄 알았으면 안 집어들었을 거예요. 소년이 온다가 너무 힘들어서, 한창훈의 건강한 생명력으로 힐링해야지 하고 집어든 소설이... 이게 뭐예요. 괴로워요. 괴롭다는 말 밖에는 지금은 정말 할 말이... 없어요. ㅠ.ㅠ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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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난 뒤의 질의 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소설가의 책무에 대해 물었고 귄터그라스는 소설가는 그 시대를 기록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역사와는 다른 형태로 그 시대를 기록해 훗날의 세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소설가의 책무라고. 

(헌데 이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내 머릿속에서는 귄터 그라스와, 조정래와, 움베르토 에코가 뒤섞여 떠오른다. 요컨대, 시대에 대한 기록이 소설가의 책무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은 귄터 그라스일수도 조정래일수도, 움베르토 에코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011년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는 6.25를 증언하기 위해 '토악질하듯' 글을 썼다고 말한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박완서의 초,중기 소설들은 6.25나 6.25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심지어는 동어반복이 너무 심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분의 그런 글쓰기는 6.25를 직접 겪지않은 나와 같은 세대에게서 효과를 거둔다. 내가 아는 6.25는 국사책의 몇줄 기록이 아니라, 박완서 소설 속의 텅 비어버린 서울, 그곳에 남은 사람들의 고난이다. 나는 그분의 소설을 통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적인 死文을 현실적인 무언가로 체감하니까. 


나는 1980년 광주를 광주사태로 배운 세대다. 그 뒤 광주항쟁으로 바뀌었고, 15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야 1995년 5.18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던가. 아마 대학을 다니면서 선배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이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한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을 했던 노인이 등장한다. 실제로 가담을 했는지, 아니면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인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머슴방에서 젊은 농민들이 청하면 손가락에 소금을 찍어 혀에 올려놓고 동학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동학농민운동은 끝이 났고, 그 잔당? 동조자들을 잡아들이는 시대도 아닌데도 그의 목소리는 저절로 낮아진다고 했다. 


그렇게 낮아진 목소리는 100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1980년 광주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앞에서만 입이 열렸다.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광주에서 중학교 교사를 했던 소설가 한승원의 목소리도 그렇게 낮았다. 그것이 집안에 있는 아직 어린 귀들을 염려했을 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980년 집권한 전두환 군부 세력은  ‘5.18 광주를 말하는 자는 국가내란을 획책하는 자’라는 압제 프레임을 만들어 냈고, 그 프레임은 1995년 '5.18 민주화 운동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전체를 지배했다.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광주는 오랫동안 빨갱이 도시라는 오명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동안 한강이 좀 질렸던 때가 있었다. 상처입은 존재의 상흔을 그려내는 소설들이 조금은 지겨워졌었다. 동어반복같이 느껴져 잠시 멀리 밀쳐놓기도 했었다. 그랬던 한강이 이 소설을 내 놓았다. 귄터 그라스가 말한 소설가의 책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에 동의 하는 편이지만, 5월의 광주에 대한 소설은 이제 나올만큼 나오지 않았느냐는 말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아직까지도 멀었다. 한참이나 남았다. 이 소설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빚을 지고 있다'라는 추상어가 나에게는 구체어로 변한다. 더 많은 작가들이 더 많은 소설이 증언을 해야한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어떤 짓을 하는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역사책에 기록되는 몇줄의 기록이 아니라 그 구체적 참상을 낱낱히, 절실하게, 누가 읽어도 느낄 수 있도록, 과연 당신들이 무슨짓을 하였는가, 감히 그 열흘간의 날들에 대해, 그날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입을 대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반성할 수 있도록.


이 책의 후반부는 통곡 없이 읽을 수 없다. 


한시간여의 그 절망적인 침묵이, 그곳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였습니다.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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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람 2020-10-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두번째 읽으며 저 또한 마지막 장에서 또 흐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듯하여 말씀드리자면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냐는 건 신형철 평론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지칭한 듯 합니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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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스토리로 기억되는 소설도 있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로 기억되는 소설도 있고, 분명 문자로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그림같은 한장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소설도 있다. 이 소설 노인과 바다는 나에게 선명한 이미지 하나로 남아있다. 대가리와 꼬리 지느러미만 남아있고 몸통은 하얀 뼈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생선(의 잔여물?). 그 뼈의 압도적인 이미지에 놀란 마음을 잠깐 진정시키고 천천히 둘러보면 황량한 바닷가 모래톱과 낡은(이건 그야말로 '낡은'이라는 언어의 의미뿐, 어떤 이미지로 고착화되지는 못했다) 배, 희뿌연 바다 등등이 보이지만 결국 모든 건 다시 그 뼈로 돌아간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게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2학년쯤이었다. 언니의 책장에서 뽑아서 읽은 책이니까. 그때부터 머리속에 선명하게 박힌 건 그 이미지였다.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주로 작가들)이 이야기 하지만, 그 뼈의 이미지 때문에 다시 읽을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뭐랄까, 너무 하드보일드하다는 느낌이랄까. 헤밍웨이의 문체에 관해서는 김훈선생이 특히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야말로 뼈다귀만을 추려서 쓰는 문체라고 하셨기에, 더욱, 으악, 그 생선뼈! 였달까. 


그렇다고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니고, 딱히 좋아했다는 것도 아니고(뼈만 남았다니까! 뼈만!) 그냥 유명작가가 쓴 좋은 소설이겠거니, 뭔가 이해를 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와, 뭔가 되게 세련되고 멋지다! 하고 말았다. 그러다 김연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하도 여러번 언급되기에 얼마전 민음사판 책을 꺼내 읽었다. 


세월을 이겨내는 작품에 대해 김연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이라도 소설을 써서 출판했다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리라. 한 명의 독자가 있는 한, 소설은 미래에 읽힌다는 걸. 쓰는 시점과 읽는 시점 사이가 벌어질수록 작품을 누르는 시간의 압력은 점점 커진다. 그러다가 압력에 짓눌려 더이상 누구도 읽지않으면, 그 소설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책꽂이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마주하면 경외심을 느끼리라.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그 정도, 서가 두어 개 정도에 불과하니까. 시간의 압력을 견딘 건 책의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일단은 문장이 읽혀야 내용도 읽을 게 아닌가? 미래에도 읽을 수 있는 문장, 그게 바로 소설가가 써야 할 문장이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학동네, 2014, p.203


이 책, 그리고 이 작가 헤밍웨이가 끊임없이 작가들에 의하여 회자되고, 그의 작품이 문학전집에 반드시 포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만년 전의 공룡 뼈가 현대에 살아남아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처럼, 직접적인 단문과 장식없이 소박하지만 생생한 묘사를 해 내는 문장, 형식보다는 기능(의미전달)에 충실한 헤밍웨이의 문장은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넘은 시간 전에 읽었을 때에도 세련되고 멋졌고, 지금 읽어도 역시 세련되고 멋지다. 산티아고 노인이 끝내 끌고 와 해안가에 부려놓은 그 새하얀 생선의 뼈처럼. 억만년전의 공룡뼈와 닮은 이미지의 그 뼈처럼. 


지금 고백하건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은 건, 이 책이 유일하다. 이번주엔 헤밍웨이 주간으로 명하노니,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부터 읽어야겠다. 그리고 다시한번, 헤밍웨이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연수씨, 고마워용~


아참,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p. 104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죄가 아니라도 생각할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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