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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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스토리로 기억되는 소설도 있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로 기억되는 소설도 있고, 분명 문자로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그림같은 한장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소설도 있다. 이 소설 노인과 바다는 나에게 선명한 이미지 하나로 남아있다. 대가리와 꼬리 지느러미만 남아있고 몸통은 하얀 뼈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생선(의 잔여물?). 그 뼈의 압도적인 이미지에 놀란 마음을 잠깐 진정시키고 천천히 둘러보면 황량한 바닷가 모래톱과 낡은(이건 그야말로 '낡은'이라는 언어의 의미뿐, 어떤 이미지로 고착화되지는 못했다) 배, 희뿌연 바다 등등이 보이지만 결국 모든 건 다시 그 뼈로 돌아간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게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2학년쯤이었다. 언니의 책장에서 뽑아서 읽은 책이니까. 그때부터 머리속에 선명하게 박힌 건 그 이미지였다.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주로 작가들)이 이야기 하지만, 그 뼈의 이미지 때문에 다시 읽을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뭐랄까, 너무 하드보일드하다는 느낌이랄까. 헤밍웨이의 문체에 관해서는 김훈선생이 특히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야말로 뼈다귀만을 추려서 쓰는 문체라고 하셨기에, 더욱, 으악, 그 생선뼈! 였달까. 


그렇다고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니고, 딱히 좋아했다는 것도 아니고(뼈만 남았다니까! 뼈만!) 그냥 유명작가가 쓴 좋은 소설이겠거니, 뭔가 이해를 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와, 뭔가 되게 세련되고 멋지다! 하고 말았다. 그러다 김연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하도 여러번 언급되기에 얼마전 민음사판 책을 꺼내 읽었다. 


세월을 이겨내는 작품에 대해 김연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이라도 소설을 써서 출판했다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리라. 한 명의 독자가 있는 한, 소설은 미래에 읽힌다는 걸. 쓰는 시점과 읽는 시점 사이가 벌어질수록 작품을 누르는 시간의 압력은 점점 커진다. 그러다가 압력에 짓눌려 더이상 누구도 읽지않으면, 그 소설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책꽂이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마주하면 경외심을 느끼리라.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그 정도, 서가 두어 개 정도에 불과하니까. 시간의 압력을 견딘 건 책의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일단은 문장이 읽혀야 내용도 읽을 게 아닌가? 미래에도 읽을 수 있는 문장, 그게 바로 소설가가 써야 할 문장이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학동네, 2014, p.203


이 책, 그리고 이 작가 헤밍웨이가 끊임없이 작가들에 의하여 회자되고, 그의 작품이 문학전집에 반드시 포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만년 전의 공룡 뼈가 현대에 살아남아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처럼, 직접적인 단문과 장식없이 소박하지만 생생한 묘사를 해 내는 문장, 형식보다는 기능(의미전달)에 충실한 헤밍웨이의 문장은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넘은 시간 전에 읽었을 때에도 세련되고 멋졌고, 지금 읽어도 역시 세련되고 멋지다. 산티아고 노인이 끝내 끌고 와 해안가에 부려놓은 그 새하얀 생선의 뼈처럼. 억만년전의 공룡뼈와 닮은 이미지의 그 뼈처럼. 


지금 고백하건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은 건, 이 책이 유일하다. 이번주엔 헤밍웨이 주간으로 명하노니,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부터 읽어야겠다. 그리고 다시한번, 헤밍웨이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연수씨, 고마워용~


아참,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p. 104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죄가 아니라도 생각할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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