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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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난 뒤의 질의 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소설가의 책무에 대해 물었고 귄터그라스는 소설가는 그 시대를 기록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역사와는 다른 형태로 그 시대를 기록해 훗날의 세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소설가의 책무라고. 

(헌데 이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내 머릿속에서는 귄터 그라스와, 조정래와, 움베르토 에코가 뒤섞여 떠오른다. 요컨대, 시대에 대한 기록이 소설가의 책무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은 귄터 그라스일수도 조정래일수도, 움베르토 에코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011년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는 6.25를 증언하기 위해 '토악질하듯' 글을 썼다고 말한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박완서의 초,중기 소설들은 6.25나 6.25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심지어는 동어반복이 너무 심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분의 그런 글쓰기는 6.25를 직접 겪지않은 나와 같은 세대에게서 효과를 거둔다. 내가 아는 6.25는 국사책의 몇줄 기록이 아니라, 박완서 소설 속의 텅 비어버린 서울, 그곳에 남은 사람들의 고난이다. 나는 그분의 소설을 통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적인 死文을 현실적인 무언가로 체감하니까. 


나는 1980년 광주를 광주사태로 배운 세대다. 그 뒤 광주항쟁으로 바뀌었고, 15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야 1995년 5.18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던가. 아마 대학을 다니면서 선배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이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한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을 했던 노인이 등장한다. 실제로 가담을 했는지, 아니면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인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머슴방에서 젊은 농민들이 청하면 손가락에 소금을 찍어 혀에 올려놓고 동학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동학농민운동은 끝이 났고, 그 잔당? 동조자들을 잡아들이는 시대도 아닌데도 그의 목소리는 저절로 낮아진다고 했다. 


그렇게 낮아진 목소리는 100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1980년 광주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앞에서만 입이 열렸다.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광주에서 중학교 교사를 했던 소설가 한승원의 목소리도 그렇게 낮았다. 그것이 집안에 있는 아직 어린 귀들을 염려했을 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980년 집권한 전두환 군부 세력은  ‘5.18 광주를 말하는 자는 국가내란을 획책하는 자’라는 압제 프레임을 만들어 냈고, 그 프레임은 1995년 '5.18 민주화 운동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전체를 지배했다.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광주는 오랫동안 빨갱이 도시라는 오명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동안 한강이 좀 질렸던 때가 있었다. 상처입은 존재의 상흔을 그려내는 소설들이 조금은 지겨워졌었다. 동어반복같이 느껴져 잠시 멀리 밀쳐놓기도 했었다. 그랬던 한강이 이 소설을 내 놓았다. 귄터 그라스가 말한 소설가의 책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에 동의 하는 편이지만, 5월의 광주에 대한 소설은 이제 나올만큼 나오지 않았느냐는 말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아직까지도 멀었다. 한참이나 남았다. 이 소설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빚을 지고 있다'라는 추상어가 나에게는 구체어로 변한다. 더 많은 작가들이 더 많은 소설이 증언을 해야한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어떤 짓을 하는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역사책에 기록되는 몇줄의 기록이 아니라 그 구체적 참상을 낱낱히, 절실하게, 누가 읽어도 느낄 수 있도록, 과연 당신들이 무슨짓을 하였는가, 감히 그 열흘간의 날들에 대해, 그날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입을 대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반성할 수 있도록.


이 책의 후반부는 통곡 없이 읽을 수 없다. 


한시간여의 그 절망적인 침묵이, 그곳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였습니다.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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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람 2020-10-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두번째 읽으며 저 또한 마지막 장에서 또 흐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듯하여 말씀드리자면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냐는 건 신형철 평론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지칭한 듯 합니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