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상 가장 미움받는 왕이 인조다. 재위 기간이 짧았던 예종(세조의 아들, 9개월), 인종(중종의 아들, 8개월) 등이 존재감이 없어 미울 꺼리조자 없는 것과는 반대다. 일단 인조의 존재 자체가 인조 반정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재위기간 내내 비극적인 사건은 줄을 이었다. 두 번의 호란을 겪었고, 아들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며느리 강빈을 사사했고, 세 명의 손자 중 둘을 굶겨 죽인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친아들이 맞으니 그가 굶겨 죽인 손자도 친손주가 맞다. 심지어 소현세자가 8년간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인조의 궁에서 인조가 직접 기른 손주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인조는 제가 낳은 친아들 소현세자를 왜 그리도 경계하고 미워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말을 다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뒤직거리다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조선의 역사에서 그 가정을 가장 강하게 하게 되는 순간이 소현세자와 강빈에 관한 기록을 들추는 순간 아닐까. 무능한 왕 인조를 대신해서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요망하기로 장녹수 찜쪄먹을 후궁 조씨 대신 대찬 소현세자빈 강씨가 조선의 궁궐을 휘어잡았더라면. 병자호란 직후 인조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아니, 8년간의 인질생활을 거친 소현 세자가 인조 사후에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르기만 했어도 어땠을까. 봉림대군 대신 말이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가정이다. 당시 조선 상황으로는 세종과 같은 명군이 아니라 세종 할애비(어라, 세종 할애비가 무려 태조 이성계일세. 아하하, 이 비유의 허무함이라니)가 왔어도 그 난관을 쉽게 극복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봉림대군 대신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들 효종임금보다 나은 임금이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함께 큰 물에서 놀았던 소현세자는 청 세조 순치제의 숙부이자 살아생전 황제 순치제보다 큰 권력을 누렸던 섭정왕 도르곤조차 꽤 인정했던 큰 시야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봉림대군은 8년간의 심양 인질 생활에서 배운 거라고는 청에 대한 원한밖에 없었던 걸까. 훗날 연암이 허생의 입을 빌어 통렬하게 비판하는 허위에 가득한 북벌론밖에 주창한 바가 없으니. 같은 아버지의 자손이 이렇게 다를 수가.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비슷하게 출발한다.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한 많은 저작물들, 학술적 기록과 그에 기반한 소설적 상상력 모두 그 아쉬움을 강하게 드러낸다. 똑같이 아들을 죽인 아비일 지라도 영조와 인조에 대한 평가가 이리도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가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역시 당쟁에 희생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사도세자가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였음은 많은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나. 《심양일기》를 비롯한 심양에서 보내온 숱한 장계에서 드러나는 바, 소현세자는 당대 조선의 인물로서는 드물게 매우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내 강빈과 함께 말이다. 농지를 경영하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구하지 않았던 조선의 포로들을 석방시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백성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왕과 나라는 대체 왜 존재하는가. 소현과 강빈은 심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조선의 백성을 보호하려 노력하였고, 그것이 조선의 백성을 버려두었던 인조와 조정의 미움을 샀던 것일 게다.
작가 김인숙에 대해서 나는 그간 애매한 평가를 내려왔다. 평가를 내린다는 말 자체가 웃기기는 하지만, 김인숙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소설 『소현』은 김인숙을 새롭게 보게 된 작품이다. 호오, 이 작가, 글을 꽤 쓴다.
“배반하지 말라, 무엇도 배반하지 말라. 그리고 의심하지 말라! 내가 다만 조선의 앞날을 우려하고 있음이니!”
김인숙, 『소현』, 자음과 모음, 2010, p. 75
김인숙이 보는 소현세자는 이러했구나. 아버지와 조선 조정의 의심을 살까 조심했던 소현의 절박한 외침은 소현세자의 절박함을 드러내기 보다 인조의 옹졸함과 조선 조정의 비루함을 더욱 크게 웅변한다. 본디 무능하고 감당못할 자리에 앉은 자들은 자신이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짐을 덜어주려는 자들에 대한 의심만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삼는다. 이와 같은 태도는 김훈의 선조에게서도 보인다.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2, p. 119
임금이 아닌자가 나라를 걱정할 때, 무능한 임금은 불안에 시달린다. 김훈의 선조는 “임금은 나를 죽여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나를 살려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었다”(p. 165) 였다. 인조는 소현을 인질로 보냄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소현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려 했다. 아아, 이 무능하고 욕심 많은 것들아.
병자호란의 슬픔은 수많은 포로가 끌려감에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일본도 조선의 백성을 수없이 끌고 가기는 했으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포로노획은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인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명길에 의하면 호란 직후 50만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추측하였는데, 당시 조선의 인구가 6-7백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의 인구가 끌려간 거다. 이들의 서글픈 이야기는 이후 다양한 소설로 변주된다.
(헉, 하얀새는 절판되어 이미지도 없나보다.ㅠ.ㅠ)
그 중 최고의 소설은 송우혜의 『하얀새』(푸른숲, 1996)라고 생각한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으로 유명한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작가이자 사학자다. 이분의 이력은 매우 독특한데, 서울대 간호학과를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간호와 신학과 사학이라니. 이러고는 뜬금없이 작가가 되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해 버리는 거다. 이런 독특한 이력은 단단하고 야무진 글쓰기를 만들어 낸다. 송우혜가 『하얀새』에서 구현해 낸, 조선 중기 양반 가문의 표본 같은 여인 이승효는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이다. 매력적인 여인이다. 이 소설에서도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은 몇줄의 언급이건만도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여인으로 묘사된다.
세자빈은 본시 강단이 있고 총명하여 사태 판단이 빨랐다. 아침 나절에 갑곶 나루의 수비가 무너져서 적군이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리를 듣자 성이 곧 함락당할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곧 원손을 안고 성을 빠져나가 다른 데로 도피하고자 했다. 만의 하나라도 지체가 막중한 원손과 세자빈이 적의 포로가 되어 인질이 되면 전쟁의 국면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화성을 수비하던 조선군 지도자들은 사태 판단에 어두웠다.
(중략)
사태가 이에 이르자 세자빈은 독단적으로 비상조치를 취했다.
(중략)
세자빈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음이 증명 되었다. 원손을 맡아 안고 나간 다섯 내관들은 칼을 휘두르며 성문을 열게 하여 원손을 모시고 나가서 무사히 섬을 빠져 나가 안전한 지역으로 피난했던다. 그리하여 강화섬에 있던 왕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아기 원손만 적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면했던 것이다.
송우혜, 『하얀새』, 푸른숲, 1996, p. 209-210
강빈의 이런 모습은 유시연의 소설 『공녀, 난아』에서 더욱 자세히 묘사된다. 난아는 처음 상전 난향-강빈의 소녀적 이름-을 대신하여 명나라 환관의 양딸로 끌려가 중국 땅을 떠돌다 세자빈이 되어 심양으로 끌려온 세자빈 강씨를 다시 만난다. 이 소설에서 세자빈 강씨는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소현세자를 보필하며 심양의 살림을 이끄는 여걸로 묘사된다. 『하얀새』에서의 승효가 조선 양반가 여인의 금제를 벗어 던지고 압록강에서 심양에 이르는 동팔참의 어느 곳에서 아주 크고 부요한 장원을 경영했듯, 이 소설 『공녀, 난아』에서 강빈은 난아를 매개로 하여 심양의 관소를 경영한다.
강빈은 소장하고 있던 서예와 수묵화, 시문을 높은 가격을 받고 청의 귀족에게 팔아서 자금을 마련한다. 그 자금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다시 되팔고 하며 규모를 늘려나간다. 강빈이 심관에 딸린 식구들과 조선인들의 식량 조달에 힘쓰며, 생활 전반을 지휘하는 사이 소현은 황실과 권력자들과 조선의 사신단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조율하느라 늘 피곤하다.
유시연, 『공녀, 난아』, 선, 2014, p. 180
김인숙은 소설 『소현』의 저자 후기에서 조선의 기록문화에 대해 감탄한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할 당시의 기록들, 그 격변의 시기의 기록들을 중국 학자들이 조선왕조의 기록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p.338)’고 하니, 기록이 가진 힘이란 엄청나다. 김인숙은 ‘너무나 냉정하여 너무나 무한한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있다’ 고 감탄했지만 좋은 재료도 솜씨 좋은 숙수를 만나야 최고의 요리로 탄생하듯 엄청난 기록의 힘도 솜씨없는 소설가를 만나면 이게 뭐냐 싶다.
소설가 본인의 이름보다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먼저 소개되는 소설가 유하령의 첫 번째 소설은 청나라에 끌려가 살아남은 조선인 포로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화냥년』이다. 무려 ‘역사소설 병자호란’ 이라는 부제마저 달고 있는 이 소설은 푸른역사에서 나왔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 푸른역사 출판사 님아, 나 푸른역사 좋아하고 신뢰하는 출판사라고요, 왜 이러십니까.
이 소설의 저자 유하령은 후기에서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아내답게 수많은 참고문헌들을 자신이 읽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자랑만 하고 있다. 이 많은 자료들을 읽고 나온 작품이 『화냥년』이라면 음.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이 책은 걍 패스하시라. 이 작가도.
마지막으로 김인숙의 소설 한 구절을 옮긴다. 이 한 구절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슬펐다.
조선의 적은 그들이었으나 그들의 적은 조선이 아니었다. 봉림의 찬란한 적의가 세자는 그래서 슬펐다.
김인숙, 『소현』, 자음과 모음, 2010, p. 22
친명과 반청, 조선의 그 명분이 과연 청나라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문득 김훈의 소설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성 안을 살피던 칸이 눈에 힘을 주며 찌푸렸다. 멀리 행궁 마당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다. 뭔가 펄럭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칸이 용골대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p. 262
청나라 군사에 몰려 왕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도망가 포위당해 있는 처지에 설날이 되었다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치르느라 행궁 마당에 멍석을 깔고 왕이 춤추는 모습을 본 청태조 홍타이지가 묻는다. ‘저것이 무엇이냐?’라고. 네네, 청태조 아저씨. 제 말이요.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이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