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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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였다. 명절 연휴의 첫 날, 무료하게 TV 채널을 돌리다 배우 염혜란이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게 된 거다. 김고은과 공유가 나온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고은의 악독한 이모 역할로 익숙했던 염혜란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배우 릴리 프랭키의 연기에 대한 칭찬을 하고 있었다. 릴리 프랭키. . 알아, , 이 사람. 나에게는 일본의 배우이기 전에 에쿠니 가오리의 것과 같은 동명 소설 도쿄타워의 작가로 먼저 익숙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주문하려다 실수로 릴리 프랭키의 책을 주문했고, 책을 받고서도 으레 저자 이름을 확인할 생각도 없이 펼쳐 읽다가 엥? 에쿠니 가오리 작풍이 바뀌셨나 했다가 처음 알게 된 작가. 실수였는데 뜻밖에 대박이었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동명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소설의 저자로 상상한 릴리 프랭키는 뭐랄까, 약간 깍두기스러운 단순하지만 단단하고도 우직한 남자 였는데, 어라, 저 헐랭해 보이는 남자가 릴리 프랭키라고. 그래서 보게 되었다, 이 영화.

 

작년, 아니 재작년. 2019년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 관련 기사에 늘 언급되던 이름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고,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2018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품이다. , 그렇군. 일본에서 우리보다 먼저 황금종려상을 받았네? 했다. 그리고 얼마 뒤, 2020년 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감독상, 각본상에 국제영화상까지 4관왕을 차지했다. 같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아카데미 무관인데 말이다. (외국어 영화상 최종 노미네이트까진 되었다) 이 촌스럽기 짝이없는 국수주의자는 은밀히 웃었다. 그리고 잊었다.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알라딘에서 보게 된 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소설 좀도둑 가족. 난 영상보다는 활자를 좋아한다, 이 유튜브 시대에 덜떨어지게도 말이다. 영화로 유명한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책으로 먼저 읽었다. 활자화 된 어느 가족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굳이 영화로 봐야만 하나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그렇게 되었던 거였다. 릴리 프랭키 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굳이 보지 않았을 이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매우 서술적인 제목의 이 영화. 큰 기대 없이 무료한 설날 연휴를 보내는 중간에 끼어든 덤덤한 이벤트로 보기로 한 거다.

 

도쿄의 고급 맨션에 거주하는, 성공한 건축가 노노미야 료타에겐 아름다운 아내와 여섯 살 난 아들 케이타가 있다. 료타의 욕심만큼 출중한 능력을 지닌 아들은 아닐지언정, 케이타는 아버지의 기대 수준을 맞추려 최선을 다하는 아들이다.

처음엔 노노미야 료타 역의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한국 배우 정우성과 꽤나 닮아보여서 신기해 하며 봤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더라, 아예 이 두 배우 연관 검색어가 있더라니까. 진짜 닮긴 많이 닮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꾸만 케이타가 눈에 밟혔다. 어떤 감정은 자신이 그 상황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명확하게 읽히기도 한다. 엄마인 나는 애쓰는 케이타가 몹시 아팠다.

 

6년을 친아들인줄 알고 키웠는데 어느날 갑자기 애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병원에서는 아주 단순하게도 이런 경우 100% 교환을 선택합니다.” 라고 말한다. 교환이라니. 이게 무슨 오배송 된 택배도 아니고 말이다. 처음에 노노미야 료타는 당연하다는 듯 교환을 선택한다. 6년간 키워온 아들 케이타를 버리는데 별 고민이 없어 보인다. 바뀐걸 아는 순간에 네 아들을 돌려줄 테니 내 아들을 돌려다오, 하는 건 아닐지언정 바뀐 아들을 키우는 저쪽 부부와 교류를 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친아들을 돌려받기 위한, 말하자면 친아들의 충격을 좀 덜기 위한 과정으로 보였을 뿐 6년간 키워온 케이타에 대한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은 별로 없어보인다. 그에게 아들은 자신의 삶의 업적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어쩌면 병원에서 말한 교환이 료타에게는 딱 맞는 표현이었을지 모르겠다.

 

몇 달의 교류를 거쳐 양가는 료타의 의사대로 아이를 교환하기로 하고 각자의 친아들을 각자의 집에서 돌보기 시작한다. 케이타의 부재가 비로소 료타도 알지 못했던 케이타에 대한 애정을 깨우기 시작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의 대립에서 감독이자 작가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매번 키운 정에 손을 들어준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에 대한 질문은 감독 작품의 순서상으로는 뒤쪽이지만 내가 접하기로는 먼저인 좀도둑 가족에서 명확하게 말한다. 시바타 가족은 가짜 할머니, 가짜 부부, 가짜 손녀 가짜 아들로 이루어진 가짜 가족이지만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에서만은 오히려 가짜가 진짜 가족이라고.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도 결국, 료타는 그렇게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로 결말을 짓는다. 아이가 바뀐 것을 알기 전, 케이타에게 아버지 료타는 늘 잠만 자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조차 사랑하고 관찰하며 사진을 찍어주던 케이타, 료타가 아버지가 되기 전에 이미 케이타는 아들이 되어 있었고 낳았으니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료타를 깨닫게 한다. 이제 케이타의 아버지가 된 료타는 릴리 프랭키가 열연한 사이키 유다이 씨에게 배운대로 아버지 노릇을 잘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행위로서의 아버지 노릇이 아니라 감정적인 아버지 노릇이다.

 

부모 역할이란 교과서가 하나밖에 없는 과목의 공부와도 같다. 누구나 부모 노릇은 자신의 부모에게서 배우게 된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키운 방법이 아무리 싫었다고 한들, 다른 부모노릇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 속담대로 미워하며 닮는다는 식으로 미워했던 그 부모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료타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양육한대로 케이타를 양육했고, 아들이 바뀐 것을 알지 못했다면 아버지가 될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케이타를 사랑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사랑한다고 믿고 살았을 것이다. 일본의 배우 기타노 다케시의 말처럼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믿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연이니까 가족이라고 믿으며. 사랑하지 않으면서 혈연이니까 가족인 걸까. 혈연이 없더라도 사랑하고 아끼면 가족인 걸까.

 

책으론 그저 그랬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이렇게 괜찮다면, 어느 가족도 영화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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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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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지금 누가 나에게 보통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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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상 가장 미움받는 왕이 인조다. 재위 기간이 짧았던 예종(세조의 아들, 9개월), 인종(중종의 아들, 8개월) 등이 존재감이 없어 미울 꺼리조자 없는 것과는 반대다. 일단 인조의 존재 자체가 인조 반정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재위기간 내내 비극적인 사건은 줄을 이었다. 두 번의 호란을 겪었고, 아들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며느리 강빈을 사사했고, 세 명의 손자 중 둘을 굶겨 죽인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친아들이 맞으니 그가 굶겨 죽인 손자도 친손주가 맞다. 심지어 소현세자가 8년간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인조의 궁에서 인조가 직접 기른 손주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인조는 제가 낳은 친아들 소현세자를 왜 그리도 경계하고 미워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말을 다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뒤직거리다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조선의 역사에서 그 가정을 가장 강하게 하게 되는 순간이 소현세자와 강빈에 관한 기록을 들추는 순간 아닐까. 무능한 왕 인조를 대신해서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요망하기로 장녹수 찜쪄먹을 후궁 조씨 대신 대찬 소현세자빈 강씨가 조선의 궁궐을 휘어잡았더라면. 병자호란 직후 인조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아니, 8년간의 인질생활을 거친 소현 세자가 인조 사후에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르기만 했어도 어땠을까. 봉림대군 대신 말이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가정이다. 당시 조선 상황으로는 세종과 같은 명군이 아니라 세종 할애비(어라, 세종 할애비가 무려 태조 이성계일세. 아하하, 이 비유의 허무함이라니)가 왔어도 그 난관을 쉽게 극복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봉림대군 대신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들 효종임금보다 나은 임금이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함께 큰 물에서 놀았던 소현세자는 청 세조 순치제의 숙부이자 살아생전 황제 순치제보다 큰 권력을 누렸던 섭정왕 도르곤조차 꽤 인정했던 큰 시야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봉림대군은 8년간의 심양 인질 생활에서 배운 거라고는 청에 대한 원한밖에 없었던 걸까. 훗날 연암이 허생의 입을 빌어 통렬하게 비판하는 허위에 가득한 북벌론밖에 주창한 바가 없으니. 같은 아버지의 자손이 이렇게 다를 수가.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비슷하게 출발한다.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한 많은 저작물들, 학술적 기록과 그에 기반한 소설적 상상력 모두 그 아쉬움을 강하게 드러낸다. 똑같이 아들을 죽인 아비일 지라도 영조와 인조에 대한 평가가 이리도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가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역시 당쟁에 희생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사도세자가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였음은 많은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나. 심양일기를 비롯한 심양에서 보내온 숱한 장계에서 드러나는 바, 소현세자는 당대 조선의 인물로서는 드물게 매우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내 강빈과 함께 말이다. 농지를 경영하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구하지 않았던 조선의 포로들을 석방시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백성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왕과 나라는 대체 왜 존재하는가. 소현과 강빈은 심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조선의 백성을 보호하려 노력하였고, 그것이 조선의 백성을 버려두었던 인조와 조정의 미움을 샀던 것일 게다.

 


작가 김인숙에 대해서 나는 그간 애매한 평가를 내려왔다. 평가를 내린다는 말 자체가 웃기기는 하지만, 김인숙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소설 소현은 김인숙을 새롭게 보게 된 작품이다. 호오, 이 작가, 글을 꽤 쓴다.

 

배반하지 말라, 무엇도 배반하지 말라. 그리고 의심하지 말라! 내가 다만 조선의 앞날을 우려하고 있음이니!”

 

김인숙, 소현, 자음과 모음, 2010, p. 75

 

김인숙이 보는 소현세자는 이러했구나. 아버지와 조선 조정의 의심을 살까 조심했던 소현의 절박한 외침은 소현세자의 절박함을 드러내기 보다 인조의 옹졸함과 조선 조정의 비루함을 더욱 크게 웅변한다. 본디 무능하고 감당못할 자리에 앉은 자들은 자신이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짐을 덜어주려는 자들에 대한 의심만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삼는다. 이와 같은 태도는 김훈의 선조에게서도 보인다.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2, p. 119

 

임금이 아닌자가 나라를 걱정할 때, 무능한 임금은 불안에 시달린다. 김훈의 선조는 임금은 나를 죽여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나를 살려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었다”(p. 165) 였다. 인조는 소현을 인질로 보냄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소현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려 했다. 아아, 이 무능하고 욕심 많은 것들아.

 

병자호란의 슬픔은 수많은 포로가 끌려감에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일본도 조선의 백성을 수없이 끌고 가기는 했으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포로노획은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인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명길에 의하면 호란 직후 50만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추측하였는데, 당시 조선의 인구가 6-7백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의 인구가 끌려간 거다. 이들의 서글픈 이야기는 이후 다양한 소설로 변주된다.

  


(헉, 하얀새는 절판되어 이미지도 없나보다.ㅠ.ㅠ)


그 중 최고의 소설은 송우혜의 하얀새(푸른숲, 1996)라고 생각한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으로 유명한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작가이자 사학자다. 이분의 이력은 매우 독특한데, 서울대 간호학과를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간호와 신학과 사학이라니. 이러고는 뜬금없이 작가가 되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해 버리는 거다. 이런 독특한 이력은 단단하고 야무진 글쓰기를 만들어 낸다. 송우혜가 하얀새에서 구현해 낸, 조선 중기 양반 가문의 표본 같은 여인 이승효는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이다. 매력적인 여인이다. 이 소설에서도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은 몇줄의 언급이건만도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여인으로 묘사된다.

 

세자빈은 본시 강단이 있고 총명하여 사태 판단이 빨랐다. 아침 나절에 갑곶 나루의 수비가 무너져서 적군이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리를 듣자 성이 곧 함락당할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곧 원손을 안고 성을 빠져나가 다른 데로 도피하고자 했다. 만의 하나라도 지체가 막중한 원손과 세자빈이 적의 포로가 되어 인질이 되면 전쟁의 국면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화성을 수비하던 조선군 지도자들은 사태 판단에 어두웠다.

(중략)

사태가 이에 이르자 세자빈은 독단적으로 비상조치를 취했다.

(중략)

세자빈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음이 증명 되었다. 원손을 맡아 안고 나간 다섯 내관들은 칼을 휘두르며 성문을 열게 하여 원손을 모시고 나가서 무사히 섬을 빠져 나가 안전한 지역으로 피난했던다. 그리하여 강화섬에 있던 왕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아기 원손만 적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면했던 것이다.

 

송우혜, 하얀새, 푸른숲, 1996, p. 209-210

 


강빈의 이런 모습은 유시연의 소설 공녀, 난아에서 더욱 자세히 묘사된다. 난아는 처음 상전 난향-강빈의 소녀적 이름-을 대신하여 명나라 환관의 양딸로 끌려가 중국 땅을 떠돌다 세자빈이 되어 심양으로 끌려온 세자빈 강씨를 다시 만난다. 이 소설에서 세자빈 강씨는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소현세자를 보필하며 심양의 살림을 이끄는 여걸로 묘사된다. 하얀새에서의 승효가 조선 양반가 여인의 금제를 벗어 던지고 압록강에서 심양에 이르는 동팔참의 어느 곳에서 아주 크고 부요한 장원을 경영했듯, 이 소설 공녀, 난아에서 강빈은 난아를 매개로 하여 심양의 관소를 경영한다.

 

강빈은 소장하고 있던 서예와 수묵화, 시문을 높은 가격을 받고 청의 귀족에게 팔아서 자금을 마련한다. 그 자금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다시 되팔고 하며 규모를 늘려나간다. 강빈이 심관에 딸린 식구들과 조선인들의 식량 조달에 힘쓰며, 생활 전반을 지휘하는 사이 소현은 황실과 권력자들과 조선의 사신단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조율하느라 늘 피곤하다.

 

유시연, 공녀, 난아, , 2014, p. 180

 

김인숙은 소설 소현의 저자 후기에서 조선의 기록문화에 대해 감탄한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할 당시의 기록들, 그 격변의 시기의 기록들을 중국 학자들이 조선왕조의 기록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p.338)’고 하니, 기록이 가진 힘이란 엄청나다. 김인숙은 너무나 냉정하여 너무나 무한한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있다고 감탄했지만 좋은 재료도 솜씨 좋은 숙수를 만나야 최고의 요리로 탄생하듯 엄청난 기록의 힘도 솜씨없는 소설가를 만나면 이게 뭐냐 싶다.

 


소설가 본인의 이름보다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먼저 소개되는 소설가 유하령의 첫 번째 소설은 청나라에 끌려가 살아남은 조선인 포로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화냥년이다. 무려 역사소설 병자호란이라는 부제마저 달고 있는 이 소설은 푸른역사에서 나왔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 푸른역사 출판사 님아, 나 푸른역사 좋아하고 신뢰하는 출판사라고요, 왜 이러십니까.

 

이 소설의 저자 유하령은 후기에서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아내답게 수많은 참고문헌들을 자신이 읽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자랑만 하고 있다. 이 많은 자료들을 읽고 나온 작품이 화냥년이라면 음.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이 책은 걍 패스하시라. 이 작가도.

 

마지막으로 김인숙의 소설 한 구절을 옮긴다. 이 한 구절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슬펐다.

 

조선의 적은 그들이었으나 그들의 적은 조선이 아니었다. 봉림의 찬란한 적의가 세자는 그래서 슬펐다.

 

김인숙, 소현, 자음과 모음, 2010, p. 22

 

친명과 반청, 조선의 그 명분이 과연 청나라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문득 김훈의 소설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성 안을 살피던 칸이 눈에 힘을 주며 찌푸렸다. 멀리 행궁 마당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다. 뭔가 펄럭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칸이 용골대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p. 262

 

청나라 군사에 몰려 왕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도망가 포위당해 있는 처지에 설날이 되었다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치르느라 행궁 마당에 멍석을 깔고 왕이 춤추는 모습을 본 청태조 홍타이지가 묻는다. ‘저것이 무엇이냐?’라고. 네네, 청태조 아저씨. 제 말이요.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이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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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냥년이라는 말은 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를 가리키는 한자어 환향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저게 발음이 꼬이다보니 화냥년이 된건데 정말 당대 청에 끌려간 여인들이 정절을 잃었음을 비꼬고 억압하면서 저런 말이 만들어진거지요. 작가가 좀 더 의식이 있었다면 제목을 환향녀로 해도 됐을텐데 말이죠.

아시마 2021-02-16 01:30   좋아요 0 | URL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아내 유하령 작가는 화냥년의 어원을 우리가 흔히 아는 환향還鄕녀가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인들에게 바쳐졌던 조선의 여인들을 통칭하는 말 화랑花郞녀 에서 기원했다고 보더군요. 아주 대단한 지식의 발굴인냥 여러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제 남편은 비루한 상대출신이라 역사학자 남편을 둔 유하령 작가에게 제가 뭐라고 토를 달겠습니까만, 어원이고 나발이고 간에 소설이, 소설이. 너무나 재미가 없어요. -_-

바람돌이 2021-02-16 01:32   좋아요 0 | URL
아 처음 듣는 어원이네요.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그리고 역사고 뭐고 일단 소설인데 그게 너무 재미가ㅠ없다니 안타깝습니다. ㅎㅎ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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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성할 것이다. 그것이 조선의 대신들은 알고자 하지 않고, 적의 땅에 오래 머물렀던 세자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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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6 세트 - 전6권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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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만든 스페이스 오페라 승리호가 꽤 화제다. 애초에 별로 볼 마음도 없었는데 영화평을 보니 더 볼 마음이 사라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평이 가장 와 닿는다. “기술적 성취를 가리는 몰개성의 작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공개 하루만에 전 세계 1위로 등극했다. 한국인들의 영화평은 별론데 세계에선 꽤 인기가 있나 보다. 스페이스 오페라 답다.

 

2015년 기준으로 세계 영화 시장의 규모는 383억 달러(한화 약 45조원). 나라별 순위를 보면 2017년 기준 북미 - 중국 일본이 1,2,3 위를 차지하고 영국과 인도에 이어 한국이 16억 달러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력으로는 우리나라도 꽤 높은 수위에 든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인구수를 생각하면 이 민족, 영화를 참 좋아한다.

 

그런 한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장르가 있다. 스타워즈시리즈로 대표되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SF(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의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바타겨울왕국에 이어 역대 외화 흥행 순위 세 번째를 기록한 인터스텔라의 한국내 인기는 어마어마 했다. 역시나 같은 SF 장르에 포함될 아바타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 SF 무척 좋아한다.

 

물론 스타워즈도 국내 관객층, 매니아 층이 꽤 있다. 인기가 없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스타워즈가 가지는 위상에 비하면 초라하다. 희한하게 인기가 없다. 마블이 만드는 히어로 시리즈에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민족이, SF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유독 SF의 하위 장르인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대해서는 평가가 박하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1940년대 처음 제시되는 개념으로 인터스텔라류의 우주 탐사 SF와는 달리, 이미 탐사가 끝나 뭔가 세계관이 정립되어 있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우주 활극쯤 된다. 한국 사람들은 우주 탐사는 관심있게 지켜보지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정복전쟁에는 관심이 없나보다.

 

인간은 너무 거대한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좁디 좁은 한반도,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 몇 개의 나라로 쪼개졌다가 통일하고 다시 쪼개지는 역사를 가진 한국인에게, 세계도 아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정복전쟁 이야기는 평균치 한국인의 상상력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하나의 대륙도 뭐 할 판에 한 행성을 식민지화 한다니. 으아. 이건 한국인이 접수하기엔 스케일이 너무도 큰 거지. 마블의 히어로 시리즈도 결국 배경으로 잡는 건 지구라는 걸 생각해 보면 왜 마블은 인기가 있었고 스타워즈는 별로였나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들, ‘활극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장군의 아들시리즈는 몹시 예외적인 결과물이고, 미국에서 서부 활극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까지 몇몇 작품들이 제작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스타워즈가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북미(하긴 미국도 굳이 따지고 들면 식민지가 독립한 국가이긴 하다만,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후손들이니.)나 영국, 일본 모두 세계를 배경으로 크게 놀아본 경험들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쨌든, 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의 신장판이 나왔다. (사실 이 신장판이라는 말, 출판사에서 듄 신장판 신장판 하길래 쓰기는 한다만, 왜 굳이?) 프랭크 허버트가 미국에서 첫 출간한 것이 1965,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2001년으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나 새로 내는 개정판이다.(듄의 미국내 인기와 상징성, 영화와 게임등의 2차 저작물등을 생각해 볼 때, 65년에 첫 출간 된 소설이 근 40년이 지나 번역되다니 한국에서의 스페이스 오페라, 인기가 없긴 정말 없나 보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햄릿 풍의 우아한 궁정극이다. 영지를 나누어주는 황제가 있고, 그 황제에게 받은 봉토를 다스리는 귀족이 있다. 물론 이 모든 직위는 혈통에 따라 세습된다. 이쯤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계략에 의한 한 집안의 몰락과 힘겹게 살아남은 아들의 복수극이 펼쳐진다. 배경을 우주의 한 행성으로 옮겨놓았고, 특이한 능력들이 등장하지만 큰 틀은 비켜나지 않는다. 그러나 듄의 진정한 가치는 그 복수극이 완성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얼마전 나는 시리즈물(또는 대하 장편소설)의 성공 제1 요건에는 등장인물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바, 길고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를 붙잡아 두는 힘은 등장인물이 가진 매력이 거의 전부다. 1편 에서의 주인공 폴 무앗딥아트레이데스는 그런 시리즈 물 주인공다운 옹골찬 매력의 소유자다. 이 젊고(어리고), 전설 속의 퀴사츠 해더락일 가능성이 있고, 정의로운 아버지, 아름답고 현명한 어머니에게서 아름다운 외모와 정의로운 성품을 물려받은 공작가 후계자이자 불의한 자들에 의해 정당한 자리에서 내쫓기는 불쌍한 아이. 독자들은 그 아이가 겪는 고난에 깊은 동정을 느끼며 그의 행동을 응원하게 된다. 주인공과 나의 동일시가 일어나는 시점이다.

 

폴의 고난에 찬 복수극은 의외로 쉽게, 그리고 빨리(100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빨리라고 볼 수 는 없지만, 전체 이야기로 보면 뭐.) 끝난다. 뭐야, 뭐가 이렇게 쉬워 싶게 폴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황제 위에 오른 폴과의 행복한 동일시는 끝이 난다. 폴은 말 그대로 전설 속의 퀴사츠 해더락이 맞았지만 나의 주인공이 그렇게 엄청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폴의 고뇌가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고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듄이라는 소설 그 자체의 매력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 교체를 견딜수 있는자는 그 이후의 2부부터 6부까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

 

2권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건국이 완료된 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갈등 양상들이 우주 행성간에도 어김없이 나타나며 정복한 자, 정복당한 자, 승리한 자, 패배한 자, 차지한 자, 내쫓긴 자 각각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가운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슬프게도 그 인물들이 죄다 별로 매력적이지가 않다. 제국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궁정극 특유의 우아한 맛도 사라진다. 아아, 누구에게 마음을 의탁하여 이 소설을 읽어내리, 한탄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2권의 고비를 넘으면 3-6부까지는 일사천리로 읽힌다. 이 소설이 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인지 이해하게 되고, 칼 세이건의 찬사에 동의하게 된다. 이 소설은 뜻밖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특히 초인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소설가 김연수는 에세이집 소설가의 일에서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서가 두어 개 정도라고 말했다. 물론 김연수는 시간의 압력을 견디는 힘이 그 문장에 있다고 말을 했지만, 내가 주목한 건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살아남는 작품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 그 자체다. 65년에 첫 출간 된 이 책이 40년이 아니라 60여년의 압력을 견디고도 이렇게 살아남아 신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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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09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니까요. 이게요. 4300페이지라고요. ㅎㅎ
아 정말 고민중입니다. 세상에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데 이리 두꺼운 책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

라로 2021-02-13 14:19   좋아요 0 | URL
거기다 아들이 쓴 것까지 있는 거 아시죠??^^;;

josée 2021-08-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잘 읽었습니다👍

황목련 2021-12-2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배 공감합니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2권 중반부터 책 놓고 고민중이었습니다. 힘내서 2권을 돌파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