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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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들어서는 하루키 보다는 차라리 류가 낫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생각해 보면 하루키도 류도 읽은 것이 별로 없다. 게다가 하루키는 워낙에 광 팬이 많아서 의외로 반감이 드는 작가랄까. 모든 사람이 다 좋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개성 없는 맛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선입관도 있고.
여기저기서 한두개 주워 읽은 단편 몇 개를 제외한다면 읽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노르웨이의 숲』에 이어 하루키의 장편을 다 읽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추석연휴의 초반 이틀 동안 꼬박 읽은 책인데, 상하 합하여 9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술술 페이지가 넘어갔다. 이야기 자체의 서사적 구조가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상징 코드들 때문에 일견 느슨해 보인다는 것을 감안해 보았을 때,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하루키 흡입력의 가장 큰 매개는 그 문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문체가 특별히 당긴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문체만으로 놓고 본다면 지나가다 읽은 예전의 단편들이 훨씬 독특하고 감칠맛 있었다는 느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전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만들어 놓는데서 온다고 할까. 도쿄를 떠난 다무라 카프카 군이 간 다카마쓰 시 라든지, 고무라 기념 도서관이라는 지명과 장소 자체가 현실이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나 그곳의 특이한 사람들 -사에키 상과 오시마 상-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카프카 군의 표현대로라면 “세계의 움푹 파인 데와 같은 은밀한 장소”(상권, p.78)이니까 이곳에 특이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 그리고 모여서 특이한 사건을 겪는 것은 평범한 속세의 세상에서 된장국에 아침밥을 먹는 것과 동일한 일과 같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해서 나름의 매력을 가지게 되는 요시모토 바나나와는 또 다른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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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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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작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무는 잊혀져 가고 있는 시대를 문학작품으로 기록을 해 놓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제 청산 문제는 지금이 아닌 그때 다루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책무는 사람들이 그때의 일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로 기록해 놓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일제 시대의 해외 이민 이야기를 처음 읽은 것은 조정래의 『아리랑』에서 였다. 그 소설은 주인공 방씨일가의 장남 방영근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로 일본이 팔아먹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가 돌아오지 못하고 하와이에 주저앉게 되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조정래 특유의 질박하고도 걸쭉한 묘사에 주인공들의 걸걸한 사투리가 더해져 소설은 텁텁한 막걸리를 데워 마시는 것 같이 탁하면서도 진한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멕시코 애니깽(에니켄) 농장으로 팔려간 1032명의 이민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전에 이루어진 하와이 이민에서 혈기 방장한 남자들만을 내 보내 문제가 일어났던 것을 계기로 이번에는 가족 단위의 이민이 이루어 진다. 그리고 멕시코 이민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번 이루어진 노예 거래였고, 하여 그들은 하와이의 이민자들보다는 훨씬 빨리 훨씬 쉽게 잊혀진다.
같은 이민사의 이야기 이지만 아리랑과 달리 이 소설에서는 “일제강점”이라는 한국의 시대적 현실이 지워지고 없다. 물론, 고종의 사촌 이종도 일가의 몰락에서 한 왕가의 몰락이 읽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제강점으로 인한 몰락이라기보다는 권용준이라는 한 통역관의 농간에 의한 몰락이라고 보아야 한다. 
 

작가는 한국을 떠나 멕시코에 정착한 이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기록해 나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도 김영하 특유의 위트와 냉소적 문체는 쉽게 벗어지지 못한다. 이 글에는 조정래의 글에서와 같은 질박하고 걸쭉한 묘사대신, 시원한 영화관에 앉아 땡볕이 내리 쬐는 영화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묘사들이 있다. 현실성이나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경쾌하면서도 섬세하고 세밀하다. 물에 빠진 자가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것을 작가 김영하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멕시코의 에니켄 아시엔다(애니깽 농장)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냉소적이고 위트있는 문체는 매혹적이고, 이 긴 이야기를 전혀 길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을 자신의 대표작품이라고 말하였다 하는데, 지금까지 그가 써 낸 소설중에서는 단연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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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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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고전소설론 시간에 담당 교수님께서, 김만중의 구운몽은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 남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다룬 소설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부귀공명과 2처 6첩이 최고의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축첩제도가 만연한 조선시대라지만 좀, 그렇군 싶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구운몽 전편을 단 한번도 읽어본 일이 없다는 데 생각이 가 닿았다. 별로 재미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고민 끝에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72번으로 출간된 것을 보고 주문해다 읽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없었다.
단 한명의 악인도 나오지 않고, 아주 사소한 갈등조차 존재하지 않는 소설이란, 도무지, 뭐랄까,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늙은 바람둥이의 소시적 연애담을 듣는 기분이랄까. 고전소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삶에 대한 통찰이라든지, 깊고 풍부한 사상이라든지, 그게 아니면 뭔가 기발한 이야기라도 있어야 할 텐데, 이 소설은 그게 없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고전이니까, 그래 엄청난 사상적 바탕을 가지고 있는 거다~ 라고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지만, 글쎄다~ 조선시대에 씌여졌다는 것 외에 이 소설이 왜 가치를 가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이것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진정한 로망이라면, 나는 정말이지 조선의 선비에게 실망이다.
본디 신선이었던 아버지를 두고, 불제자였던 성진이 인간세상에 태어난다.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고, 가는 길에 그 빼어난 외모와 엄청난 글재주로 가는 족족 여자들을 후린다. 아니다, 후리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유혹을 하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 준다. 양소유(성진) 스스로는 단 한번도 여자에게 접근을 한다든지 여자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든지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노력하는 것이 제1부인 정경패와의 만남인데, 사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이 이 정경패다.) 그야말로 가는 여자 안잡고 오는 여자 안막는다, 랄까, 처음부터 나는 수십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울꺼야! 라는 결심이라도 한 듯, 손짓만 하면 휙,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여덟명의 여인네들,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제가 양소유를 모시고 눕는 밤에 자신과 친한 다른 여자를 천거하는 여자가 둘이나 되고, 자신의 몸종으로 하여금, 양소유의 ‘살수청’을 들게 하며, 자신과 결혼할 날을 기다리게 하는 여자도 있다. 음, 그러니까, 이렇게, 2처 6첩을 거느리면서도 그 여성들이 서로형제의 의를 맺어 친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진정한 로망이었단 말인가.
근사한 연애소설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더니, 연애는 전혀 없는 포르노 무비를 한편 본 기분이랄까. 중간 중간 이어지는 사건들도, 전혀 흥미진진한 구석은 없이(뭔가 주인공도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매번 양소유를 사모하는 여성의 도움으로 휘딱휘딱 해치워 버린다. 이래서야 별 재미가 없지 않은가.
사씨 남정기를 사다 읽어볼까 했는데, 음.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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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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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문학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장에 대해 “전압이 높은 문장”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가 마음먹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전압을 준 글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조바심과 약간의 짜증이 나는 일이다.
어느 순간 몰입해서 읽었는가 생각하면, 어느새 눈은 글자를 읽는데 머리는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짜증을 내며 책을 던져버릴 법도 한데, 김훈의 글은 쉽게 팽개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여 내 책장에는 김훈의 책이 여섯 권 꽂혀 있는데, 나는 그 중 두 권을 아직도 읽지 않은 채 꽂아 두고 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꽤나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내가 김훈이라는 한 작가를 인지하게 된 것은 당연히 2001년 독서계를 휩쓸고 간 소설 『칼의 노래』덕분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김훈 世說” 이라는 소제를 달고 나오는 그의 짤막한 에세이들 때문이다. 나는 그의 위악에 가까울 정도로 솔직한 에세이를 좋아한다.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가 보수주의자임을 인정하고, 페미니즘에서 파생되는 여성의 능력에 대한 예찬을 부정하고, 한여름 여성의 노출패션을 찬양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위치에 올라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경직된 사회에서 그는 “오버한다” 싶을 정도의 솔직함으로 글을 쓴다. 위악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거침없는 그의 문장들은 그러나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는 위악적인 문장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를 역설가라 말한다.
하기야, 역설은 그가 가장 많이 구사하는 수사법이기는 하다.

올해, 김훈의 두 번째 世說은 “순정한 처사(處士) 김훈이 몸으로 써낸 사람살이의 풍경”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제목은 그의 수사법 그대로 “밥벌이의 지겨움” 이란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밥벌이’라는 명쾌한 이름을 붙일 줄 알고, 그것이 지겹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솔직함이 짧은 에세이에 묻어 나온다.
단지, 버려 주었으면 좋았을 뻔한 글이 너무 많다.
여기저기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서 묶어낸, 그래서 세설(世說)이라는 이름을 붙인 에세이집인 것 같은데, 해서 동어반복의 글들이 많다. 결과적으로는 김훈, 이라는 네임 벨류에 대한 훼손이 될 텐데…… 걱정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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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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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겨울에,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을 독파했던 일이 있었다.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다, 이상문학상의 초기 스타일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딱히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뭐랄까, 일종의 소설 트랜드를 읽어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걸 바탕으로 레포트를 썼다가 이쁨 받았지, 울 샌님한테. ^^

무라카미 류는 내가 일본문학에 학을 띠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만약, 그의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즈(버려진 아이들의 반란으로 초판 번역됨)』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하루키나 바나나, 가오리, 에이미 등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무라카미 류는 나에게 엽기코드로 다가왔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애널 섹스의 개념조차 없을 때, 읽었던 코인로커 베이비즈는 며칠동안 잠을 못자게 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랬음에도 이 책을 읽었던 것은
1.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
2. 그의 데뷔작이자 자전적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놈은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두 가지 이유가 전부다. 그나마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한 건, 울 샌님의 강압에 의해서다. 움. 일본문학은 별로 맞지 않고, 나는 유미리도 싫다만, 또 시키는 건 잘한다.

얼마 전, 자주 가는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누가, 책을 처분하겠다는 글을 올린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처분 목록 중의 하나가 이 소설이었고, 처분 이유가 16살 된 늦둥이 동생이 자기 방에 들어와 이 책을 들춰 보는 걸 보고 얼른 치워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그 정도의 반응인가, 하는 호기심에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붉은 딱지는 한층 더 유혹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읽던 책을 던져놓고 읽었는데,

마약, 그룹섹스, 동성애, 약물중독, 난교파티……

16살 된 동생이 들춰 본다면 좀 심란해 지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소설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의 취향과는 전혀 반대되는 소설임에도.

소설의 주인공 류는 기지촌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저 이태원쯤 되려나.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 여자와 미군의 난교파티를 주선하고, 마약을 나눠주며, 아무런 미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게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딱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이, 이것이 굳이 나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눈앞에 주어진 일이고 막상 움직여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일 뿐.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약과 난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뭘 해야 겠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는 70년대 초중반 일본 사회의 상실감에 관한 소설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되고 싶은 것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지겨워 미치겠는 그 상실감이 이 소설만큼 확연하게 드러난 것도 드물 것 같다.

물론, 어린이날 읽기에는 좀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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