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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귄터 그라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작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무는 잊혀져 가고 있는 시대를 문학작품으로 기록을 해 놓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제 청산 문제는 지금이 아닌 그때 다루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책무는 사람들이 그때의 일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로 기록해 놓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일제 시대의 해외 이민 이야기를 처음 읽은 것은 조정래의 『아리랑』에서 였다. 그 소설은 주인공 방씨일가의 장남 방영근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로 일본이 팔아먹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가 돌아오지 못하고 하와이에 주저앉게 되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조정래 특유의 질박하고도 걸쭉한 묘사에 주인공들의 걸걸한 사투리가 더해져 소설은 텁텁한 막걸리를 데워 마시는 것 같이 탁하면서도 진한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멕시코 애니깽(에니켄) 농장으로 팔려간 1032명의 이민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전에 이루어진 하와이 이민에서 혈기 방장한 남자들만을 내 보내 문제가 일어났던 것을 계기로 이번에는 가족 단위의 이민이 이루어 진다. 그리고 멕시코 이민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번 이루어진 노예 거래였고, 하여 그들은 하와이의 이민자들보다는 훨씬 빨리 훨씬 쉽게 잊혀진다.
같은 이민사의 이야기 이지만 아리랑과 달리 이 소설에서는 “일제강점”이라는 한국의 시대적 현실이 지워지고 없다. 물론, 고종의 사촌 이종도 일가의 몰락에서 한 왕가의 몰락이 읽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제강점으로 인한 몰락이라기보다는 권용준이라는 한 통역관의 농간에 의한 몰락이라고 보아야 한다.
작가는 한국을 떠나 멕시코에 정착한 이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기록해 나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도 김영하 특유의 위트와 냉소적 문체는 쉽게 벗어지지 못한다. 이 글에는 조정래의 글에서와 같은 질박하고 걸쭉한 묘사대신, 시원한 영화관에 앉아 땡볕이 내리 쬐는 영화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묘사들이 있다. 현실성이나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경쾌하면서도 섬세하고 세밀하다. 물에 빠진 자가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것을 작가 김영하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멕시코의 에니켄 아시엔다(애니깽 농장)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냉소적이고 위트있는 문체는 매혹적이고, 이 긴 이야기를 전혀 길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을 자신의 대표작품이라고 말하였다 하는데, 지금까지 그가 써 낸 소설중에서는 단연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