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2학년 겨울에,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을 독파했던 일이 있었다.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다, 이상문학상의 초기 스타일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딱히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뭐랄까, 일종의 소설 트랜드를 읽어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걸 바탕으로 레포트를 썼다가 이쁨 받았지, 울 샌님한테. ^^

무라카미 류는 내가 일본문학에 학을 띠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만약, 그의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즈(버려진 아이들의 반란으로 초판 번역됨)』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하루키나 바나나, 가오리, 에이미 등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무라카미 류는 나에게 엽기코드로 다가왔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애널 섹스의 개념조차 없을 때, 읽었던 코인로커 베이비즈는 며칠동안 잠을 못자게 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랬음에도 이 책을 읽었던 것은
1.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
2. 그의 데뷔작이자 자전적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놈은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두 가지 이유가 전부다. 그나마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한 건, 울 샌님의 강압에 의해서다. 움. 일본문학은 별로 맞지 않고, 나는 유미리도 싫다만, 또 시키는 건 잘한다.

얼마 전, 자주 가는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누가, 책을 처분하겠다는 글을 올린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처분 목록 중의 하나가 이 소설이었고, 처분 이유가 16살 된 늦둥이 동생이 자기 방에 들어와 이 책을 들춰 보는 걸 보고 얼른 치워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그 정도의 반응인가, 하는 호기심에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붉은 딱지는 한층 더 유혹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읽던 책을 던져놓고 읽었는데,

마약, 그룹섹스, 동성애, 약물중독, 난교파티……

16살 된 동생이 들춰 본다면 좀 심란해 지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소설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의 취향과는 전혀 반대되는 소설임에도.

소설의 주인공 류는 기지촌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저 이태원쯤 되려나.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 여자와 미군의 난교파티를 주선하고, 마약을 나눠주며, 아무런 미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게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딱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이, 이것이 굳이 나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눈앞에 주어진 일이고 막상 움직여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일 뿐.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약과 난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뭘 해야 겠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는 70년대 초중반 일본 사회의 상실감에 관한 소설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되고 싶은 것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지겨워 미치겠는 그 상실감이 이 소설만큼 확연하게 드러난 것도 드물 것 같다.

물론, 어린이날 읽기에는 좀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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