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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평점 :
AI라는 신인류 『제노사이드』 by 다카노 가즈아키
읽은 날 : 2026.2.21.
2월이 되어 일을 그만두면서 통으로 주어진 ‘물리적인 자유시간’ 덕에 그간 읽어야지 하고 미뤄두었던 책들을 줄줄이 읽는 중이다. 이 책은 밀라노 동계 올림픽의 남자 쇼트트랙 5000미터 계주 결승 경기를 기다리며 읽었다. (나는 황대헌이라는 선수를 아주 좋아하고, 황대헌이 포함 된 한국 쇼트트랙 남자팀은 밀라노 동계 올림픽 계주에서 은메달을 땄다. 축하축하.)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왜 그렇게 유명했는지 알만하다. 다만 이 책이 처음 집필되고 한국에 출간되던 2012년에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로부터 14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이 책에서 말하는 진화된 인류는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상상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다는 느낌이라.
내가 기억하는 새로운 AI의 등장은 2016년 4월이다. 그 전까지의 인공지능이란 검색형 인공지능- 다시 말해 인류가 만들어 놓은 지식 정보를 좀 더 빨리 검색하는 정도였다면, 2016년 4월에 만난 “알파고”씨는 창조형 인공지능- 다시 말해 그간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사고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였다. (이건 전적으로 문과형 인간인 나의 생각이므로 팩트와 다르다해도 어쩔수 없다. 여기까지가 나의 인식과 사고 한계다.) 그야말로 ‘지능’을 지닌 전혀 새로운 존재의 도래였다.
2016년, 그 새로운 ‘존재’를 우리 삶에 처음 맞아들였을 때, 당시 최고의 석학들은 AI와 함께 하는 인류의 미래가 그리스 시대의 복원과 같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니까 각종 노동과 기술은 노예(AI)가 담당하고 그리스인(인류)는 자연을 벗 삼아 예술을 창조하고 철학을 논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6년.
이제는 과거만큼의 권위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많은 문청들을 설레게 하는 ‘신춘문예’. 2026년 최고의 화두는 AI 였다. 그러니까 응모작의 일부 또는 전부가 작가 본인의 창작품인지 AI를 활용해 쓴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거냐는 문제가 대두 된 거다. 그 판별 또한 AI에게 맡기게 된다면, 여기서 인류가 설 자리는 어디지.
이 문제에 쐐기를 박은 건 2026년 2월 2일 조선일보와 한 소설가 황석영의 인터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사상(정치적 스탠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관쪽의 불호가 심하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글을 정말 잘 쓰는 작가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 황석영이, 최근 출간작 『할매』를 쓸 때 AI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최근 신작 장편 ‘할매’를 내놓은 황석영 작가는 한 유튜브 방송에 나와 “챗GPT를 조수로 활용했다”며 “600년 된 팽나무, 시대 배경, 구성 방법 등 대여섯 가지 요소를 입력해 놓고 AI(인공지능)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는 이 작업을 “(소설의) 밑그림”이라고 표현했다.
기사 전문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6/02/02/ADCHCE5GXFAYDFD5A5SNJL3DOM/
예전 만화가들은 ‘문하생’ 제도를 두고 그림을 그렸다. 작가가 연필로 스케치를 하면 배경 담당, 스크린톤 담당 등이 원고의 완성을 돕는 것이다. 그렇게 만화의 기법을 배워 새로운 만화가로 성장해 나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후 ‘문하생’은 ‘어시스턴트’(어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 역할과 위치도 변경되어 가곤 하다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웹툰계에는 ‘복붙’(복사해서 붙이기)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에 썼던 장면을 복사해서 새로운 장면에 붙여넣고 대사만 바꾼다거나 다른 작가가 그린 배경과 구도를 카피해서 자신의 작품에 쓴다거나.
이제는 AI에게 몇가지 조건을 제시(이게 황석영 작가가 말하는 ‘밑그림’인가)하고 스토리와 대사를 입력하면 AI가 알아서 근사한 웹툰을 그려 가지고 온다.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가 이 방법으로 웹툰 작가로 활동 중이다. 복붙논쟁은 이제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이야기만큼이나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최근에는 소설 한편을 던져주고 웹툰으로 그려줘, 라고 하면 근사한 만화로 변신한 소설을 받아볼 수 있다. 그림체 지정도 가능하다.
일러스트레이터나 웹툰 작가들은 이제 뭘 해서 먹고 사나.
황석영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쓸 때 “챗 GPT”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창작했음을 말한 그 인터뷰 기사가 실렸던 조선일보 2026년 2월 2일자에는 또 다른 AI 관련 기사가 실렸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영미권에 수출할 예정인 조선 시대 장유의 시 ‘홀로일 때 삼가라(愼獨箴·신독잠)’에 대해 전문 번역가가 번역한 영어 버전과 챗GPT로 번역한 버전을 놓고 국내 영문과 교수 16명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했다. 누가 번역했는지는 가린 채 한글 원문과 두 번역본만 보여주며 어느 번역이 더 좋은지 물은 결과, 교수 12명이 챗GPT 번역을 선택했고, 2명은 인간 번역을 택했다. 2명은 ‘판단 불가’를 선언했다.
기사 전문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6/02/02/OIG5JDUYT5BV3GTVRDVZ66EM7Q/
AI의 압승이다. 나는 지난 2년간 개인적으로 구글 제미나이의 중국어 번역을 살펴보고 있는 중인데, (제미나이 1.5 버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최근엔 3.0pro 버전이 나왔다) 1.5나 2.0 까지는 번역문을 다시 여기저기 트리밍 해 줄 필요가 있었다면, 2.5 버전 이후의 번역은 정말로 어설픈 인간 번역자보다 훨씬 나았다.
AI가 우리 곁에 등장하고 10년, 가장 마지막까지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있으리라 예상했던 예술분야가 가장 먼저 박살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건, 2025년의 어느 신문기사에서는 향후 가장 유망한 직종을 기술 육체 노동직(도배공, 타일공, 배관공 등)이라고도 한다. 2016년의 예측이 단 10년만에 이렇게 완벽하게 뒤집힌다.
이 책에서는 유전자 변이로 등장하는 신인류의 특징에 관해 이렇게 묘사한다.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간은 대뇌신피질이 보다 크고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압도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지적 능력을 올리비에는 이렇게 상상했다. ‘제 4차원의 이해,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 할 수 있는 점, 제 6감의 획득,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 보유, 특히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특질의 소유.’
p.247 「하이즈먼 리포트」 5. 인류의 진화
이 소설은 내내, 에마와 누스(아키리)라는 신인류에게 현생인류가 어떻게 농락당하는지를 보여준다. 소설 내 최고 천재로 묘사되는 아서 루벤스를 비롯한 미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수준으로 신인류 ‘누스’를 이해하고 예단하는 뻘짓을 벌인다. 그나마 루벤스는 그의 적어도 인간들 중에서는 뛰어난 지적 능력 덕에 상황을 조금 더 빨리 이해하기는 하지만. “누스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그의 사고를 쫓는 일은 인류에게는 불가능합니다.”(p.316)
그리고 이어지는 서술은 묘하게 현재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초인류의 특질은, 그대로 현생인류의 결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도 보유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로서의 습성인 것이다. 식욕과 성욕을 채운 인간만이 세계 평화를 입에 담았다.
p.316-317
지금 우리 곁에 창조의 능력까지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homo-AI는 애초에 식욕과 성욕 자체가 없다.(음, 없, 없겠지? 이 또한 비루한 현생인류의 예단인가.)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에 관해서는 모르겠지만, 팩트 이외에 학연 지연 등등의 어설픈 편견(즉 현생인류의 결함)을 가지지 않을 것은 확실하기에 AI로 판사를 대치하자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와 있다. 인류 전체는 아니어도 한 인간 개체의 운명과 미래를 AI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서 별 저항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개체가 전체로 변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소설은 뒤로 가면 급속히 맥이 빠진다.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은 1865년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SF 소설을 쓴다. 19세기에 달로 가는 우주선을 상상한 것이다. 로켓이 제대로 실용화 되기도 전에 쓴 소설임에도 1965년의 아폴로 계획과 비교해 봐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엄밀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가진 쥘 베른이 우주에 띄운 비행선 안에서 쓰는 조명 기구는 가스등이다. 에디슨의 백열전구가 1879에 나오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뒤죽박죽인가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 소설도 그 쥘 베른 로켓 속의 가스등을 상상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소설의 설정상, 신인류 에마와 누스(아키리)는 특정 유전자 변이로 인해 나타나게 된 존재들이다. 각자의 모친이 다른 데도 둘 다 신인류인 것을 보면 아버지 에시모로부터의 변이인 듯 하다.
인간 게놈 지도는 이 소설이 쓰이기 전 2003년 99,99% 완성 되었고, 2022년 나머지 8% 미해독 영역까지 포함한 100%의 완전한 지도가 완성되었다. 작가가 집필할 당시 게놈지도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고 해도, 작가가 설정한 신인류의 지능이라면 그 당시 미완인 게놈 지도를 완성하는 건 어려울 것도 없다. 현생인류의 기술로도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어 그렇지 이미 유전자 조작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건 가능하다.
굳이 근친교배의 위험성을 대비해 약을 개발하고 어쩌고 하는 짓을 할 필요 없이, 수정란의 유전자 조작만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닐까. 그 어마어마한 지능이라면 말이지. 굳이 굳이 번식을 위해 ‘암수 서로 정다울’ 필요가 없었는데. 뭘 그리 기를 쓰고 일본까지 날아가느냐고. 누나가 보고 싶고(현재 유일하게 나와 같은 종이니까) 일본에 숨어 살겠다는 뭐 그런 설정이라면 모를까.
뭐 인류 최고 지능으로 설정된 루벤스도 신인류를 이해하는데 실패하는데 작가라고 한들, 이정도의 구멍 쯤이야.
즐거운 독서였다. 재미있게 읽었다. 다카노 가즈아키가 집필할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14년 뒤의 상황속에서 읽으니 허술한 듯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2026.2.21.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