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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락방님 서재에서 한창훈의 <밤눈>에 관한 페이퍼를 봤다. 한창훈은 26회 이상문학상 후보작이었나 <눈보라콘>밖에 읽어본 게 없어서, 급 궁금해졌다. 책장을 뒤져 홍합을 꺼냈다.
난 한겨레 문학상 수상 작가들과 그 작품을 좋아한다. 심윤경이며 박민규며. 이 책도 그 맥락에서 산 책이었다. 제 3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여수 근처의 홍합 처리 공장을 배경으로 각각의 인물 에피소드를 옴니버스처럼 엮어나가는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중심 인물인 여인네들의 건강함이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고, 운동권 생활을 하다 고향인 여수로 낙향해 온 문기사(이름도 안나온다. 그냥 기사일을 하는 문씨), 늘 떠날 생각을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 그는 이곳에서 다시한번 살아보기로 한다. 그를 이곳에 붙잡는 것도 이곳 여인의 흐드러진 건강함이다.
이 소설에서는 상냥하고 잘 배우고 교양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안나온다. 남편에게 수시로 맞아 눈이 시퍼렇게 되어 공장에 나오는 여자들, 마누라를 돈벌이 시켜놓고 자기는 팽팽 놀며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는 남자들, 며느리가 들어오자 살림에서 손을 놔 버리고 놀러만 다니는 시어머니. 남편이 갑자기 급살을 해 버려 남편도 없는 시집에서 애 둘을 데리고 살고 있는 여자와 극심한 노동으로 잇몸이 다 헐어버린 여자. 들춰보면 들춰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사연인데도 이 소설은 그다지 슬프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유쾌하다.
맞아서 눈 주위가 퍼렇게 되어버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도 이야기는 여전히 웃기고, 일당보다 더 많은 돈을 선생에게 촌지로 찔러주고 와야했던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이야기는 여전히 웃기다. 일종의 페이소스이기는 하지만. 음담패설조차 야하지 않고 건강하게 바꿔버리는 그 흐드러진 중년 여인들의 건강함은 그대로 웃음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홍합공장에서 일하는 여인 8명의 사연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춰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 중 <다섯 색깔 동그라미> 챕터의 이야기는 배를 잡게 한다. 한 마을에서 오입질을 시도하는 한 여자, 그녀의 오입질은 단순하기 그지 없다. 길가던 동네 남자를 길에서 만나 뜬금없이, "저녁에 뒷산에서 좀 봅시다." 해 놓고는 남자가 진짜 뒷산으로 오면 거기서 그냥 옷을 벗고 뒹굴어 버리는 이야기. 그녀가 남편에게 외도를 들키는 과정은 어이없어서 웃음이 난다.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날 그녀는 달력에다 동그라미로 표시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달에 한두개였던 동그라미가 두세달이 지나자 컬러 싸인펜으로 여러가지 색깔이 등장해 날마다 동그라미의 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즉, 만나는 남자마다 색깔을 정해두고 동그라미를 한 것. 결국 그녀의 오입질은 들키고, 그녀의 남편 보다는 시동생들이 더 난리를 친다. 여기서 더 압권인 것은, 이 일이 덮여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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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동생들은 다시 내보내라고 성화였다. 사흘을 줄담배질로 보내던 금이 아빠는 드디어 결론을 내었다.
"느그 형수 내보내믄 느그들이 나 새 장가 보내줄래?"
그 소리에 동생들은 고개를 내두르며 채 식지 않은 구두를 다시 꿰신고 총총 돌아갔다.
동생들이 찾아오기 전에 금이 아빠가 금이네와 마주 앉아 결정을 본 바가 있어서 그랬다.
"왜 그랬능가. 왜 서방 놨두고 그랬어?"
"......"
"서방질을 할라믄 멀리 가서 하등가. 누구 하나 하고만 하등가."
"..."
"동생들이 자네 내보내라고 자꾸 하는 거 자네도 들었제? 워쩔랑가. 좀 있다가 또 온다네."
"......"
"속 터져 미치겄네. 아, 뭣이라고 말 좀 해봐."
"인자 안 할라요."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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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압권이지 않은가? 새 장가 못갈까봐 온 동네남자들과 오입질을 한 마누라를 그냥 내버려 두는 남편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인자 안 할라요." 이 한마디로 상황을 종결시켜 버리는 사건 당사자나.
그런데 한창훈의 힘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고보면 말도 안될것 같은 이런 상황이 한창훈의 소설을 읽다보면 지금도 어디선가 누구는 이러고 있을 것만같은 능청스러움이 있다.
이 사건의 주범인 금이네는 나중엔 한술 더 뜬다. 자신과 오입질을 한 남편을 둔 여인네들을 향해 일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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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했다 어쩔래. 서방이나 아니나 좆도 아닌 것들하고 사는 것들이. 야, 아싸리 말해서 쓸 만한 놈 하나도 읎드라."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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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 읽고 데굴데굴 굴렀다. 이쯤되면 약간 모자란 여인네인가 싶기도 했다.
알라딘에서 이 책을 농어촌 소설로 분류하는 모양이더라. 난 이런 소설이 참 좋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