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의 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자학의 시 2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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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관계인 친구가 하나 있다.  

이 친구는 의붓 이모가 있는데,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첫결혼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낳았고, 사별인지 이혼인지 한뒤 재혼에서 친구의 이모들을 낳았다.) 그렇다보니 친구와 이모의 관계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카와 미혼의 이모의 관계는 아니었단다.  

어린시절, 친구가 초등학교 입학 하기 전이었다는데 종종 외가에 맡겨지는 일이 있었다. 친구는 그럴 때면 7살 짜리가 용돈을 그러모아 뭔가를 사가지고 가서 이모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온 몸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줄 테니
대신 나를 사랑해 주세요. 

7살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애정의 거래다. 구걸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애정 그 자체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의 애정이 필요한거다. 지나가는 20대 젊은 여자 아무나가 아닌 바로 나의 이모, 내가 사랑하는 이모 당신의 애정이 필요했던거다. 그렇기에 그 아이의 손에 들린 건 가슴아플만큼 순정한 애정이다.  

사람은,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다. 그 어떤 일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 이라는 건 거짓이지만 "사랑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언제나 옳다. 도박, 무능, 무책임, 기만, 밥상을 엎어버리는 예의없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 이라고 말하는 건 자기 기만이지만, "내가 너를 " 사랑하니까 그런 일들도 괜찮다, 라고 말하는 건 자학이다. 이 단계를 또 다시 뛰어넘는 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내가 아니까, 괜찮다, 이거다. 이렇게 되면 이건 자학이 아니라 시가 된다. 

유키에와 이사오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건, 이사오의 사랑에 대한 유키에의 믿음이다. 당신이 과거의 나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따위의 보상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사오 당신은 유키에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신뢰다. 유키에의 인내와 노력엔 "대신 나를 사랑해 주세요." 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이미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사실, 타인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남편이 나를, 내가 남편을 사랑하듯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라는 믿음은 최고의 축복이고 행운이다. 그건 행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게 사람인데, 타인의 마음을 그렇게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테니까.  

상대의 애정에 신뢰가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구걸한다.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려주고, 숙제를 보여주면서 대신 나를 사랑해 달라고 주문을 외었던 유키에는, 이사오에게는 대신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이렇게 해 달라는 시험도 하지 않는다. 유키에에게는 이미 사랑의 증명이 필요없다. 알고 있으니까. 유키에가 원하는 것을 해 주어도 해 주지 않아도, 유키에에 대한 이사오의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아니까.  

그래서 그녀는 행복하다.  

앞으로도 이사오는 별반 달라질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유키에 역시 변함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행복이 뭐 별건가. 자기 마음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신뢰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게 했던 만화책. 사실 처음 읽었을 땐 이게 뭐야 싶었는데, 읽고 나서 덮은 뒤에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아. 이 책. 참 좋다.

ps. 리뷰를 쓰다말고 메신저에 접속해 있는 남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 내 사랑을 확신하고 신뢰해? 

이 뜬금없는 질문에, 이 남자 머뭇머뭇. 나를 사랑하냐는 질문도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냐는 질문이라니 당황했나보다. ㅎㅎㅎ 

그러게, 타인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신뢰를 하는 능력이 아무나한테 있는 능력은 아니라니까. 

그럼 나는? 그리고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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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학의 시', 2년만의 역자 후기
    from 세미콜론 공식 블로그 2010-08-24 10:42 
    모든 예술의 주요한 테마이긴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란 주제에 대해 고다 요시이에는 천착한다. 자학의 시에서는 날백수 건달 남편 이사오와 바보같이 답답해 보일 정도로 남편에 헌신하는 아내 유키에의 삶을 그리면서, 그리고 고다 철학당(한국에는 영화 '공기인형'의 원작으로 조금 알려졌을지도...), 속 자학의 시 : 로봇 코유키 등에서는 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