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father (Mass Market Paperback)
마리오 푸조 지음 / Signet / 1983년 9월
평점 :
품절


지난 달, 스크린에서 처음 보고 홀딱 반해서 책까지 집어들었다. 소설과 영화는 분명히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코폴라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콜레오네 가족사는 거의 책과 똑같다. 차이점이라면 마이클(영화에서는 알 파치노)의 비중이 꽤 크고, 책에서는 성공한 할리우드 배우들의 공허함이 어울리지 않게 꽤 비중있게 다뤄진다. 책은 전반적인 마피아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암흑가는 또 다른 사회고 사회가 정해준 법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왕국으로 묘사됐다. 콜레오네 가족 이야기가 중심이니까 매춘이나 마약, 도박으로 돈을 버는 '가족'보다는 콜레오네 가족의 운명을 대체로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용철 씨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삼성이 체제를 운영하는 방법과 몹시 흡사하다. 이건희도 돈 콜레오네의 팬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삼성이 인맥을 관리하는 기술은 마피아가 사용하는 기술과 똑같다. -.-: 

거의 4일 동안 479쪽이나 되는 책에 몰두할 수 있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하다. 우리말로 읽었다면 끝까지 다 못 읽었을 수도 있을 정도의 문체지만 영어라는 낯선 언어가 책을 끝까지 읽게 한 힘이기도 하다. 문학적이기 보다는 장면을 연상하게끔 생생한 묘사가 돋보인다. (대부분 암흑가의 속어들이지만;;) 플롯의 투박함이 외국어라도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작가가 이민2세라는 걸 볼 때, 미국적 사고방식의 극단이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다.  

법이든 돈이든, 사람들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는 논리다. 작가는 대체로 이런 논조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돈 콜레오네가 처음으로 살인을 할 때나 돈 콜레오네가 죽고 마이클이 뉴욕 함흑가의 '돈'(보스)가 되기 위해 여동생의 남편까지 살해할 때, 그 정당성을 독자에게 설득한다. 법은 타락해서 그들의 목숨을 지켜줄 수 없고 자신의 목숨을, 그리고 가족을 편안하게 살리기 위해 왜 살인하면 안 되는가, 하고. 제도권에서 억울함을 구제받지 못한 사람을 폭력이나 무력을 동원해 구제하는 게 뭐 나쁜가, 하고 역설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돈 콜레오네나 마이클은 모두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거부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아이러니아닌가.  

 "He(the Don) doesn't accept the rules of the society we live in because those rules would have conedemed him to a life not suitable to a man like himself, a man of extraordinarily force and character. What you have to understand is that he considers himself the equal of all those great men like Preseidents and Prime Ministers and Supreme Court Justices and Governors of the States. He refuses to love by rules set up by others, rules which condemn him to a defeated life. But his ultimate aim is to enter society wih a certain power since society doesn't really protect its members who do not have their own individual power. In the meantime he opertates on a code of ehtics he considers far superior to the legal sturctures of society."(p.390)

타타클리아 쪽에서 뇌물을 받고 뒤를 봐 주는 경찰(결국 마이클 콜레오네한테 살해당하지만)의 에피소드를 보면 경찰이 뇌물을 받는 게 뭐가 나쁜가, 한다. 그의 월급은 박봉이고 집 대출금과 아이들 대학학비를 충당할 수 없다. 박봉을 받는 경찰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지 말란 법있나, 하면서 경찰의 뇌물수수를 정당화한다. 그가 뇌물을 받는 이유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다. 국가나 사회는 가족을 돌보지 못한다. 가족을 돌보는 건 가장이 할 일이고 살인든 마피아의 끄나풀이든 가족만 편안하게 보살필 수 있다면 다 용서될 수 있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마이클의 운명이나 '돈'의 운명이나 운명은 하나고 그들은 그들의 운명에 따라 성실했다. 그들의 악행을 천사같은 아내들이 교회에 구원을 빈다. 과연 그 구원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돈의 아내가 마이클의 아내는, 구원을 믿고 싶어한다.   

영화와는 다르게 전반적인 관찰자 시점은, 돈의 양자고 고문 변호사인 탐 헤이건이다. 탐은 아이리쉬지만 다른 인물들처럼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그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지키는 인물이다. 배신을 할 수 있는 총명함을 갖춘 사람이 충성까지 갖출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우직하다.  

코폴라 감독은 마피아를 지나치게 미화한 걸 싫어했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영화가 장황한 소설보다 더 빼어난 점이 있다. 소설이 작가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지만 윤리적인 면이나 일반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적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작가의 이데올로기는 거부감이 없을 수 없다. 물론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현재 한국 회에서도 깊숙이 스며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인정하길 미루고 싶은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대부>란 영화나 소설이 부인할 수 없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사실을 마주하는 기분이란...쾌감도 있고 불쾌감도 있다.  

아무튼 즐거운 나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 리본 - The White Ribb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하네케 감독은 영화란 매체를 통해서 철학적 탐구를 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간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마주보게 한다. 외면하고 싶은 잔인성이나 폭력이 어떤 얼굴 아래서 일어나는지 물고늘어진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선의와 문명이란 근사한 외투를 걸치고 등장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문명인은 폭력의 실체를 못 본 채 인간의 본성을 폭력으로 물들인다.  

이 영화 역시 이런 담론의 연장선에 있다.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뭘까. 문명은 야만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 힘이 아이한테는 어른일 거고 약자한테는 강자일 거다. 야만이라고 이름붙인 아이와 약자의 순진한 무지 모두 문명의 적이고 계몽해야할 대상이다. 계몽의 종착지는 순종이다. 억압을 통해서든 타협을 통해서든 순종은 문명이 성취해야할 결과인데 순진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보여주는 영화다.  

19세기 초 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한 마을에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다. 의사의 낙마, 소작농 아내의 죽음, 지주 아들에게 벌어진 구타, 마을 제제소에 난 불, 모두 범인을 알 수 없다. 사건은 사건이고 각 가정에는 아이들이 자라고 집안의 아버지들은 각각 아이들을 자기식대로 교육한다. 아버지란 존재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집안에서 절대권력이고 법이다. 아이들은 잘못에 대해 때때로 벌을 받는다. 겉으로는 아이들의 승인하에서 아버지의 벌이 집행되지만 아이들 마음 속에는 무언의 공포심이 자리잡고 절대 권력에 대한 의심이 싹트는 중에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란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정신적 폭력을 당하면서 아이들의 성장 세포는 폭력을 휘두르는 교묘한 수법을 하나씩 하나씩 이식한다. 자신의 신념 기준과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한테는,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아이들은 폭력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교활해진다. 그들의 부모가 그러는 것처럼 응징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다치게하고 응징해서 공포심을 유발해서 복종을 받아내는 어른으로 커 가고 있다. 문명이나  어른이 원했던 건 그저 복종이고 폭력을 가르친 줄 몰랐다. 폭력은 순환될 것이고 악은 창궐할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의 복수만이 아니라 나라 대 나라의 복수심이 전쟁을 불러오고 순진한 개인은 야만으로 분류되며 착취당한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하네케 감독은, 너무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간다. 흑백의 농도와 정지된 프레임들은 계속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폭력적 장면 조차도 한 폭의 그림같은 구도와 빛을 사용한다. 마을 사람들 중 학교 선생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이야기의 긴박함과 무심하게 자연은 아찔하게 아름답다. 화면 가득한 수확 직전의 밀밭, 음침한 사건을 안에 담고 있는 견고한 벽돌집들. 청교도적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사람들의 옷차림새와 머리모양이 모두 차갑고 그 차가운 악의 근원을, 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골고루 비춘다. 폭력도 볕처럼 골고루 비칠 걸 암시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러 인사이드 미 - The Killer Inside M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코패스이야기인데 감독이 마이클 윈터바텀이라서 주저없이 봤다. 검색을 좀 했더니만 섹슈얼 스릴러, 제시카 알바 노출, 이런 게 핵심어로 나와있다. 이게 왜 19금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제세카 알바의 몸을 훔쳐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할거다. 제시카 알바의 팬이라면 제시카 알바의 청순미(?)에 기뻐할 것이다. 인조인간 같은 제시카 알바가 이 영화에서는 덜 인조 인간 같고 심지어는 청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스릴러를 기대한다면, 욕하면서 나올 것이다. 한국영화처럼 사이코패스의 궤적을 관객들한테는 다 알려주고 영화 속 인물들만 모른다. 이렇게 김빠진 것도 스릴러라고 할 수 있나. 그렇다고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다루지도 않았다. 감독은 사이코패스의 행동을 그저 감감적으로 스크린에  옮겼다. 오프닝에서 "fever"란 노래가 사운드트랙으로 깔리기 시작하면서 영화 내내 살인의 순간이나 동요의 순간을 흥겨우면서도 좀 끈끈한 노래들이 계속 흐른다. 사운드트랙에 깔리는 노랫말들이 미친 행동을 에둘러말하는데, 세상에나 이런 중요한 노랫말들이 자막처리가 하나도 안 됐다.

가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전혀 알 수 없고, 귀 기울여도 비트 강한 노랫말의 한계는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전적으로 지원하진 못한다. 감독이 배치한 미장센들은 살인에 대한 사이코패스의 태도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잔인함은 정에 이끌리지 않고 탁구공처럼 가볍게 떠올라 통통 바닥을 굴러다닌다. 잡으려고 하면 바람에 날려가는 것처럼 가볍기만 하다. 보안관이고 마을 사람들한테 선한 사람으로 통하는 루는 섹스를 할 때도 사람을 죽일 때도 하얀 셔츠를 입고, 단정한 크루 컷을 하고 있다.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가끔 피아노로 치고 거짓말은 일상이다. 사람들은 그의 악마적 면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의 연기에 알고도 속는다.   

아쉽게도 스타일만 살아있는 영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인에게 생긴 일
채영주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생긴 버릇은, 책을 끝까지 다 안 읽고 리뷰를 쓴다. 뭐, (대체로) 혼자 끄적이고 혼자 보는 거라 별 큰 차이는 없지만 완독에 대한 의지가 희미한 데 대한 화가 난다고나, 할까.-.-; 

소설은, 인문학 책들이 옳은 말만을 줄줄이 쏟아내는 만큼 무기력하다. 꿉꿉해서 창문을 열고 바람을 청하기 보다는 전기를 잡아먹고 시치미떼는 에어컨의 인공적 상쾌함이 땡길 때, 소설은 사계절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해보인다. 소설 속의 비극이나 희극에 울고 웃는 게 에어컨이 내보내는 일시적 쾌적함에 굴복하는 것처럼 수치스럽고 절망적이다. 채영주의 소설집을 두 권 째 접하면서 갖게 되는 삐딱함이다.  

과연 한낱 허구의(현실을 파편화해서 재구성했을지라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지 삶이 될 수 없다. 진짜 삶은, 꿉꿉함을 온몸으로 느끼기며 내 몸에 내 손이 닿았을 때조차 싫은 걸 참아내야한다. 소설은, 타자의 꿉꿉함은 물론이고 내 꿉꿉함도 일종의 관조와 관음으로 즐길 수 있는데 오늘은, 날씨 때문인지 저조한 내 바이오 리듬 때문인지 관음과 관조가 즐거움이 아니라 혐오스럽다. 이번 주말에 극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지 못한 채 시간을 일에 고스란히 바친 화풀이쯤 되겠다.  

단편 속 주인공들은, 나른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인물들이다. 익숙하면서도 화딱지가 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생각말고 행동하는 인물들은 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매력이 없나. 행동하는 주인공들은 추리소설이나 줄거리 중심의 소설에 등장하는데 나는 왜 이런 류의 소설에는 손을 안 대나. 일상의 복제품 같은 글을 나는 왜 읽고 있나. 이런 불만으로 가득 차서 나는 왜 책을 읽나..로 꼬리를 물고 잡념을 펼쳐놓는다.  

이게 다 장마 때문이다. 머리칼이 볼에 스칠 때마다 습하고 무언가에 휘둘리는 기분이..채영주 단편들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감각이다. 이런 불쾌한 느낌을 책을 덮고 털어버릴까, 아니면 불쾌해도 끝까지 겪어야할까...시답잖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중인격 - 인간의 고뇌와 심층심리의 탐구를 시도한 작품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형규 옮김 / 누멘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난 좀 지루해하는 편인데 한 후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담고 있어서 좋다고 했다. 가령, <걸어도 걸어도>에서 잔잔한 대화가 이어지다 문득 욕실문을 열고 들어간 아들(가물가물;;)의 시선으로 본 타일이 클로즈 업된다.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파생되는 걸 난 캐내려고 분주하게 시각과 게으른 뇌세포를 채찍질하지만 결국 소득없이 무너지고 결국 눈을 꿈뻑이다 가끔  하품을 한다. 반면 후배는 사람의 행동은 비논리적인이서 문득 자신도 알 수 없는 걸 응시할 때가 종종 있어서 이런 타일 씬이 인간사와 닮아있어서 너무 좋다고 한다. <이중인격>은 이런 맥락에 있다. 억압된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충돌을 겪으면서 사회적 자아는 억압된 자아를 파렴치라고 여기면서도 내심 부러워한다. 내 이성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억압된 자아는 버젓이 하고 즐기기까지 한다. 이성적 자아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럴 때, 가져야할 태도는 뭘까. 정답은 물론 없고 개체의 특성이니 인간사는 재밌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이 번역되서 나왔다는 알림 메일이 왔고 제목은 아주 흥미로웠다. 누멘이란 출판사는 처음 듣는데 책 날개에 출간한 시리즈 목록을 보면 영성 및 신비주의 신서..뭐 이런 카테고리로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느낌은 참 묘했다. 아무튼 245페이지 밖에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장편들만큼 읽기 만만치 않았다.

골랴드킨이란 인물이 내면의 자아와 대화하는, 환상 소설같기도 하고 또 괴기 소설 같기도 하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주인공의 환상인지 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한 상태로 진행된다. 9등관인 주인공은 실제로는 소심하지만 주인공의 세포분열로 나타난 클론은 아주 사교적이고 교활하기도 하며 변덕스럽다. 세포복제를 제공한 원본은, 그 자체로 들뜨고 비이성적 인물이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충동적인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 복제 인간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마음껏 비난하고 비웃고 싶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