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리본 - The White Ribb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하네케 감독은 영화란 매체를 통해서 철학적 탐구를 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간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마주보게 한다. 외면하고 싶은 잔인성이나 폭력이 어떤 얼굴 아래서 일어나는지 물고늘어진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선의와 문명이란 근사한 외투를 걸치고 등장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문명인은 폭력의 실체를 못 본 채 인간의 본성을 폭력으로 물들인다.  

이 영화 역시 이런 담론의 연장선에 있다.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뭘까. 문명은 야만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 힘이 아이한테는 어른일 거고 약자한테는 강자일 거다. 야만이라고 이름붙인 아이와 약자의 순진한 무지 모두 문명의 적이고 계몽해야할 대상이다. 계몽의 종착지는 순종이다. 억압을 통해서든 타협을 통해서든 순종은 문명이 성취해야할 결과인데 순진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보여주는 영화다.  

19세기 초 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한 마을에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다. 의사의 낙마, 소작농 아내의 죽음, 지주 아들에게 벌어진 구타, 마을 제제소에 난 불, 모두 범인을 알 수 없다. 사건은 사건이고 각 가정에는 아이들이 자라고 집안의 아버지들은 각각 아이들을 자기식대로 교육한다. 아버지란 존재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집안에서 절대권력이고 법이다. 아이들은 잘못에 대해 때때로 벌을 받는다. 겉으로는 아이들의 승인하에서 아버지의 벌이 집행되지만 아이들 마음 속에는 무언의 공포심이 자리잡고 절대 권력에 대한 의심이 싹트는 중에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란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정신적 폭력을 당하면서 아이들의 성장 세포는 폭력을 휘두르는 교묘한 수법을 하나씩 하나씩 이식한다. 자신의 신념 기준과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한테는,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아이들은 폭력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교활해진다. 그들의 부모가 그러는 것처럼 응징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다치게하고 응징해서 공포심을 유발해서 복종을 받아내는 어른으로 커 가고 있다. 문명이나  어른이 원했던 건 그저 복종이고 폭력을 가르친 줄 몰랐다. 폭력은 순환될 것이고 악은 창궐할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의 복수만이 아니라 나라 대 나라의 복수심이 전쟁을 불러오고 순진한 개인은 야만으로 분류되며 착취당한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하네케 감독은, 너무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간다. 흑백의 농도와 정지된 프레임들은 계속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폭력적 장면 조차도 한 폭의 그림같은 구도와 빛을 사용한다. 마을 사람들 중 학교 선생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이야기의 긴박함과 무심하게 자연은 아찔하게 아름답다. 화면 가득한 수확 직전의 밀밭, 음침한 사건을 안에 담고 있는 견고한 벽돌집들. 청교도적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사람들의 옷차림새와 머리모양이 모두 차갑고 그 차가운 악의 근원을, 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골고루 비춘다. 폭력도 볕처럼 골고루 비칠 걸 암시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