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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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래 전에 사 두었다가 밀쳐놨다. 얼마 전, 은희경이 추천한 말-낯선 언어로 낯선 곳을 여행하는 느낌-을 보고 다시 집어들었으나 다 못 읽었다. 아니, 다 못 읽겠다. 공쿠르상 수상작이란다. 알았더라면 은희경이 추천했어도 안 집어들었을 거다. 확실히 낯설다. 익숙한 문장구조가 아니고 뭘 말하려고 하는지도 인내심있게 책장을 반 이상 넘겨야 알 수 있다.  

메모나 신문 스크랩같은, 밑도 끝도 없는 조각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뭐 어쩌라구..하는 말이 튀어 나온다.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을 파리 한복판 길을 걸으며 진행된다. 잘 느껴보려고 뇌 저장고에서 파리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동원했어도 글을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서울을 방문했던 외국인이 종로의 피맛골이나 낙원상가길을 떠올리며 어떤 분위기였는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번역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는 요상한 번역도 정신을 분산시키는데 한 몫한다.  

그만 투덜거리고,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 반면 소설은, 꺼리고 심지어 저주하는 편이다. 현대 소설들은 더더욱 집어들기 무섭다. 르 클레지오의 <조서>랑 같은 맥락에 있는 소설이다. 문득 프랑스인들은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는 걸까. 배경 속에 스며든 개인을 참을 수 없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소설이 배경에 스며든 개인의 비애를 주로 다룬다면-아니 내가 주로 좋아하는 한국 소설이-프랑스 소설은 한국 소설에서 종종 존재하는 이런 존재를 참을 수 없어한다. 현실을 암호처럼 해체해 버린다. 개인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현실이란 배경은 일종의 무의미한 파편일 뿐이다. 두 소설 끝까지 안 읽어서 결국 자아 정체성을 찾았는지, 찾아서 현실과 어떤 대칭점을 이루는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은 아주 하품이 난다. 당일 배송 서비스를 모든 싸이트가 자랑하며 스마트폰에 바코드만 갖다대도 접근 가능한 모든 정보를 - 어디다 써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있는 빛의 속도와 경쟁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독자한테, 돌아돌아 자기 얘기를 하는 소설은 비호감이다. -,.- 

뒤집어보면, 빛의 속도라는 게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하고 찾아 볼 기회조차 박탈하는 수단이다. 성찰하는 법을 잊은 나라에 사는 독자에게 성찰하는 이야기가 다가올  수 없는 게 당연하고, 알고보면 슬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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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무샤 - Shadow Warrio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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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다케다 신겐이 죽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와 비슷한 무사가 그림자 무사(카게무샤) 선발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건 녹록치않고 별 소득이 없어 보인다. 신겐 그림자 무사는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곧 체념하고 나중에는 신겐 노릇을 즐기며 자신과 신겐의 정체성을 혼동한다.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버리라고 해서 버렸는데 타인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그림자 무사는 원본의 시뮬라크르니 원본이 없으면 소용없다. 사람들은 원본의 죽음을 선포하고 시뮬라크르는 해체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는 다케다 가문 주위를 배회하며 아무도 안 알아주지만 전쟁터에도 함께 간다. 그의 내적 처절함은 전쟁만큼이나 치열하다.  

2. 굉장히 독특한 화면구성이다. 익숙하고 안정된 프레임이 아니라 사람을 위쪽에 배치하거나 아래쪽에 배치하고 3분의 2이상이 땅이나 바다같은 여백으로 표현된다. 집중받아야할 피사체의 위치가 중앙에서 벗어나면서 프레임 밖까지 무언가가 연장되어 있을거라는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특히 전투씬에서 많이 보이는데 블록버스터란 큰 규모라는 등식을 뒤집는 화면분할이다.  

1-1.그림자 무사처럼 원하든 원치않든 다른 사람의 생을 거짓으로 살기 시작했어도 다시 원래의 위치로 오는 게 정말 힘들까? 사람은 관성의 지배를 받기 마련인데 심리와 관성이 만나 어떤 함수 관계가 만들어낸 물리적 힘이 클수록, 사람은 행복할까, 불행할까.. 

2-1. 나중에 기회닿으면 꼭 스크린으로 보고 싶은 영화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단지 시대극을 주로 만들며 우리로 치면 임권택 감독 쯤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이건 뭘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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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 - Hear m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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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테이킹 우드스탁>을 보러갈까..<잔다르크의 재판>을 보러갈까..망설이다가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결국, 다운 받아뒀던 <청설>과 <카게무샤>를 모니터로 봤다.-.-; 

별 기대없이 봤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고 상큼한 로맨틱 코미디였고 더불어 대만의 풍경들에 혹해서 다음엔 대만에 가야지, 하고 결심했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사랑은 이루어지는 해피엔딩이 오늘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랑과 꿈은 위대하다"라는 진부한 구절에도 암, 그렇지, 했다.  

거의 꼬박 다섯 시간을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노동(?)을 한 터라 저녁에는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뮤즈를 동반자 삼아 비온 뒤 하늘에 남아 있는 구름의 흔적들과 잡초와 이름모를 꽃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정돈된 길을 걸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중년의 부부처럼 보이는 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는 뮤즈의 목소리를 벗으로 삼았지만 눈은 커플들을 지나쳤다. 낮에 본 <청설>에서 보여준 해피엔딩이 내게만 빼고 모두에게 찾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했다. 강물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일어났다. 여의도 쪽에는 구름 속에서도 노을이 붉은 빛을 비치고 있었다.  

쓰다보니 영화 리뷰가 아니게 돼 버렸는데..<청설>이 좋았던 건 만화같은 진공상태 때문이었고 저녁 무렵 산책은, 일상과 분리되어 만화같은 진공상태였다. 쓸쓸하지만 절대적 평온이 존재하는 그런 저녁나절. 산책로에서 나는 <인셉션>의 코브처럼 잠시 꿈을 꿨고 집에 돌아와 샤워로 꿈을 깼다. 사랑의 위대함은 몰라도 적어도 꿈의 위대함은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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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 Incep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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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는 간단하다. 꿈을 연구 혹은 조작하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역시나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꿈을 실험하는 도중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무의식의 영역인 꿈에 도전했다가 치룬 대가다.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를 드나들다 결국 그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된다. 현실에서 그는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의 무의식을 조종하는 거다. 아주 진부한 트라우마를 꿈에서 꿈을 꿀 수 있는, 존 파울즈가 소설을 쓰는 방법을 차용해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알고보면 진부한데 포장이라는 게 사람을 혹하게 하는 면이 있어서 꽤 그럴듯하게 보게 한다.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아도 무의식을, 비록 스크린일지라도 조종하는 걸 지켜보면 꽤 흥미롭다. 실제로 꿈 혹은 무의식의 영역을 기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추진력이 돼서 꿈을 조작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중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음악과 함께 깨어나고 깨어나면 꿈을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과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전개된다.  

꿈 속에서 또 꿈을 꿀 수 있고 꿈을 공유할 수 있다. 꿈은 아주 사적인 영역이다. 꿈의 주체만이 볼 수 있는 영역이고 타인의 의식이나 개입이 불가능한데 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사적인 꿈의 영역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면..? 영화는 액션 어드벤쳐로서의 기능을 하느라 총질 뿐 아니라 기타 등등의 의미없는 슬랩스틱한 행위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 꿈, 그러니까 내 무의식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일단 내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뭐 캥기는 거 없나, 살펴보고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의 싹이 올라온다. 현실도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할 것 투성인데 무의식까지 누군가를 의식해서 규제를 해야한다면 참 재미없을 거 같다.  

 

2. 시각적으로는 아주 경쾌한 영화다. 파리의 한 노천 카페에 앉아 있는 주인공들 옆으로 팝콘처럼 부풀어 터지는 고풍스런 건물의 잔해들. 고풍스런 건물들이 하늘을 이루고 측면을 이루는 장면은, 단순한 액션 영화라고 분류하기에는 많이 섬세하다.  

오프닝과 앤딩에서 양괄식으로 보여주는 교토의 니조성 실내는 특히 반갑다. 감독이 의도한 건 물론 니조성 실내를 보여주는 게 아니었을텐데 봄에 니조성에 갔다와서 아직 니조성의 톡특한 아우라를 기억하고 있는 내겐 양괄식의 의도가 다 부질없어 보인다.ㅋ

3. 크리스퍼 놀란 감독의 연출 기법은, 일종의 고풍스러움이 배여있다. 단순한 액션영화로 분류하기에는 안 어울리는 그 어떤 것이 있다. 진부한 주제를 참신한 소재로 풀어가는 것-문학으로 치자면 문체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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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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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의 영화는 명쾌하고 젠체하지 않고 직설적이지만 늘 흥미롭다. 선과 악, 혹은 정의와 불의에 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드러난 정의는, 제도권은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바람이나 판타지가 담겨있다. 이런 판타지는 영화에 그대로 드러나서 마초 근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강우석 감독이 내세우는 영웅들이 현실과 괴리가 있는데 마초적 기질이 슬프게도, 사실성 부재를 채우고 있다.  

<이끼> 역시 전작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정의를 집행하기로 약속된 공권력이 등장한다. 전직 형사와 현직 검사. 전직 형사는 부패를 택하고 현직 검사는 정의를 택한다. 죄 지은 자를 회개시키며 구원을 받았다고 믿게 만드는 말빨을 지닌 종교인 등장한다. 기도원장과 기도원의 선생으로 불리는 정의의 사도는 두 얼굴로 등장을 한다. 세속적 관심을 초월한 기도원 지도자가 과연 현실에 밀착한 죄 지은 양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속세의 인간들은 죄를 짓고 죄를 잊기를 원하지 죄를 기억하면서 가시밭길을 가길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원하는 건 면죄부지 죄에 대한 기억과 참회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류목형 선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당이 아닌 교회 건물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상징성을 믿기보다는 교회가 보장해주는 자신의 사소한 편안함을 더 믿는다.  그러니 두 무정부주의자인 전직 형사와 교회 십자가 같은 사람이 제도권이 제공하지 못하는 갱생이 가능한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건 백일몽이다.  

무정부주의자는 규제를 피하거나 이용해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할 꿈을 꾸고 영혼이 하늘에 가 있는 사람 역시 아담과 이브가 살았을 법한 낙원을 꿈꾸니 사람들이 원하게 아닌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꿈은 같다. 영지(유선)의 말을 통해 두 무정부주의자의 간극이 드러난다. "유생님은 구원을 해줬지만 이장님은 복수를 해줬죠." 복수와 구원은 <이끼>의 핵심이고(원작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강우석 감독의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테마다.   

이 영화가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스릴러의 관점보다는 감독이 다루는 정의에 대한 태도에 난 더 관심이 간다. 원작을 안 읽었지만 원작은 원작이고 영화는 영화다.

덧. 이 영화들은 캐릭터들의 상찬이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다들 한 연기와 개성하니시 짧은 시간에 깊이를 전달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주연, 조연들 모두 살아서 파닥이는 물고기들같다. 물에서 나와 파닥거릴 때마다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인물들. 인물들이 모두 살아있어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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