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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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서전을 읽는 데는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한다. 융에 대한 애정이 있나, 하면 그렇진 않다. 그래서일까 아주 지루해서 읽다가 말았다. 스물 두어살 무렵 프로이트와 융을 읽으면서 수첩에 그들처럼 꿈을 기록했지만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꿈을 기록한 게 멋져보였던 거 같다. 프로이트를 읽으면서 가지 없는 나무들이 많이 서 있는 비탈을 많이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모두 성적으로 관련시킨 프로이트의 해석을 읽으면서 내 내면에도 호색가의 기질이 있는가, 하면서 부끄러워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맹한 짓이었는데. 

융 역시 꿈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다고 얘기하면 무덤 속에서 융이 벌떡 일어나 소리칠 거 같다. 고결한 무의식의 세계를 그렇게 밖에 말 못하냐고. 이 책이 지루한 이유는 바로 이거다. 융은 무의식을 탐구하느라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는 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실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단서를 찾느라 무의식에서 산책을 하는데 융 자신은 즐겁겠지만 무의식, 그것도 남의 무의식을 함께 거니는 건 인내심을 많이 필요로한다. 꿈이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지극히 말도 안 되는 일련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들을 찾는데 미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프로이트와의 관계였다. 융은 프로이트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은 것처럼 비춰지고 싶어했지만 그의 무의식은 프로이트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융을 라이벌로 보았고(융의 표현 속에서 드러난다) 융은 프로이트의 그런 제스처를 못마땅해한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한 노파다. 다리가 아팠던 이 여인은 얘기를 하다가 말짱하게 걸어나갔다고 한다. 융은 정확한 원인을 몰랐지만 여인은 자신이 아팠던 이유를 말하다 알았던 거다. 심리학이 왜 말하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지 말해준다. 실제로 말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걸 발견하고 치유가 되는 과정이다. 굳이 전문가한테가 아니어도 퇴근후 집에 바로 안 가고 술집이나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행위는, 우리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우리만의 방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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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 Welcom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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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책도 건성으로 본 지 어언 한 달도 넘은 거 같다. 토요일 오후에 교보는 아비규환같아서 나갈 생각을 하니까 끔찍해서 월요일 오후로 미뤄두고 집에 주저앉아서 쓸데없는 짓만 하다가 본 영화다. 별 기대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면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싶은 욕구를 일깨우는 영화다.  

이라크 출신의 쿠르드 족인 비랄이란 열일곱 청년의 짧은 생을 통해 많은 걸 말한다. 영국해협을 건너기 위해 칼레까지 삼개월동안 걸어왔지만 결국 영국해협을 건너지 못한 채 칼레에 불법체류자로 남게 된다. 바다만 건너면 되는데....결국 그는 수영해서 건널 생각을 하고 칼레시 수영장에 강습을 받으러다니다 수영교사와 우정이 싹튼다.  

사람이 한 사람을 의심하는 단계에서 신뢰하는 단계로 이동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데 똑같은 값을 지불해도 불법체류자란 딱지는 테레리스트와 비슷한 레벨의 위험 경보를 울린다. 물론 그 위험 경보는 보는 사람이 매긴 경보 수위일 뿐이다. 수영교사인 시몽은 처음에 비랄을 위험한 불법체류자로 봤지만 곧 그의 비밀을 안다. 영국해협을 건너려는 그의 유일한 동기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랄의 아버지뻘인 시몽은 청년의 순수한 패기에 반한다. 아내를 사랑하면서 잡지 못하고 이혼서류에 서명을 한 시몽은 인생이 즐거울 리 없다. 집에 돌아와도 텔레비전 리모콘이나 돌리고 있고 냉장고에서 맥주나 꺼내 홀짝인다.  

시몽이 왜 아내를 잡지 못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갈 동기를 갖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서도 관찰자 같았던 그가 비랄의 순수한 충동에 지지를 보내는 게 완전완전 이해가 갈 뿐 아니라 공감 백만배다.  

여자친구를 만나려는 비랄은 꿈을 결국 이루지 못한채 죽는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프랑스의 차가운 시선은 미국이 불특정 다수를 테러리스트로 모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시몽은 비랄 대신 영국으로 가서 비랄의 여자친구를 만난다. 비랄은 죽었지만 시몽한테 삶에 대한 태도를 선물하고 갔다. 시몽이 비랄처럼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몽은 비랄의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비랄의 육체적 죽음은 시몽한테 정신적으로 강렬한 현존으로 남아있을테니. 

한해가 또 다 가고 있어도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 얼굴보기가 쉽지 않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사람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 (나를 포함해서) 에 익숙해진다.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더 삭막하다. 무서운 건 육체적 부재가 아니라 정신적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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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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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가 갖는 아우라 때문인지 정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을 뒤늦게 읽었다.  

학제에서 우리의 사고 패턴은 이렇다.  

다음 중 칸트의 도덕철학과 관련 있는 것은? 

1. 지하철에서 앉아있는데 내 앞에 할머니가 와서 서 있었다. 피곤했지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리를 양보했다. 

2. 자살하고 싶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나는 상대적 행복감을 느꼈다.  

3. 동생이 산에 갔다가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알려야하지만 충격받을까봐 알리는 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4. 심장병에 걸린 딸을 둔 아버지가 딸의 수술비 때문에 자신의 콩팥 하나를 팔았다.  

답은, 없다. 이런 문제를 출제한다면 출제자는 대국민 사과와 함께 사임해야한다. 답이 없는 문제를 내다니 자질까지 문제가 될 것이다. 언뜻 보기에 모두 선행으로 보이는 일들이 왜 칸트의 목적론에 안 맞는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칸트가 한 말의 요점이다. 요점만이 시험에 나오니까. 요점 중심 사고에서 샌덜의 화법은 갈짓자다. 샌덜의 요점은(아, 난 한국식 교육 틀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고민하는 삶이다. 공공의 선이란 기준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으니까 무엇이 최선일까를 늘 고민하라고 한다.

한 기업 회장이 C대학을 인수해서 대학을 기업처럼 경영하고 있다. 수익성이 있는 학과와 과목 중심으로 통폐합이 되고 취직과 직결되지 않는 교양과목은 이미 폐지했다고 한다. 막상 취직하고 난 후 조직에서 자존감을 갖도록 도와주는 과목들은, 취직에 도움이 안 되는 교양과목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가 쏠리는 일만이 아니라 하찮은 일도 의미 있을 수 있으니 그럭저럭한 삶도 의미있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기능만을 익힌다면 왜 대학엘 다녀야하나..... 

하버드 교수가 쓴 책을 소유한다고 해서 하버드생의 지성에 다가갈 수 없으며 미셀 오바마와 똑같은 향수를 쓴다고 해서 미셀 오바마의 지성을 얻는 게 아니다. 하버드생의 지성의 실체를 고민한다면 하버드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아도 칸트적 지성으로 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책과 향수를 소유하고 강의 동영상을 소유하는 것 만큼 쉽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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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 The Beaches of Agnè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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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할머니(이 영화를 보고 났더니 이렇게 부르고 싶어졌다) 영화는 <방랑자>로 처음 접했다. 상드린 보네르의 표정은, 영화 내내, 불만이 가득했다. 역동적이면서도 저항적이어서 할머니의 영화들을 여성주의 영화겠거니 편견을 갖게 됐다. 근데 요즘 아녜스 할머니 영화를 보니까 내 생각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편견이라는 게 증명된다.

이 영화는 아녜스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다. <낭트의 자코>에서 남편 자크 드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오프닝은, 바람이 몹시 부는 해변에서 거울 여러 개를 아무렇게나처럼 보이지만 실은 거울이 또 다른 거울 속 이미지를 잡을 수 있게 배치하느라 분주하다. 구부정한 등을 하고 스탭들한테 활기차게 여러 가지를 지시한다. 작업 과정을 보면서 집중력과 힘에 놀랄 수 밖에 없다.  

조곤존곤 과거를 회상하는데 꼭 옛날 이야기를 듣는 거 같다. 대학을 다니다 문득 마르세이유로 떠나 고기잡이 뱃일을 3개월 할 정도로 의지력과 강단이 있고 설치 미술 전시회를 하면서 공연을 할 때, 천진한 표정은 오래 잔상이 남는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 글로는 부족해서 영화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할머니...머릿속 상상을 재현하는데 불가능은 없다고 믿는 것 처럼 보인다. 상상이 수정을 거쳐 어떤 물리적 결과로 나와서 몇 십년이 흘러도 그 기분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할머니의 재능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더불어 할머니의 동료는 고다르, 크리스 마르께 등 쟁쟁한 감독들의 여담도 보너스로 들을 수 있다.   

마지막에 "영화는 집이고 나는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할머니의 집도 할머니도 더 이상 안 늙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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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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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푸앵트 쿠르트란 작은 어촌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한 영화인데 구성이 독특한다. 

두 편의 영화를 따로 찍어서 한 영화로 편집해 놓은 것 같다. 한 편은 어촌 마을의 일상을 다루었다. 허름하고 위생상태가 엉망인 어촌에서도 생명이 얼마나 생동감있게 파닥거리는지. 변변한 침대도 없는 좁은 집에 눈이 말똥말똥한 아이들, 이팔청춘의 남녀는 서로 자석처럼 끌린다. 프랑스 남부의 활기와 번잡함이 생에 대한 강한 파장을 일으킨다.  

촬영방식은 영화내용보다 더 감동적이다. 카메라가 뒤에서 쭈욱 앞으로 들어가거나 뒤로 빠진다. 인물은 종종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고 사람이 빠진 자리에 고양이, 또는 바람의 흔적을 알리는 물건들, 햇볕과 볕이 만든 그림자가 프레임을 채운다. 마치 여행 스냅사진 같다. 사진을 전공한 바르다가 만든 첫 장편영화라고 하는데 바르다가 카메라를 다루는 방식은 아주 매혹적이다. 마을의 일상도 다큐멘터리같은 느낌이 난다.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 중심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옮기는 것 뿐인 것 같다. 

또 한 편은 두 남녀의 이야기다. 파리 출신의 여자와 라 푸앵트 쿠르트 출신의 남자가 헤어지기 위해 만난다. 두 사람이 마을 곳곳을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며 오히려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확인한다. 편집이 알랭 레네인데 알랭 레네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쇼트들이 가득하다. 정지된 화면 속에서 의도된 클로즈업과 신체부위 분할. 표정없이 대사를 주고 받는 두 인물사이에 거리두기는 <지난해 마리앤바드에서>를 만들기 위한 습작같다.  

연인 역시 마을의 일부여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로 떼어내서 돋보기도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전체적 큰 그림이 마을 전체라면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보고 이들은 말이야..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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