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느와르 - Café 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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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3시간 18분이라는 런닝타임을, 극장에 가서야 알았다. 정성일씨의 장황한 글처럼 영화도 장황할 것이며 재미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중간에 두 번쯤 졸고 화장실도 갔다오고...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지루하지 않았으며 재미있기까지 했다. 

프랑스 영화사에 누벨 바그 시절이 있다. 1960년대 평론을 하던 감독들이 영화에 대한 잡담이나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영화는 카메라로 쓴 문학작품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참 고마운 발상이었다. 이들의 영화는 당연히 문학 작품에 많이 빚지고 있으며 소설 속 대사를 카메라로 비추거나 등장 인물들이 대사를 그대로 말한다. 당시 감독들은 영화광일 뿐 아니라 하드보일드 장르의 미국문학이나 프랑스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1.  

정성일 씨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 바그 시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학작품에서 그대로 가져온 대사들, 서울 한복판 거리를 배회하는 카메라. 카메라를 통해 본 익숙한 서울 풍경은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인다. 청계천부터 종로 거리를 쭉 트래킹하면서 광장시장, 평화시장의 겉을 훑는다. 그림자가 늘어지는 시간, 일몰 직전의 노르스름한 빛 속에 앉아 있는 익숙한 서울은 아주 아름다웠다. 뉴욕이나 파리가 아름다운 도시로 자리잡은 이유는 영화가 단단히 한 몫 한 게 아닐까. 네러티브보다 뉴욕이나 파리의 골목 자체가 빛나는 영화가 많다. 센트럴 파크의 아찔한 단풍이나 거리, 파리의 이름 모를 골목 때문에 영화를 보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서울이라는 풍광 때문에 영화를 기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홍상수 감독 속에 나온 서울은 서구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스펙터클이었으며 <괴물>이나 <추격자>에 나온 서울은, 서울의 정체성이 필요없는 공간이었다.  <카페 느와르>에서 서울은 인물보다도 더 주인공같다. 인적 드문 청계천 한쪽 면은, 세느 강변 같고 카메라가 쭉 트랙킹하는 종로 길가는 마치 뉴욕 같다.  

2.  

영화광이며 독서광이 만든 영화답게 영화는 "인용구"로 가득 찬 영화이다. 키에슬로브스키의 <블루>의 한 장면도 보이고 레오 까락스의 영화에서 보는 공간을 압축한 이미지도 엿보인다. 물론 <극장전>, <괴물>, <올드 보이> 등 한국영화를 영화 속에서 이야기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인용구에 상당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편이다. 어떤 글이나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인용한다는 행위 속에는 인용한 사람의 주관과 시선이 들어가 있다고 여긴다. 같은 글을 읽고도 다른 인용구를 기억하는 일이 그 증거다. 게다가 인용구들로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이도 있는데(강준만 씨의 글이 대체로 그렇다) 머리 나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도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튼, 영화 속 영화를 보는 잔재미도 쏠쏠하다. 

3.  

정성일 씨 인터뷰를 보니 문학작품 속 글을 살아있는 인물들이 발화했을 때 느낌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결과는 썩 좋지 않다. 이 영화가 형편없지는 않지만 좋은 영화라고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인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문학의 가장 큰 차이는 방향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나, 작가나 감독의 목소리를 해석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나 관객의 몫이다. 문학 속 인물은 적극적이기 보다는 작가의 필요에 따라서만 움직일 때가 많다. 반면 영화는 감독의 관점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두 시간 동안 대체로 살아있다. 인물만 떼어놔도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영화다. 그런데 <카페 느와르>에서 인물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서로 주고 받는 대사가 아니라 이미 쓰여진 글 중에서 읽고 싶은 부분만 읽기 때문에 서로 주고 받지 못한다. 인물들이 하는 유의미한 말을, 관객은 당연히 무의미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인물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뭐, 현대 사회에서 익숙한 일이긴 하지만 소통을 원해 영화를 보는 관객한테는 일종의 좌절감마저도 줄 수 있다.  

인물들은 각자 진지한 사연을 지니고 있지만 듣는 이들은 귀담아 듣질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연에 관한 이야기의 속성이 자신한테는 심각하지만 제 삼자한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애정의 문제처럼 보인다. 자신의 얘기만 하는 사람은 주변에 널렸으니 남의 얘기에도 귀 기울여주는 배려심 있는 인물을 영화에서는 기대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심리기도 하고.  

4.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거 보면, 이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괜찮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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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 The Americ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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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조지 클루니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이들은, 그들의 진정한 재능을 외모 때문에 무시당하는 비운을 겪어내야하지 않나, 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동안 봐왔던 조지 클루니가 아니다. <인 디 에어>에서도 조차도 조지 클루니는 할리우드 배우같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탈이아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떨어진 의지할 곳 없고 믿는 건 자신의 본능 밖에 없는 외로운 미국인일 뿐이었다. 시종일관 건조하고 초조한 표정, 공허하면서도 지친 표정이 주름의 깊이를 아름답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장면서 피 흘리면서 운전할 때 얼굴에 확장된 혈관이 보여주는 고통의 깊이는, 조지 클루니는 명배우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조이 디비전의 이안 커티의 짧은 삶을 다룬 <컨트롤>을 만든 감독인데 이 영화 역시 우울하면서도 존재의 근원적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잭이면서 에드워드인 조지 클루니는 왜 킬러로 살고 있는지 모두 생략해 버린다. 잭이면서 에드워드는 킬러로 사는 데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다닌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은퇴마저도 쉽지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데서 오는 심리적 갈등인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법은 새롭지 않지만 우울한 심리를 영상과 음악을 이용해 표현하는데 능하다. 게다가 아름다운 마을, 델 몬테의 풍경도 서정성을 부추긴다. 새해 첫날 <고독의 편린>을 봤는데 연속 우울한 영화로 새해를 열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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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클루니는 제게도 잘생긴 얼굴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요. 저도 이 영화보고 넙치님처럼 좀 바뀌면 좋겠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넙치 2011-01-06 01:18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도 웃음 가득한 새해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 영화는 썩 훌륭하진 않지만 조지 클루니는 명품연기자로 돋보이는데 반딧불이님이 좋아하실진 모르겠네요...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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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일상에서 분리된 도시는 모두, 언제나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낡은 건물이나 사람들의 화난 표정도 심지어 유쾌하게 보인다. 그러나 도시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그 모든 유쾌함이나 낭만은 흔적이 없어지고 권태와 구질구질함이 눈에 띈다. 자유와 낭만의 대명사인 파리 조차도 여행객이 되었을 때와 거주자가 되었을 때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가끔 서울 여행을 오는 외국인 친구를 맞이하면 추한 서울도 아름답고 여겨진다. 남산한옥마을, 창덕궁, 경복궁, 청계천...이런 곳은 서울을 스펙터클화하는데는 훌륭하지만 진짜 서울은 아니다. 진짜 서울은 출퇴근할 때 오가는 표정없는 길, 술집이 문 닫을 즈음 택시 타려고 몰려 나온 행인들이 점령한 길이다. 둘 다 서울이지만 익숙한 길은 구질구질해보기 마련이다.

도시의 속성이 변하는 게 아니다. 도시를 겪는 인간의 감정이 변덕스러운 탓인데 인간은 도시 탓을 한다. 이스탄불에 가기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지명이 잘 안 들어와서 돌아와서 마저 읽었다. 2002년 7월, 처음 이스탄불에 갔을 때, 거리는 온통 빛으로 넘쳐있었다. 밝은 빛은, 카페 테라스의 빈 탁자와 의자도 유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느긋해보였다. 손질이 안 된 벽들마저도 볕의 축복을 받아 아름다웠다. 12월에 찾은 이스탄불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거리는 텅비어 보이고 두꺼운 파카와 내복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했다. 스산했고 오후 5시면 어두워지는 거리는 오르한 파묵의 글에서 말하는 비애와 어울렸다.  

삼일이란 짧은 기간동안 이방인으로 당연히 가져야하는 흥분이나 설렘이 없었다. 대신 서울에서처럼 이스탄불은 그저그런 도시처럼 보였다. 이스탄불은, 물론 그대로였다. 여행객들이 차지인 술탄하흐멧의 카페와 식당가,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 아야소피아 옆 더비스 카페마저도 그대로였다. 뭐가 문제일까. 여름에 길에 나서면 들렸던 사람 소리가 빠져있었다. 노천카페와 호텔 테라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무음처리되고 이미지만 돌아가는 길을 걷는 것 같아서 심심하다 못해 나는 왜 낯선 곳에서 아침 먹고 출근 하는 것처럼 나와서 길을 헤매나, 한심한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나는 서울의 소음과 매연에 익숙해져서 적막하고 맑은 대기 속에서 이국적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불안감을 종종 느낀다. 생활공간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도시를 찾으면서도 결국은 생활공간과 닮은 곳에서 행복감 찾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이런 모순된 행동은 서울에 대한 내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르한 파묵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이스탄불에 대한 진한 애증이 묻어있다. 오스만 제국 몰락이후에 쇠락하기만 한 도시, 그러나 한 번도 떠날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벗어날 수 없는 도시를 다각도에서 바라본다. 옛날 신문 기사부터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이 여행객으로 이스탄불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자신의 가족의 삶이 녹아있는 이야기가 이스탄불의 총체적 모습이다. 탁심광장이나 술탄아흐멧이 이스탄불이 아니라 베이올루의 허름한 건물들이 존재하는 골목이 이스탄불의 속살이다. 파묵의 글을 읽으면 가이드북이 언급하지 않는 이스탄불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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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비트 - Heartb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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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특히 짝사랑에 대한 담론을 이미지로 풀어낸 감각적으로 담았다. 큐피드처럼 곱슬거리는 금발의 니콜라스에게 반한 마리에와 동성애자인 프란시스의 초조, 두근거림, 질투가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이십대 때 열광했던 왕가위 감독 영화들에서 봤던 장면들이 겹쳐진다. 가슴이나 턱을 쓰다듬는 손을 클로즈업하면서 음악이 흐른다. 섹스 씬이 따라 갈 수 없는 애로틱한 장면들다.

 

2. (짝)사랑을 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들 모두 하는 말은 "미쳤어"다. 극중 마리에 역시 "내가 미쳤지"를 연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미쳤거나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씀을 실행하는 인물들이다.

 

한 인터뷰이가 이런 말을 한다. 약속 시간에 늦은 상대를 기다리면서 삼십 분이 지나자 화가 절정에 달해서 상대가 오면 몰아붙여줘야지 했는데 40분이 다 되서 상대가 나타나고 그의 얼굴을 보자 화가 난 마음이 싹 풀어지면서 늦을 수도 있지,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이런 거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도 결국은 상대한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 혼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화나는 일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성은 안드로메다로 잠시 보내는 것. 마리에가 키콜라스한테 고백 편지를 보내고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용기 내서 니콜라스에서 내 편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니콜라스는 지금 중요한 건 오븐에 넣은 음식이 타지 않게 오븐을 끄는 거라고, 하면서 등 돌려 마리에한테서 멀어진다. 마리에는 멀어져가는 니콜라스의 등을 보면서 부들부들 손을 떨며 담배를 물 수 밖에 없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시소 놀이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니 멀미 쯤은 감수해야한다.

 

 

3. 큐피드가 나이를 먹으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만지고 싶은 머리결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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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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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일요일이면 이스탄불에 가 있을 거라 애써 다시 읽고 있다. 2006년 처음 읽고 난 후기를 읽어보니 아주 불만족했던 거 같은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몰입이 잘 안 되는 소설이다. 왜 몰입이 안 되나...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가 자꾸 바뀌는 이야기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고 있는 요즘은 이야기체가 아니라 오르한 파묵이 가진 세계관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신의 존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솔직히 짐작만할 뿐이다. 신의 존재를 필요할 때만 믿는 문화권 출신의 사람한테 목숨을 바쳐 신의 뜻을 따른다는 게 불편하다. 그림을 그리다 눈을 머는 게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믿음을 공유하기에는, 지나친 물질문명 속에 둘러싸여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여자의 위치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들여다보니 세큐레의 성격 자체는 입체적이다. 세큐레가 속한 사회는 여자가 나설 수 없는 이슬람 사회라 세큐레의 처지가 아버지한테 종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계획하는 진취적 여성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독서 후기들이 다들 좋다고만 하고 어떤 점이 좋은지 써 놓지 않았다. 궁금하다. 뭐가 좋은 걸까?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읽는 이유는 세밀화에대한 파묵의 애정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서구적 시각에 대한 부정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매혹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베네치아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법을 부정하면서도 모방하려한 노력은, 매혹과 규범은 일치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이 에니시테의 죽음과 관련된 그림 이야기와 카라와 세큐레의 사랑 이야기라는 두 가지 줄거리를 가지고 전개되지만 정교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결론은 파묵의 글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이스탄불>을 주문했다. 우울한 이스탄불을 느끼게 된다는데 파묵의 글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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