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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도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일상에서 분리된 도시는 모두, 언제나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낡은 건물이나 사람들의 화난 표정도 심지어 유쾌하게 보인다. 그러나 도시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그 모든 유쾌함이나 낭만은 흔적이 없어지고 권태와 구질구질함이 눈에 띈다. 자유와 낭만의 대명사인 파리 조차도 여행객이 되었을 때와 거주자가 되었을 때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가끔 서울 여행을 오는 외국인 친구를 맞이하면 추한 서울도 아름답고 여겨진다. 남산한옥마을, 창덕궁, 경복궁, 청계천...이런 곳은 서울을 스펙터클화하는데는 훌륭하지만 진짜 서울은 아니다. 진짜 서울은 출퇴근할 때 오가는 표정없는 길, 술집이 문 닫을 즈음 택시 타려고 몰려 나온 행인들이 점령한 길이다. 둘 다 서울이지만 익숙한 길은 구질구질해보기 마련이다.
도시의 속성이 변하는 게 아니다. 도시를 겪는 인간의 감정이 변덕스러운 탓인데 인간은 도시 탓을 한다. 이스탄불에 가기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지명이 잘 안 들어와서 돌아와서 마저 읽었다. 2002년 7월, 처음 이스탄불에 갔을 때, 거리는 온통 빛으로 넘쳐있었다. 밝은 빛은, 카페 테라스의 빈 탁자와 의자도 유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느긋해보였다. 손질이 안 된 벽들마저도 볕의 축복을 받아 아름다웠다. 12월에 찾은 이스탄불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거리는 텅비어 보이고 두꺼운 파카와 내복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했다. 스산했고 오후 5시면 어두워지는 거리는 오르한 파묵의 글에서 말하는 비애와 어울렸다.
삼일이란 짧은 기간동안 이방인으로 당연히 가져야하는 흥분이나 설렘이 없었다. 대신 서울에서처럼 이스탄불은 그저그런 도시처럼 보였다. 이스탄불은, 물론 그대로였다. 여행객들이 차지인 술탄하흐멧의 카페와 식당가,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 아야소피아 옆 더비스 카페마저도 그대로였다. 뭐가 문제일까. 여름에 길에 나서면 들렸던 사람 소리가 빠져있었다. 노천카페와 호텔 테라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무음처리되고 이미지만 돌아가는 길을 걷는 것 같아서 심심하다 못해 나는 왜 낯선 곳에서 아침 먹고 출근 하는 것처럼 나와서 길을 헤매나, 한심한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나는 서울의 소음과 매연에 익숙해져서 적막하고 맑은 대기 속에서 이국적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불안감을 종종 느낀다. 생활공간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도시를 찾으면서도 결국은 생활공간과 닮은 곳에서 행복감 찾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이런 모순된 행동은 서울에 대한 내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르한 파묵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이스탄불에 대한 진한 애증이 묻어있다. 오스만 제국 몰락이후에 쇠락하기만 한 도시, 그러나 한 번도 떠날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벗어날 수 없는 도시를 다각도에서 바라본다. 옛날 신문 기사부터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이 여행객으로 이스탄불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자신의 가족의 삶이 녹아있는 이야기가 이스탄불의 총체적 모습이다. 탁심광장이나 술탄아흐멧이 이스탄불이 아니라 베이올루의 허름한 건물들이 존재하는 골목이 이스탄불의 속살이다. 파묵의 글을 읽으면 가이드북이 언급하지 않는 이스탄불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