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1. 슈테판 츠바이크를 세계 3대 전기 작가라고 알라딘 소개글에 있는데 나머지 두 명은 누구인지 궁금;;; 아무튼 명성답게 재밌다. 메리 스튜어트의 전기인데도 문학적이며 통찰력이 스며있다. 미셸 슈나이더가 쓴 <피아노 솔로-글렌 굴드>를 읽으면서 전기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에세이를 만나서 황홀했다. 이 책도 전기를 넘어선 책이다. 메리 스튜어트의 시기와 삶 자체가 극적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취사선택한 사건과 시기는 정말 흥미진진한 서사를 선사한다. 게다가 문체는 바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고 생동감있다. 읽으면서 메리 스튜어트 시대에 종교와 절대군주, 입헌군주제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더 찾아보게 만든다.   

2. 메리 스튜어트 전기이기는 하지만 엘리자베스1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엘리자베스 1세는 천일의 앤과 헨리8세의 딸이다. 많은 영화 감독들이 천일의 앤이나 튜더 가문에 관심을 가지는데 작가는 메리 스튜어트한테 관심을 가졌다. 엘리자베스 1세한테 그닥 호의적이지 않은 게 어조에서 종종 드러난다. 작가는 짧고 굵게 열정적으로 혹은 성찰하지 않은 삶으로 자신을 파괴했다고 메리 스튜어트를 평가한다. 독일어 권 작가들은 감정과 열정을 이지적인 것의 대용이며 이런 감정과 열정으로 극을 만드는 게 더 쉽다고 믿는 거 같다.(엘프리네 엘리네크가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한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도 메리의 완벽함에 한 때 매혹되는 듯하다가도 결국에는 메리의 삶을 망친 열정에 종종 혐오감을 드러낸다.   

3. 평범하지 않은 출신, 신 다음의 서열을 갖고 태어난 여인의 삶을 통해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다. 군주라는 지위가 세습이다 보니 누가 어떤 서열에 있고 현재 왕이 없어질 때 누가 왕이 될지..에 관해 모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결국 군주의 목숨은 늘 암살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 시기에 종교는 파당을 만드는데 엄청난 힘을 행사했다.  여왕이나 왕이 되기 이전에 꼬마였을 때 이들은 종교를 선택할 선택권을 받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국교에 따라 길러진다. 신심이 없는 내가 보기에 신을 모시는 형식이 하나도 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미사를 볼 것인가 개신교식 예배를 볼 것이가는 왕실과 국가 전체의 중요한 문제였다. 한국사에서도 왕이 죽은 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상복을 얼마나 입을 것인가로 싸웠다고 했는데 형식이란 자존심 문제다. 형식이 근본적 문제라기보다는 그러니까 기싸움이어서 대립하는. 인간의 모든 비극은 자존심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4. 전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통찰력있고 작가의 주장이 강하게 펼쳐지는데 남성우월주의자 시각이 심하게 존재한다. 메리나 엘리자베스 모두 여자라서..이런 여자이기에..하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결정타는 여자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 대의를 놓치는 부류로 묘사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커다란 일은 잘 양보하지만 사소한 일에서 감정적 상처를 받으면 이해할 수 없는 한을 품는다. 그래도 작가가 대놓고 여자들은 이래..하는 건 좀 자존심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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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츠바이크군요. 최근 리영희 평전 읽으면서 츠바이크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3대 평전작가 알게되시면 저도 좀 알려주세요~

넙치 2011-03-07 10:14   좋아요 0 | URL
왜 츠바이크 생각이 나셨는지 궁금하네요.^^
 

2월은 푸코 책을 좀 들여다봤다. 책을 읽을 때 목적 의식이 있는 건 참 중요하다. 공부할 때면 뭔가 건질 게 없나 열심히 사냥(?)했겠지만 지금은 어떤 결과도 강요받고 있지 않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뽀대나게 말하면 독서의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고 사실대로 말하면 마음이 허해서 이책 저책 보는 척할 뿐이다.-_-; 

어쨌거나 푸코는 끊임없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첫째, 잘 이해가 안 가서 푸코 책을 읽고 있노라면 슬프지만 내가 그럴듯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 푸코는 기존 질서 밖으로 배제된 사람 혹은 질서에 관심을 두고 글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지식의 고고학>을 읽으면서 분노와 함께 좌절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먼저, 민음사 관계자들이 혹시라도 이 페이퍼를 본다면 부탁한다. 한자를 제발 한글로 바꿔주길, 간절히 부탁한다. 글도 난해한데 불쑥 의미없이 튀어나오는 한자라니....한자 세대가 아닌 사람한테 한자는 또 다른 외국어다.ㅠ.ㅠ 

푸코의 글쓰기 스타일이 난해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번역이 좋고 나쁨을 말하고 싶진 않다. 번역이란게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어와 우리말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어서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만 바가지로 먹는 일이다. 게다가 원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허접한 번역도 고마울 수 있다. 원전 비교해가면서 어떤 문장을 지적하는 이들은, 왜 자신들이 직접 번역하지 않은 채 오역만 문제 삼는지 정말 이해 안 간다.  

그러니까 이 책이 완벽한 번역이길 원하지도 않고 오역을 잡아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번역어 용어에 대한 아쉬움이다. 역자인 이정우님도 서문에 밝혔듯이, 프랑스의 교육체계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모든 학제가 사유와 글쓰기로 수렴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한국은 주입식 교육 환경이다. 사유는 배제하고 요점정리 위주로 공부시키는 학제에서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아도 철학에 접근하는 일이 우주탐험만큼이나 신기한 일처럼 여겨진다. 우주탐험은 일반인한테 어려워도 염원되고 독특한 체험처럼, 철학서들은 일반인한테는 우주탐험 같은 효과가 있다. 어렵지만 나는 한다, 라는..ㅎ  

그러나 왜 우리는 철학서가 전문가만을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나? 나는 학자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학자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다. 일단 대학에 자리잡으면 연구 따위는 나몰라라...젊었을 때 혹은 박사학위 논문시절 얻은 지식 단계에서 멈춰서 이후에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우려먹는다. (근면한 학자들께는 싸잡아 말해서 죄송하다) 그러니 번역서의 질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박사학위 논문 시절 공부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게다가 전공이 다른 학문간의 교류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같은 원전에서 같은 단어도 철학전공자과 문학전공자 간에 우리말로 다르게 번역된다. 한 사상가의 책이 당연히 각기 다른 번역자가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 독자가 접근하다보면 거의 미칠지경에 이른다. 우리말 자체도 생소한데(이건 우리말 개념과 외국어 개념에서 오는 간극 때문이니까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알고보면 같은 단어를 우리말로 다르게 번역했다. 그러니 한 사상가의 책을 우리말로 읽는 건 무의미하고 일반인은 더더욱 다가갈 수 없고 전공자의 전유물이되고 한국에서 철학은 고리타분한 영역이 돼버린다.  

이 책도 언설이라는 말이 discours라는 걸 알고는 기겁을 했다. 나는 담론이라고 기억하는 말이다. 언설적인은 discoursive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물론 이정우님이 담론이란 말 대신 언설을 사용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나 미학 등 한 사상가의 책을 번역할 때는 나름 전문가인 번역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서로 토론도 좀 하고 한 사상가가 쓴 같은 어휘는 우리말로 한 용어로 통일을 해서 혼동을 줄였으면 좋겠다. 이들이 안 그러면 출판사에서라도 적극 나서야한다. 아니면 적어도 푸코 가이드 사전 쯤 한 권 만들어서 푸코의 용어에 대해 각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쭉 훑을 수 있도록 해 주던가. 그러고는 인문학은 죽었네...하는데 내 보기엔 인문학은 출판사랑 학자들이 죽였다.  

학자들이야 누가 어떤 용어를 잘못 사용했네, 하고 원전 대조해가면서 지적질하는 게 본업아닌가. 일반인한테도 이런 태도를 요구하는 건 터무니없다.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오역까지 찾아내야하는 수고까지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당연히 외면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솔직히 불어 원전을 찾아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었고 이런 페이퍼를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은 왜 푸코가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등 사histoire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에 대한 해제다. 역사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서술한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어주는 단위들이 푸코만의 용어를 사용해서 기술한다. 이런 기본적이 용어에서 질린다면 개념과 전체론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니면 이해하는 문장만으로 오독이 필수이니 푸코의 사상에는 다가가지도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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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estjh 2013-02-1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설 담론 그런 케이스는 정말 뼈저리게 공감되는군요..... 저도 경험해봣는데 다른 개념인줄 알고 얼마나 헤멨던지.....옆에다 괄호로 원어라도 써놓고 사전처럼 뜻이 될 수 있는 목록 몇 개 만들면 될텐데....

넙치 2013-02-24 15:15   좋아요 0 | URL
<지식의 고고학>은 도저히 못 읽겠더라구요.ㅠ.ㅠ
푸코의 <말과 사물>은 출간 당시 프랑스인들이 해변으로 휴가가서 읽을 정도로 베스트셀러라고 하던데, 그런 분위기까진 못 만들어도 번역자들이 조금만 더 수고해준다면 일반 독자가 철학적 사유에 한 발 다가갈 수 있을텐데요...

ㅁㄴㅇㅎ 2014-09-2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자의 양심 : 내용을 100%이해한 후 번역할 것. 번역자도 이해못한 내용을 독자는 절대 이해못한다.
 
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보고 너무 좋아서 장편 데뷔작인 <파이>와 <레퀴엠>을 찾아봤다. 세 영화 모두 어찌나 격정적인지 러닝 타임 내내 하드락을 듣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모든 게 소진되는 기분. 쉬지 않는 분할 화면이나 쇼트의 움직임, 신체 부위 클로즈업, 무의식적 환상을 이미지로 보고 놀라는 인물들과 함께 화면 밖에서도 움찔하게 만드는 긴장감. 대체로 우리는 이성이 비이성과 무의식을 통제하는 세계에 살고 있고 이성이 지배하는 질서에 익숙하다. 규범에 따르지 않을 때 혹은 어떤 이유로 규범을 따르지 못할 때 우리의 의식은 어떤 사고체계로 들어가는가 하는데 대한 고찰이 감독의 주 관심사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상상이 처음에 시작되다 상상이 현실과 공존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상이 현실을 지배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망상이란 말을 사용한다. 즉 미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상상을 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거다. 잠 들기 전에 누워서 내일 하기 싫은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그려 보곤한다. 많은 시간을 실제로는 상상하는데 사용하지만 대체로 망상으로 뛰어들지 않은 이유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강하거나 주제파악을 일찌감치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꿈에 대한 열정도 쉽게 접을 수 있다는 말이다. 

꿈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현실에서건 상상 속에서건 꿈과 함께 산다. 꿈을 이루는 일은 분명히 근사하지만 꿈을 이루기위한 과정은 결코 근사하지 않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강도 높게 해야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뇌신경은 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감독은 이런 뇌신경의 지배를 받는 인물들을 이미지화한다. 블랙 스완은 <파이>나 <레퀴엠>에서 한번 보여준 장면들을 잘 정돈하고 다듬어서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게 잘 잇는다. <파이>가 수로 세계의 질서를 파헤치려는 수학자가 겪는 착시와 망상을, <레퀴엠>에서는 각자만의 미래를 상상하며 약물중독이 돼가는 모자, 연인, 친구를 묘사한다. 두 영화 속 인물들이 아웃사이더들인데 비하면 블랙 스완은 익숙한 테마와 주류적 시선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대런 아노로프스키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성공을 들여다본다. 평생을 준비해 온 무대에 설 기회를 가졌을 때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행복이 주인공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의 이면을 묘사한다. 객관적으로 행복이나 성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이 어떻게 한 개인을 억압하는지.. 그 힘은 무중력 상태 같다. 신발끈을 매는 일상적인 일조차도 훈련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무중력 상태. 무중력에 던져진 니나는 철저하게 자신과 싸움을 벌인다. 평생 지지자였던 엄마도 적처럼 보이고 동료도 위협적 존재로 다가온다. 움직이는 유기체만이 아니라 비유기체도 기괴한 형상으로 니나의 정신 한 자락을 따라다닌다.  

니나와 대척점에 있는 릴리란 인물은 평범한 인물을 독특하게 묘사한다. 같은 일을 해도 별 스트레스 안 받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아니면 말고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매력있는 성격이지만 어떤 성격을 가질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천성이란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부분인데 천성은 존재하지 않나...라는 질문으로 이끄는 인물이다. 천성이 백조인 니나가 흑조로 변신하기 위해 결국 니나가 해친 건 자기 자신의 몸인 걸 보면 생긴대로 살 수 밖에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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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브레이브 - True Grit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이 영화를 보면서 코엔 형제는 왜 웨스턴 장르를 택했을까 궁금했다. 이미 잘 알려져있듯이, 서부영화는 미국이 건국신화를 열심히 만든 게 아닌가. 코엔 형제는 미국적 자본주의를 조롱하는 일에 능하고 미국적 사고를 싫어하는 사람들 아닌가. 결국 그들도 미국인이 아닌가..했는데 웨스턴 장르 영화를 다시 만든다기 보다는 소설을 읽고 14살 된 아이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코엔 형제의 말대로 영화의 극 중심에는 14살 소녀 매티가 있다. 아버지 장례식날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겠다며 어른도 해내기 힘든 거래를 하는 당찬 소녀다. 무정부 시대인 서부개척시대에 자신을 지키려면 어느 정도의 폭력과 총은 필수며 법이 하지 못한 징벌을 복수라는 이름으로 하는 게 진짜 용기라고 배운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성장영화쯤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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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 Late Autum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내게 만추는 기대되는 영화기보다는 재밌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다가왔다. 그 이유는,

첫째, 현빈은 얼마 전 끝났던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이란 인물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영화 예고편을 봤을 때 김주원을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영화를 보면서도 김주원의 말투가 떠올라 방해가 됐다.;;; 이 시계는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시계가 아니야...이태리 장인이 블라블라...;;

둘째, 김수용감독이 만든 81년작 만추에 대한 이미지다. TV에서 방영했을 때 봤는데 오래 전이라 내용은 어렴풋하지만 이미지만은 고스란이 남아있다. 밖은 어두웠고 차창에 비친 김혜자의 초점없는 시선.  마음에 깊은 구멍이 있는 사람이 어떤지 말해주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냈던 장면들. 바람소리와 더불어 바람의 세기를 알려주는 낙엽들의 뒤척임. 화면 앞에 있던 낙엽이 저 멀리 날아가는 장면들은 스산함으로 오슬오슬 소름이 돋게 했다. 지금도 김혜자의 시선을 생각하면 서늘해진다. 

이런 배경(?)을 갖고 영화를 봤다. 

이 영화에서 커다란 조연은 안개다. 첫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 모두 감옥의 견고한 담벼락으로 시작한다. 담 밖을 둘러싸고 있는 건 두터운 안개다. 뿌연 시야는 두 사람의 막막한 앞날같기만 하다. 두 사람의 과거가 안개과 함께 가려졌다  볕과 바람 속에서 조금씩 그 자락들이 드러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 때문에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 누구나 밤새워 말할 억울한 혹은 무용담쯤 하나씩 가지고 있다. 주목받을 만한 이야기와 술자리용 이야기의 차이는 서술방법과 화자의 태도에 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는 원리랑 같다. 누구든 한 번 만남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만날 때마다 나누는 이야기와 사소한 행동과 반응을 조금씩 수집해서 뇌에 저장해 패턴화한다. 한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건 바로 뇌 속에 든 사소한 정보를 많이 수집해놨다는 말이다. 좋은 서사는 사람을 사귀는 원리처럼 이야기를 풀어간다. 쫓기는 듯한 훈, 거울 보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행동 , 전화받는 태도등을 보면서 관객은 훈의 캐릭터를 구축해간다. 

그러나 훈의 캐릭터는 처음 등장과 달리 좀 아쉬운 점이 있다. 훈이 더 건들거렸으면 좋았을걸...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에 왔을테지만 몸을 판다. 마음까지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파는 절박함보다는 샌님같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는, 배우 탓이라기 보다는 김태용 감독 탓일거다. 김태용 감독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셨다. 실제로 남자 배우를 극단까지 몰고 나갈 수 없는 감수성이란 말도 되겠다. 김수용 감독 영화에서 봤던 쫓기던 정동환의 절박함을 기억하던 관객한테 훈은 너무 부드럽다. 뭐 많은 여자 관객들이 김태용 감독의 이런 부드러움에 열광하지만. 

훈에 비하면 애나는 좀 더 근사했다. 단 말하지 않을 때. 난 탕웨이의 말투가 싫다. 말할 때 목소리에서 어떤 단호함이 비춰진다. <색, 계>에서도 그랬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 단호한 말투가 파리한 표정을 깎아내린다. 말하지 않을 때 지치고 의욕없는 얼굴은 근사하다.  


배우들의 깊이 탐구보다는 적당히 긍정적이서 좋기도 하지만 서운한 점도 이렇게 많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김태용 감독의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호퍼의 그림처럼 휴게소에 앉아 훈을 기다라는 애나의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화면 밖에서 나는 소리로 다른 사람들이 오고가는 걸 알 수 있다. 애나는 문소리가 날 때마다 훈인지 살피고 문을 볼 수 없는 관객은 애나의 얼굴을 살핀다. 애나의 얼굴에는 조금의 실망과 많은 희망이 묻어난다. 빈 앞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엔딩 크레딧이 나오는데....이 열린 결말은 훈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절망보다는 영화가 끝난 후에라도 두 사람이 만날 거란 묘한 기대를 준다. 극장 밖으로 나서니 바람도 따뜻하고..<만추>였지만 봄을 기다리는 계절에도 썩 잘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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