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픽션>에 아주 데고 나니 이 영화를 볼까 말까 망설였는데 <러브 픽션>과는 급이 다른 영화다. <러브 픽션>은 통찰이 없고 에피소드만 있는 로맨스에 관한 영화다. <건축학 개론>은 감정을 다루는 영화다. 그것도 아주 잘.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는 동안, 그 시절 친구들이 몹시 보고 싶었다. 한 때 일상과 생각을 나누었던 친구들은 뭘 하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나 스무살을 지난다. 누구나 스무살에 친구가 있다. 때론 특별한 친구가 있을 수 있다. 스무살한테 특별한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좀 더 자주 만나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함께 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도 같이 먹는다. 집 방향이 같으면 같은 버스를 타고 가기도 하고 버스 타기 전이나 버스에서 내린 후 술도 한 잔 마신다. 시간을 이렇게 공유하다보면  어느새 일기장 주인공이 된다. 그 친구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많은 에피소드를 만든 그 해 나와 함께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생활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이면서 한 시절 기억이 저 먼 곳에서 먼지만 두껍게 쌓인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나 그 시절의 친구를 만나 그 먼지를 잠시 턴다. 아 맞아, 그때 그랬지, 하고. 아주 귀엽게 내가 나를 본다. 그땐 참 순진했는데, 하고 다른 이한테 말하듯이 내게 말한다.

 

이 영화가 대체로 모두에게 좋은 이유는 바로 이런 스무살의 경험을 다루는 영화기 때문이다. 관계에 서툴고 남 모를 열등 의식도 있고 허세도 있고. 영화는 주인공들이 (아마도) 서른무렵에서 시작한다. 여자는 건축 의뢰인, 남자는 건축가로 다시 만난다. 집을 짓는 일은 서로 시선을 맞추는 일이고 객관적 일로 시선을 맞추리라고 가정된다. 그러나 사랑을 짓는 일은 규격도 없고 시선을 맞추는 일도 어렵기만 하다. 어긋난 시선 때문에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 또 첫사랑이다.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지만 스무살 기억을 함께 만들었고 그 기억을 잠시 함께 꺼내볼 수 있는 시간을 나눈 것으로 족하다. 십년 후, 그 둘은 스무살과 서른살 무렵의 기억을 또 함께 꺼내볼 수 있을테니. 아, 친구들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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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제목이 삼부작(Trilogy)인가 의아했는데 일반적으로 삼부작으로 알려져있다. <나의 어린시절>, <나의 가족>, <집으로 가는 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70년대 에딘버러의 작은 탄광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소년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이야기한다.

 

가난과 가정폭력, 정신병원에 있는 엄마, 마마보이인 아빠, 엄마를 저주하는 친할머니, 생기없이 유령처럼 앉아있는 외할머니, 같은 처지의 사촌. 이보다 안 좋을 수가 할 정도 척박한 환경에서도 소년은 성장한다. 구세군에서 잠시 지내면서 획일적 취향을 강요받기도 하지만 교육을 받기도 한다. 소년이 학교와 집 둘 중 선택할 때가 되었을 때, 소년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은 전보다 더 누추하고 아빠와 친할머니는 소년의 노동력만이 필요할 뿐 소년이 필요한 애정이나 보살핌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있다. 소년은 죽음을 생각하다 입대해서 이집트로 간다. 군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구는 소년의 태도를 바꾼다. 염세와 비관으로 일관한 제이미가 영화 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제대를 한다.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어린 소년이 감당해야하는 비참한 환경이 영상으로 옮겨지는 방식은 독특한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독립영화여서 적은 제작비로 사용해서 미니멀한 표현 방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단점이 영화의 큰 장점이 되어 명작 반열에 올린다. 극도의 고독하고 우울한 심리를 인물의 무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종종 잡아낸다. 인물보다 카메라가 오래 머물거나 미리 자리잡는 롱테이크, 사운드가 인물보다도 먼저 등장해서 인물의 심리를 유추케하는 방식을 인상적으로 사용한다. 세 시간 삼십 분이란 긴 상영시간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너무 좋은 장면이 여러군데 있지만 한 가지만 적어보면, 이집트 사막에서 군캠프를 벽돌을 일렬로 배열한다. 사방이 같은 모래로 이루어져있는 곳에서 상징적 선을 그어서 그냥 사막과 군캠프를 만든다. 군캠프로 사막이고 선 밖도 사막이지만 선으로 한쪽을 막사라고 정하면서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라 막사가 된다. 가시 많은 청어 통조림을  앞에 두고 제이미의 삐딱하게 앉아 허공을 응시하자 친구가 가시를 발라내는 법을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제이미가 겪은 일들이 당시 탄광촌에서 드물지 않았을 터이고 그 기억과 경험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가 영화의 결말이었다. 빌 더글러스 감독은 유년기의 우울과 무기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 누군가의 유의미한 우울은 때로 참 많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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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소재나 줄거리로 좋은 영화를 놓치곤 한다. 제목도 아리송한 <코파카바나>가 그렇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검색을 했더니 이태원 코파카바나, 청담동 코파카바나, 일산 코파카바나, 브라질 해변, 볼리비아 해변이 주르르 뜬다. 프랑스 감독이 이태원이나 일산 코파카바나를 알리 없으니 브라질 해변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지명은, 주인공 바부의 일상과 닮아있다.  

 

철 없는 엄마와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이야기만 보고 단정해 버렸었다.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냥 철 없는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래 이름은 엘리자베스지만 영국 여왕이 생각나서 싫으니 자신을 바부라고 불러 달라는 여인. 푸른색 눈화장과 붉은 립스틱, 원색 계열의 옷과 스타킹을 즐겨 신는 여인. 화가 날때는 버럭해 버리고 직장도 꾸준히 다니지 못한다는 말을 친구한테서 듣는 여인. 결혼을 앞 둔 딸은 엄마의 똘끼가 부끄러워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바부의 입장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기 마련이고 그 사정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지가 그 인물의 총체적 성품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어른 세계란 자신의 감정을 참을 줄 알아야하고 유유상종을 지향한다. 바부는 이런 면에서는 육체적 나이와는 반비례하다. 정신적으로 사춘기처럼 천진하고 질풍노도를 겪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매서운 칼바람에 와들와들 떠는 부랑자 커플과 금새 친구가 되고 하루 만에 낯선 도시 사람들과 어울리며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성격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호탕하고 자유로운 성격이, 함께 어울려 사는 이들한테는 골칫거리다. 일상에도 규칙이 있어서 친구로서 엄마로서 또 가게 점원으로서 마땅히 해야하는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 규칙을 어기면 비난을 감수하거나 그 비난을 감수 할 수 없다면 규칙에 따라야한다. 호탕해보이는 바부도 비난과 동반되는 외로움을 감수하기보다는 규칙을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타고난 기질은 막을 수 없어서 유리 그릇 위를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하다.  

 

한 사람의 인격이, 그 사람을 둘러싼 주변인물들한테서 더욱 잘 드러난다고 평소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이 영화를 보니 내 생각이란 게 얼마나 편견으로 단단하게 갇혀있는지 좀 생각하게 된다. 아무한테나 말도 안 걸고 타인의 도움이나 호의도 일단은 경계하는 바부의 룸메이트는 전형적인 일반적 도시 여성인데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물로 아주 밥 맛이다. 감독이 바부의 똘끼를 애정을 갖고 그려서 그렇기도 하지만 영화를 통해 가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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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밀애>로 기억되는 변영주 감독. 한 여성의 억압된 정신세계를 섬세하게 그렸는데 케이블 채널에서는 야한 영화로 자주 틀어주는 영화다. <밀애>는 표면적으로 성적 욕망을 못 누르는 여성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면에는 소외된 한 여인이 현실에서 발버둥치며 탈출구를 찾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옆집 남자였다. 어둡고 긴 터널을 나오려는 여인의 절규를 보고 있노라면 애잔하다.

 

해서 <화차>는 좀 많이 궁금했다. 원작이 일본 스릴러 소설이라니 자극적일텐데(안 읽고 그냥 일반적 편견만을 갖고 있다) 영화를 어떤 색감으로 표현을 했을려나. 역시나 변영주 감독의 색이 나타난다. 줄거리 자체나 스릴러를 풀어가는 방식은 사실 익숙하다. 차경선을 따라다니고 그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살인마로 변신하게 만든데는 사회 악이 있다. 죄 없는 한 어린 소녀가 부모의 부채로 젊음을 혹독하게 갉아내야한다. 그녀의 실종으로 연쇄 살인범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불행한 과거...줄거리는 이렇게 흘러간다. 짐작 가능한 부분도 있고.

 

 영화를 보면서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 다른 감독이 만들었다면 좀 더 시각적 쾌락에 충실했을 터이다. 범행 동기는 살짝 표현하고 살인 광경을 분명히 상세하게 담았을 거다. 감독은 살인 광경은 상상의 영역으로 밀어버린다. 살인 후 온 몸에 피를 묻힌 주인공이 공포와 광기로 질린 표정으로 닦아도 닦아도 묻어나는 피를 볼 수 있다. 살인 장면에서 바닥에 흐르는 피 속에 파닥거리는 나비가 있다. 나비가 날려고 날개를 파닥일 때마다 붉은 피가 나비를 짓누르고 핏방물이 사방으로 튄다. 화면 한쪽에 보이는 방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 암시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싸이코패스를 다룬 많은 영화들이 늘 좀 재미없었던 이유는, 살인 과정을 상세하고 흥미롭게 묘사하지만 싸이코패스의 심리를 간과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액션 영화들이 지루한 이유와 비슷하다. <화차>는 싸이코패스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감독만의 색깔이 묻어난다. 대사 없고 마치 어떤 내레이션의 이미지처럼 하얗게 등장하는 배우 김민희의 이미지도 한 몫한다. 그러나 배우의 연기 이전에 감독이 싸이코패스를 바라보는 관점을 명확히 했기에 김민희의 캐릭터가 나왔을 것이다. 싸이코패스의 잔인함이 아니라 잔인한 인물에 속에서 나온 생존 본능을 볼 것을 부추긴다. 죽어도 모를 약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역시 영리한 싸이코패스가 이용한 장치다. 결국 싸이코패스는 사회적 산물이지만 사회악이 된다. 여자한테 돌을 던질 지 기구한 운명에 눈물을 흘릴 지는 전적으로 보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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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3-2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차, 리뷰가 여기저기 만개하여 십인십색 반가워요.
넙치님의 리뷰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변감독의 '밀애'는 저도 참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김윤진이 참 연기도 잘 해줬구요.
화차,는 시적인 몇몇 장면이 돋보였는데, 나비가 파닥거리는 그 장면 압권이었어요.

넙치 2012-03-25 17:14   좋아요 0 | URL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밀애에서도 그랬지만 섬세한 심리묘사가, 저는 아주 좋더라구요.
 

로맨틱 코미디의 내가 즐길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는 보지 않으리, 하고 다짐하건만 감독이나 배우들에 대한 호기심이 번번이 승리한다. 결국 극장에 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하고 또 다짐을 하며 앉아 있는다. 이런 악순환을 거듭하는 거 보면 머리 참 나쁘다.ㅜㅡ

 

이 영화는 좋아하는 두 배우, 공효진과 하정우가 나온다. 어찌 극장행을 자제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생각보다도 훠어씬 지루하다. 이런 지루한 영화는 90분으로 짧게 끊으면 안 되나요, 감독님?

영화가 아주 형편 없는 건 아니지만 많은 로맨틱 코미디들이 그렇듯이, 기시감을 주고 지나치게 낙천적인 판타지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이 말도 아주 많이 한다. 재밌는 말은 가끔하고 지루한 말은 아주 많이. 대사를 좀 줄였다면 재밌는 말이 인상적일 수 있었을텐데. 남자 주인공이 왕 수다장이어서 말이 말에 묻히는 격이다.

 

이 영화는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것만 빼고는 헐리우드 극과 매우 흡사한데, 이 점이 신선하면서도 진부하다. 멜로 영화의 정체성이 시대에 맞춰 점점 달라지고 있는데 이 영화는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한국 영화에서 가족은 전경이나 후경에 배치되었다. 남녀 간 연애 패턴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어도 남녀 사이에 가족이 크든 작든 갈등의 요소로 작용해왔다. <러브 픽션>은 가족이 후경에 있긴하지만 코믹 요소나 주인공의 소품 정도로만 기능한다.(하정우의 형, 공효진의 아버지 모두)

 

로맨틱 코미디에서 헐리우드와 한국 영화 사이의 차이가, 가족이란 변수라고 생각해왔다. 이 차이가 <러브 픽션>에서는 거의 안 드러난다. 내 피는 한국사람인지라 아주 현실성 없게 봤다. 가족이 지나친 중심축이 되는 것도 지루하지만 헐리우드와 같은 건조한 영화도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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