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오미 왓츠가 나와서 주저없이 봤는데..영화가 참 울림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단짝인 릴과 로즈. 결혼 후 아들들이 스무살이 된다. 두 아들을 보며 자매같은 두 여인이 자신들의 작품에 감탄을 한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똑같다. 그리고는 이야기가 급전환되면서 서로의 아들과 연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플롯은 정말 파격적인데 영화가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세부적인 걸 쳐버린다. 그렇다고 세부적인 게 전혀 없냐면 그렇지도 않다. 네 모자가 저녁 식탁에 앉아서 두 여인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두 아들은 엄마들의 젊은 날을 공유하기도 한다. 씬 자체는 좋은데 그 씬 안에 영혼이 빠졌다고 해야하나. 인물들의 연기도 괜찮은 편인데 이렇게 영혼 없는 씬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 듯. 섬세한 감정선이 중요한 영화인데 아무래도 촬영을 잘못한듯. 이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선에 초점을 맞춰야할 듯한데 사건 중심으로 흘러서 관객이 인물한테 시선을 기울일 시간을 주지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서로한테 감정을 갖고 고뇌하는 게 관객한테는 전혀 와닿질 않는다. 화면은 빛으로 가득하고 바다가 주는 생동감이 있어 배경은 빼어나게 아름다운데 중요한 게 빠진 영화다.

 

2.

막장 드라마와 예술의 차이가 뭘까, 영화보면서 잡생각을 했다. 틸다 스윈튼이 주연한 <아이 엠 러브>를 보고 나왔을 때 친구가 한 말은 막장중에 막장이라는 말을 했다. 아들의 친구랑 사랑에 빠져서 아들이 죽게 되고 아들 장례식날 아들 친구를 따라 집을 나가는 엄마. 줄거리만 쓰고 보면 요즘 흥행하는 드라마들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 엠 러브>는 아들의 친구를 사랑하면서 겪게 되는 엠마의 감정선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 감정선을 그리는데 감독이 다룰 수 있는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래서 아주 우아하고 시네마틱한 명품영화가 되었다.

 

<투 마더스>는 <아이 엠 러브>보다 더 막장이고 훨씬 더 비도덕적이다. 아들들은 또래의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겪었을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카메라가 다루지 못한다. 해변에서 할머니로 자리바꿈을 한 엄마들의 내적 미묘함이 빠진 인물들의 재회씬은 그냥 어느 날의 피크닉같다. 당연히 <투 마더스>는 명작보다는 막장 드라마 쪽에 가까이 간다. 모든 게 밝혀지고 인물들이 눈물을 흘리며 사랑의 고통을 말하는데도 인물들만 슬퍼한다. 문득 정신차리고 보면 저들은 왜 울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 두려운 게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인지, 육체적 욕정인지, 감정에 무디어지는 나이듦인지, 정체가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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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 데이터에 "태양은 알고 있다"로 검색해야 "수영장"이라고 나오는 검색 시스템, 디게 신기하다. 아무튼 오랫동안 <태양은 알고 있다>로 알려져있는 영화인가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우리말 제목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영화를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영화 전반부는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의 육체를 보여주는 장면이 많아 당혹스러웠다.  후반부로 가면서 전반부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육체적 친밀함이 사건의 작인으로 작용하니 전반부에 중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의 알랭 들롱을 감상하면 된다.

 

전반부에서 정사영화인가 하다가 후반부로 가면 스릴러로 변하는데 60년대 정사 영화도 좋고 스릴러도 좋다. 시대상황도 있겠지만, 인물들이 주저주저 열매를 먹었는지, 자신의 감정을 말하거나 표현하는데 몹시 주저한다. 인물들이 주저하면서 눈빛을 교환하는데서 살짝 촌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긴장감이 파생된다. 처음에는 좀 웃기네하다가도 극이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들이 지닌 모호한 태도에 매료된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시점의 문제로 넘어간다. 관객으로서 어떤 인물의 관점에서 볼 수 것인가. 이 영화는 인물들의 관점을, 마치 감독처럼 바라보게 한다.

 

생 트로페즈 낙원같은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커플, 장폴과 마리안. 일상도 감정도 평화롭고 단조롭다. 어느날 갑자기옛친구 해리와 그의 딸이 찾아 온다. 고요한 수면에 미세한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렁인다. 장폴은 18살인 해리의 딸에게 끌리는 것 같다. 마리안과 해리는 한 때 연인이었다. 장폴과 해리의 딸, 마리안과 해리의 관계 설정으로 장폴은 마리안과 해리를 주시하고 마리안은 장폴과 해리의 딸을 주시한다. 스크린에서는 어떤 사건도 볼 수 없고 심증만을 가질 수 있게 대사도 적은 분량으로 처리된다. 장폴과 마리안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장폴이 해리를 수영장에서 우발적으로 익사시킨다.

 

관객이 범인과 범행과정을 다 보면 스릴러로서 가치는 하락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범죄영화가 아니라 멜로영화다. 스릴은 살인 사건 이후에 고조된다. 경찰이 찾아와 마리안한테 해리의 죽음이 타살일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마리안은 장폴이 해리를 죽인 동기가 해리의 딸 때문이라고 믿었는데 경찰은 뜻밖에도 해리와 마리안의 관계를 질투해 살해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영화에서 장폴과 해리의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단 둘이 한 번 해변을 나갔다온 게 전부다. 마리안은 장폴이 해리의 딸을 사랑한다고 믿어버린다. 관객은 마리안의 관점으로 보게 된다. 게다가 장폴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쓰다보니 태양이 아니라 장폴이 알고 있을 듯.) 경찰의 말로 마리안은 뜻밖이지만 안도를 끼고 장폴을 경찰에 신고 안 한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영화는 끝이 나는데 과연 장폴의 진실은 무엇인지가 남아있다. 관객은 그가 해리를 죽였다는 걸 알지만 왜 죽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마리안 때문인지 해리의 딸 때문인지, 태양이 알고 있다라는 이전의 제목이 수긍이 간다. 영화 장면 대부분이 뜨거운 여름 집 안 수영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덧.

1. 마리안이 해리한테 장폴은 휴가가 겨우 한 달이라고 말하니까 해리가 가엾는 장폴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많은 프랑스 영화들이 긴 휴가지의 권태로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이 영화도 네 명의 주인공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은 단촐하게 집 안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 여름 휴가는 짧아서 그런지 여름 영화들이 대체로 극적이고 소란스럽다. 여름 영화도 우리가 여름 휴가를 즐기는 방식과 닮아있다.

 

2. 샬롯 갱스부르의 엄마 제인 버킨이 해리의 딸로 등장한다. 제인 버킨한테도 이토록 앳된 시절이 있었다니..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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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두 영화를 봤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면서 다음 날 볼 <설국열차>보다 재밌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더 테러 라이브>가 <설국열차> 제작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비용으로 제작한 거를 감안하면 완성도는 <더 테러 라이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일종의 재난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는 테러범, 또 하는 인간의 부주의로 인한 빙하기 시작. 왜 우리는 재난을 좋아하는 걸까. 그리고 왜 찐득한 여름만 되면 재난 영화로 관객을 오싹하게 하려는 걸까. 가상의 재난 후폭풍을 상상하며 찐득함을 참아내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려고? 다행히도 두 영화는 휴머니즘을 이용하는 영화는 아니다.

 

<더 테러 라이브>가 테러범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기득권의 메커니즘을 풍자한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방송국은 테러범과 거래를 하고 앵커는 자신의 미래 커리어를 위해 국장과 거래를 하고 국장은 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테러범도 앵커도 이용한다. 국장한테 테러범과 앵커의 위치는 같다. 앵커가 테러범을 대하는 태도는 위에서 내려다는 보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면서 앵커는 위에서 응시되는 입장에 처한다. 앵커는 복잡한 감정 기복을 겪는다. 처음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테러범과 연대하는 척하지만 나중에는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배신감 탓에 테러범한테 연대감을 슬며시 느낀다. 이 세상이 점점 폭력적(물리적이건 심리적이건)이게 되는 건 공감의 힘이 사라지는 탓이라고 했다.

 

<설국열차> 역시 비슷한 논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생물이 사는 유일한 공간인 설국열차. 열차의 끝칸과 앞칸에는 선명한 카스트가 존재한다. 끝칸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18년을 살았다. 앞칸에 사는 소수는 세상의 종말로 사라진 줄 알았던 신선한 과일과 스테이크, 생선을 먹으며 살아간다. 지구 종말 후에도 인간이란 생명체의 본성은 변함없이 똑같다. 가난 속에서 기초 생활권 투쟁에 일생을 바치는 계급과 넘치는 풍요 속에 권태로 흥청거릴 수 밖에 없는 계급. 질서와 철저한 통제만이 필요한 소수의 지배계급.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이든 혁명이든 득을 얻기 전에 많은 이들의 목숨은 사라져간다. 반란이 성공하면 혁명이 되고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리지만 반란이 실패하면 죽은 사람들은 그저 개죽음일 뿐.

 

둘째, 두 영화는 닫힌 공간을 다룬다. 나는 닫힌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무척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열린 공간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닫힌 공간에서는 카메라를 잘 알고 잘 다루지 못하면 지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닫힌 공간에서 카메라의 역할은 몹시 중요하다. <더 테러 라이브>는 스튜디오란 아주 좁은 제한적 공간이다. 핸드핼드와 클로즈업 흔히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떻게 긴장감을 만들어내는가, 보는 것도 재밌다. 카메라는 때론 빨리 때론 흔들리며 때로는 인물의 눈동자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 앵커는 초조한듯 버튼을 연신 누르거나 물을 마시거나 메모를 하거나, 아주 디테일한 부분으로 승부를 건다. 재난 영화인데도 CG가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축에 속하는데 긴장감은 최고다. 물론 대사가 주는 긴장감을 빼 놓을 수 없다.

 

반면에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닫힌 공간이긴 하지만 열차 칸이 길기 때문에 열린 공간과 같은 방식으로 카메라를 사용한다. 꼬리 칸에 있는 사람들이 엔진 칸으로 전진하면서 스쳐지나가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물론 제작비 쏟아 부운 실내 세팅을 우리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왜 저런 식으로 시각 효과를 주려하나, 하고 안타깝다. 두 영화가 닫힌 공간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 방식은 아주 다르다. <설국열차>는 어찌 보면 열차의 세트를 보여주려고 액션씬도 추가한 게 아닌가 싶다.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제목처럼 열차가 주인공이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배우는 틸다 스윈튼 뿐. 열차를 위해 인물의 특성들이 희생되는 느낌이다. 내가 블록버스터 보기를 꺼리는 이유가 인물이 중심이 아닌 기술적 발전을 뽐내서 공허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거의 공허 단계까지 갈 뻔했다. 한편으로 이해는 한다. 세계시장 배급을 염두에 두고 제작됐으니 보편성에 가장 큰 무게중심을 두었을 터. 변두리 관객의 취향은 버리고. 설국열차는 감독 자신의 딜레마일 수도 있을 듯. 세계시장이냐 취향이냐. 설국열차에 마지막 칸에 탑승한 승객들이 죽음이냐 아님 개처럼 살아도 생존이냐듯이. 거스 반 산트 감독처럼 주류 영화 찍고 사이사이 작은 영화 찍어서 취향도 버리지 말았으면...

 

셋째, 결론 부분은 두 영화가 아주 다른 거 같으면서도 비슷하다. <더 테러 라이브>가 재난 영화답지 않게 일말의 희망도 남겨주지 않는다. 테러범이 사살되고 건물이 붕괴 직전에 있을 때 앵커는 건물의 폭탄 버튼을 눌러 자폭의 길로 간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세상, 혹은 세상에 대한 복수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거 같다.

 

반면 <설국열차>는 기차는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이다. 지구멸망 때 기차에서 태어나 땅을 모르는 한 소녀와 다섯 살 난 꼬마만이 설국열차에서 탈출한다. 만년설로 사방이 뒤덮인 봉우리로 북금곰이 걸어간다.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곧 성인이 될 소녀와 어린 꼬마는 생존하기 위해 설국열차 안에서만큼 투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도 지구가 멸망한 후에도, 삶은 여전히 녹록치않은 아주 사실적 견해로 두 아이가 겪게 될 고난을 상상하게 되니, 또한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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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랜드 - 모든 것이 평평한 2차원 세상
에드윈 애벗 지음, 윤태일 옮김 / 늘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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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하다 이 책을 알게 되었는데 참 오묘한 책이다. 더불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궁금하다. 다각형의 세계를 의인화해서 줄거리를 이어가는데 정말 신기하다. 플랫랜드, 즉 평면 세계에서 다각형의 계급 세습과 각 도형이 사물과 현상을 보는 법에서 시작한다. 가장 밑에 있는 계급 이등변삼각형에서 성직자 계급인 원까지. 그리고 계급이 높을수록 후손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변을 가지게 된다. 평면세계에서 선분만으로 신분이 인식될 때 다각형을 구별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화자는 정사각형으로 나중에 3차원에서 온 구를 만난다. 원은 다각형이다. 변이 너무 많아서 그 각을 눈으로 알아차릴 수 없을 뿐인 다각형. 정사각형의 말에 따르면 원과 차원이 다른 완전체로 묘사한다. 플랫랜드에 살던 사각형한테 높이라는 개념은 획기적이다. 높이를 의미하는 "위쪽으로"란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다. 3차원은 21세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시간의 상대성도 당연하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세기고 빅토리아 시대란다. 빅토리아 시대를 좀 찾봤더니 전원적 삶의 패턴을 희생해서 산업적, 물질적 풍요를 얻은 시기로 물질적 팽창과 정신적 성숙의 괴리가 심했던 과도기적 시기라고. 이 책은 그래서인지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다. 먼저 계급에 관한 이야기다.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고 사회적 차별이 일으킬 커다란 파장을 우의적으로 말한다.

 

"우리 플랫랜드에서는 여자들 거실에서의 신학과 다른 곳의 신학이 완전히 다릅니다. 언어와 사고에서 이렇게 이중 훈련을 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어떤 때는 너무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까 나는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그들이 세 살이 되어 엄마의 보살핌으로부터 떼어질 때, 옛날에 배웠던 언어를 잊어버리고 과학의 어휘와 숙어들을 배울 때 그러합니다. 3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더 영민했던 지적 능력과 비교해 보면, 현재 우리가 수학적 진리를 파악하는데 더 취약하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대중적인 책 한 권을 정독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성(=여성)에게 은밀하게 전달할 때 일어날 위험성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남자 아이의 경솔함이나 불순종으로 인해, 그 어머니가 논리적 변증의 비밀을 알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아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의 지적능력이 약화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나는 여성교욱의 통제에 대해 재고해 볼 것을 고위 당국자에게 조심스럽게 건의하는 바입니다."(105)

 

정사각형이 다른 세계, 즉 3차원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으로 우선 저항하고 다음에 감탄한다. 절대적인 게 없는 시기로 넘어가는 시점인데 정사각형이 미지의 세계에 대해 설득한 힘이 없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은 빅토리아 시대나 플랫랜드의 시민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새로움이란 게 어떤 유형의 것이 아니라 가치나 습관, 인식같은 무형의 것을 전복해야할 때 더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과 2 사이에 실제로는 무수한 수들이 존재한다. 수의 개념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기는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다시 수 개념은 1과2 사이에 존재하는 수들에 대해 모두 잊고 플랫랜드 시민들처럼 기존의 인식법으로 사물과 현상을 대하는 요요현상을 겪는다.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인식법에는 한계가 있는 거 같다. 수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차원을 요구하는 일에서도 단순화 시키려는 기질이 작용한다. 앎과 행동이 일치할 수 없고 한 때 정사각형처럼 그 괴리를 고민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고민도 엷어지고 플랫랜드에 주저앉고 마는 거 같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뭐하나, 하는 자조로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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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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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말에 고갱전에 다녀와서 고갱을 모델로한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다. 아무리 실제 인물에 기초를 두고 있어도 픽션은 픽션인데 난 자꾸 고갱의 삶과 연결하려는 우둔함을 버릴 수 없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스무살 여름방학이었다. 현실을 초월한 스트릭랜드한테 뭔지 모를 숭고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치면서 현실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은 스트릭랜드의 일대기를 추적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일생을 통해 '미'에 대한 인간의 자세 혹은 관점에 대한 고민이다.  스트릭랜드는 이상향을 추구할 운명을 짊어졌다. 현실은 그저 정신세계를 담기 위한 유형의 그릇일 뿐이다. 보통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자잘한 요소들은 스트릭랜드한테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기인이자 도인같은 느낌인데 스트릭랜드가 추구하는 이상세계의 실체는 모호하다. 그 어느 누구도 모른다. 스트릭랜드 자신조차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그렇게 따라갈 뿐이다. 화자 '나'의 서술시점으로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한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스트릭랜드의 주변인을 통해 형상화한다. 집과 가족을 떠나기 전에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통해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파리에 와서 그저그런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로브를 통해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암시한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만큼 소설에서 큰 역할을 한다. 스트릭랜드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면 스트로브는, 화가 흉내-재능도 열정도 없이 화가가 하나의 직업인-를 낸다. 스트로브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지는 못 하지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알아보는 심미안이있다. 이런 경우, 신의 장난질처럼 여겨진다. 스트로브는 한 눈에 스트릭랜드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스트릭랜드한테 경멸과 배신을 당하면서도 심지어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제물로 바친다.

 

두 사람의 성격을 대조해 보는 것도 재밌다. 스트릭랜드는 인간이 다른 사람한테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예의나 공손함이 없는 인물이고 자기 자신한테도 관심이 없다. 인간 사회에서 이런 사람한테 천재라는 이유로 우리는 관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서머싯 몸은 그래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스트로브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하는데 그 대가는 혹독하다. 아내의 배신과 끊임없는 경멸을 초래한다. 동정을 받아야할 순간에도 그의 부지런한 배려심과 천성적 가벼움이 그의 성품의 가치를 하찮게 만든다. 불공평하지 않나. 예술 세계는 일반 세계와 다른 질서가 있다고 할 수 있나. 스트릭랜드 혹은 고갱의 타히티행은 일반적 세계 질서에서 탈출이다. 은둔자로 살아도 아무도 수군대지 않는 곳. 타인에게 비춰진 자신에 대해 신경 쓸 필요없는 곳이고.

 

예술가로 사는 일과 예술 언저리를 맴도는 감상자 둘 다 현실에서 말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말을 한다. 두 인물 모두 영혼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102)

 

2.

고갱전은 실망스러웠는데 그림이 별로 없는 게 첫째 이유다. 게다가 고갱과 현대 작가들을 묶어 원래 전시회 이름은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다. 엄밀히 말하면 이 전시회는 고갱전이 아니라 낙원을 주제로 묶은 것이다. 난 낙원이란 단어가 거슬린다. 낙원이란 말이 갖는 이미지가 있는데 고갱=낙원으로 값싸게 팔아먹는 경박함이 엿보인다. 스트로브가 한 말처럼 현대 작가들한테도 이상향은 힘겨워 보이긴 마찬가지다. 고갱을 좋아라해서 그런게 아니라 예술을 일반화하고 대중화하는 것 까진 좋은데 지나친 상품화가 눈에 보인다. 모두가 오디오 가이드가 안내하는대로 그림을 보고 오디오 설명이 없는 그림은 지나치며 관람 후 몇 군데 설치된 포토존에서 똑같이 인증사진을 찍는다. 전시회 관람도 하나로 규격화가 돼버려서 사진만 같은 데서 찍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본 감상도 비슷하게 느끼고 전시회 관람을 마무리하게 조장하는 거 같다. 우리한테 낙원은 하루의 즐겁고 간편한 문화생활일 수도 있다. 고갱이 추구한 낙원과 우리가 추구하는 낙원은, 심연의 깊이가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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