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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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말에 고갱전에 다녀와서 고갱을 모델로한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다. 아무리 실제 인물에 기초를 두고 있어도 픽션은 픽션인데 난 자꾸 고갱의 삶과 연결하려는 우둔함을 버릴 수 없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스무살 여름방학이었다. 현실을 초월한 스트릭랜드한테 뭔지 모를 숭고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치면서 현실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은 스트릭랜드의 일대기를 추적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일생을 통해 '미'에 대한 인간의 자세 혹은 관점에 대한 고민이다.  스트릭랜드는 이상향을 추구할 운명을 짊어졌다. 현실은 그저 정신세계를 담기 위한 유형의 그릇일 뿐이다. 보통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자잘한 요소들은 스트릭랜드한테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기인이자 도인같은 느낌인데 스트릭랜드가 추구하는 이상세계의 실체는 모호하다. 그 어느 누구도 모른다. 스트릭랜드 자신조차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그렇게 따라갈 뿐이다. 화자 '나'의 서술시점으로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한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스트릭랜드의 주변인을 통해 형상화한다. 집과 가족을 떠나기 전에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통해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파리에 와서 그저그런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로브를 통해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암시한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만큼 소설에서 큰 역할을 한다. 스트릭랜드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면 스트로브는, 화가 흉내-재능도 열정도 없이 화가가 하나의 직업인-를 낸다. 스트로브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지는 못 하지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알아보는 심미안이있다. 이런 경우, 신의 장난질처럼 여겨진다. 스트로브는 한 눈에 스트릭랜드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스트릭랜드한테 경멸과 배신을 당하면서도 심지어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제물로 바친다.

 

두 사람의 성격을 대조해 보는 것도 재밌다. 스트릭랜드는 인간이 다른 사람한테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예의나 공손함이 없는 인물이고 자기 자신한테도 관심이 없다. 인간 사회에서 이런 사람한테 천재라는 이유로 우리는 관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서머싯 몸은 그래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스트로브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하는데 그 대가는 혹독하다. 아내의 배신과 끊임없는 경멸을 초래한다. 동정을 받아야할 순간에도 그의 부지런한 배려심과 천성적 가벼움이 그의 성품의 가치를 하찮게 만든다. 불공평하지 않나. 예술 세계는 일반 세계와 다른 질서가 있다고 할 수 있나. 스트릭랜드 혹은 고갱의 타히티행은 일반적 세계 질서에서 탈출이다. 은둔자로 살아도 아무도 수군대지 않는 곳. 타인에게 비춰진 자신에 대해 신경 쓸 필요없는 곳이고.

 

예술가로 사는 일과 예술 언저리를 맴도는 감상자 둘 다 현실에서 말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말을 한다. 두 인물 모두 영혼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102)

 

2.

고갱전은 실망스러웠는데 그림이 별로 없는 게 첫째 이유다. 게다가 고갱과 현대 작가들을 묶어 원래 전시회 이름은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다. 엄밀히 말하면 이 전시회는 고갱전이 아니라 낙원을 주제로 묶은 것이다. 난 낙원이란 단어가 거슬린다. 낙원이란 말이 갖는 이미지가 있는데 고갱=낙원으로 값싸게 팔아먹는 경박함이 엿보인다. 스트로브가 한 말처럼 현대 작가들한테도 이상향은 힘겨워 보이긴 마찬가지다. 고갱을 좋아라해서 그런게 아니라 예술을 일반화하고 대중화하는 것 까진 좋은데 지나친 상품화가 눈에 보인다. 모두가 오디오 가이드가 안내하는대로 그림을 보고 오디오 설명이 없는 그림은 지나치며 관람 후 몇 군데 설치된 포토존에서 똑같이 인증사진을 찍는다. 전시회 관람도 하나로 규격화가 돼버려서 사진만 같은 데서 찍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본 감상도 비슷하게 느끼고 전시회 관람을 마무리하게 조장하는 거 같다. 우리한테 낙원은 하루의 즐겁고 간편한 문화생활일 수도 있다. 고갱이 추구한 낙원과 우리가 추구하는 낙원은, 심연의 깊이가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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