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두 영화를 봤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면서 다음 날 볼 <설국열차>보다 재밌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더 테러 라이브>가 <설국열차> 제작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비용으로 제작한 거를 감안하면 완성도는 <더 테러 라이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일종의 재난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는 테러범, 또 하는 인간의 부주의로 인한 빙하기 시작. 왜 우리는 재난을 좋아하는 걸까. 그리고 왜 찐득한 여름만 되면 재난 영화로 관객을 오싹하게 하려는 걸까. 가상의 재난 후폭풍을 상상하며 찐득함을 참아내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려고? 다행히도 두 영화는 휴머니즘을 이용하는 영화는 아니다.
<더 테러 라이브>가 테러범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기득권의 메커니즘을 풍자한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방송국은 테러범과 거래를 하고 앵커는 자신의 미래 커리어를 위해 국장과 거래를 하고 국장은 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테러범도 앵커도 이용한다. 국장한테 테러범과 앵커의 위치는 같다. 앵커가 테러범을 대하는 태도는 위에서 내려다는 보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면서 앵커는 위에서 응시되는 입장에 처한다. 앵커는 복잡한 감정 기복을 겪는다. 처음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테러범과 연대하는 척하지만 나중에는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배신감 탓에 테러범한테 연대감을 슬며시 느낀다. 이 세상이 점점 폭력적(물리적이건 심리적이건)이게 되는 건 공감의 힘이 사라지는 탓이라고 했다.
<설국열차> 역시 비슷한 논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생물이 사는 유일한 공간인 설국열차. 열차의 끝칸과 앞칸에는 선명한 카스트가 존재한다. 끝칸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18년을 살았다. 앞칸에 사는 소수는 세상의 종말로 사라진 줄 알았던 신선한 과일과 스테이크, 생선을 먹으며 살아간다. 지구 종말 후에도 인간이란 생명체의 본성은 변함없이 똑같다. 가난 속에서 기초 생활권 투쟁에 일생을 바치는 계급과 넘치는 풍요 속에 권태로 흥청거릴 수 밖에 없는 계급. 질서와 철저한 통제만이 필요한 소수의 지배계급.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이든 혁명이든 득을 얻기 전에 많은 이들의 목숨은 사라져간다. 반란이 성공하면 혁명이 되고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리지만 반란이 실패하면 죽은 사람들은 그저 개죽음일 뿐.
둘째, 두 영화는 닫힌 공간을 다룬다. 나는 닫힌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무척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열린 공간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닫힌 공간에서는 카메라를 잘 알고 잘 다루지 못하면 지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닫힌 공간에서 카메라의 역할은 몹시 중요하다. <더 테러 라이브>는 스튜디오란 아주 좁은 제한적 공간이다. 핸드핼드와 클로즈업 흔히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떻게 긴장감을 만들어내는가, 보는 것도 재밌다. 카메라는 때론 빨리 때론 흔들리며 때로는 인물의 눈동자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 앵커는 초조한듯 버튼을 연신 누르거나 물을 마시거나 메모를 하거나, 아주 디테일한 부분으로 승부를 건다. 재난 영화인데도 CG가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축에 속하는데 긴장감은 최고다. 물론 대사가 주는 긴장감을 빼 놓을 수 없다.
반면에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닫힌 공간이긴 하지만 열차 칸이 길기 때문에 열린 공간과 같은 방식으로 카메라를 사용한다. 꼬리 칸에 있는 사람들이 엔진 칸으로 전진하면서 스쳐지나가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물론 제작비 쏟아 부운 실내 세팅을 우리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왜 저런 식으로 시각 효과를 주려하나, 하고 안타깝다. 두 영화가 닫힌 공간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 방식은 아주 다르다. <설국열차>는 어찌 보면 열차의 세트를 보여주려고 액션씬도 추가한 게 아닌가 싶다.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제목처럼 열차가 주인공이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배우는 틸다 스윈튼 뿐. 열차를 위해 인물의 특성들이 희생되는 느낌이다. 내가 블록버스터 보기를 꺼리는 이유가 인물이 중심이 아닌 기술적 발전을 뽐내서 공허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거의 공허 단계까지 갈 뻔했다. 한편으로 이해는 한다. 세계시장 배급을 염두에 두고 제작됐으니 보편성에 가장 큰 무게중심을 두었을 터. 변두리 관객의 취향은 버리고. 설국열차는 감독 자신의 딜레마일 수도 있을 듯. 세계시장이냐 취향이냐. 설국열차에 마지막 칸에 탑승한 승객들이 죽음이냐 아님 개처럼 살아도 생존이냐듯이. 거스 반 산트 감독처럼 주류 영화 찍고 사이사이 작은 영화 찍어서 취향도 버리지 말았으면...
셋째, 결론 부분은 두 영화가 아주 다른 거 같으면서도 비슷하다. <더 테러 라이브>가 재난 영화답지 않게 일말의 희망도 남겨주지 않는다. 테러범이 사살되고 건물이 붕괴 직전에 있을 때 앵커는 건물의 폭탄 버튼을 눌러 자폭의 길로 간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세상, 혹은 세상에 대한 복수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거 같다.
반면 <설국열차>는 기차는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이다. 지구멸망 때 기차에서 태어나 땅을 모르는 한 소녀와 다섯 살 난 꼬마만이 설국열차에서 탈출한다. 만년설로 사방이 뒤덮인 봉우리로 북금곰이 걸어간다.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곧 성인이 될 소녀와 어린 꼬마는 생존하기 위해 설국열차 안에서만큼 투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도 지구가 멸망한 후에도, 삶은 여전히 녹록치않은 아주 사실적 견해로 두 아이가 겪게 될 고난을 상상하게 되니, 또한 절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