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왜 수학이 싫어졌을까?>, 올리비에 페이용

 

 

 

 

 

 

기억 속에 나는 수학을 싫어했던 어린이가 아니었으나 점점 수학을 싫어하는 청소년으로 자랐고 성인인 지금은 숫자도 잘 못 읽어서 은행 거래할 때 웃긴 헤프닝이 벌어지곤 한다. 삼십만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삼만원을 입금하고 삼십만원이라고 우기는 둥-.-; 수학적 사고가 일상에서 많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씩 인식하면서 수학이란 학문의 실체에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수학 주변부를 다루는 책을 탐독했던 적이 있다.몇 권을 읽은 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수학은 연산이나, 방정식, 미적분, 함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학의 본질은 철학의 본질과 비슷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이 사물의 현상이나 본질을 언어로 탐구한다면 수학은 탐구 도구가 숫자라는 것. 수나 숫자의 개념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일반인은 정수의 세계에서 산다. 1 다음에 2는 몹시 임의적 정의다. 1과 2 사이에는 실은 무수한 무리수들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 무리수들은 무시하고 1 다음에 2라는 질서체계를 사용하길 약속한다. 이건 일반인의 이야기고. 수학 교육이 실은 사람들한테 수학을 멀리하게 만든다. 과거에 공식 위주의 교육이었다면 현재는 언어로 수학을 설명한다고 한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개념에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고 수학과 점점 이별을 한다.

 

수학자들은 어떨까? 수학자의 미의 개념과 미학자나 예술가의 미의 개념이 다르다. 수학자가 어떤 조각작품을 볼 때 점, 선, 면등으로 이루어진 다각형과 곡선의 패턴을 인식한다고 한다. 그 패턴이 질서정연할 때 수학자는 그 조각품을 아름답다고 말한단다. 수학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질서 밖의 세계를 탐구하는 이들이다. 수학자들이 하는 일은 수학사 2000년이란 긴 시간동안 제시된 문제들에 대한 접근방법을 찾아내고 그 접근법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사람들이다. 즉 살아가는 원리와 마찬가지다. 인생에 장애와 문제는 원래 있기 마련이고 문제에 대한 대처법을 찾아내서 적용해보고 효과가 있는지 검증하는 일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한다.

 

이 다큐는 수학의 필요성을 슬며시 제시하는데 필요성에는 완전 동의하지만 수학적 접근법을 제시하는 건 다큐감독이 할 일이 아니라 수학자의 몫이리라.

 

2. <ID: 시카고걸>, <홈스는 불타고 있다>

 

 

              

 

 

 

 

 

 

 

 

 

 

 

 

 두 편 모두 시리아 내전에 관한 다큐이다. 솔직히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집트, 튀니지에서 SNS로 독재정권이 퇴진한다는 이야기는 기억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CNN을 틀면 이방인이 보기에 중동지방 소식은 대동소이하다.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 시리아 반군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절망할 것이다. 이 젊은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게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인데.....

 

화면 속에 비친 홈스란 도시는 한때 건물이었던 형상만 남은 잔해들로 가득하다. 건물들이 폭격에 종이조각처럼 구겨지고 주저앉아 있다. 그나마 멀쩡한 형태의 벽면을 지닌 곳도 숨어서 총을 쏘기 위해서 잘라지고 구멍을 파냈다. 철저하게 고립된 도시를 정부군이 매복을 해서 틈만나면 반군을 저격하고 있다. 반군은 정부군한테 무기를 훔치고 힘겹게 외부지원을 받으며 버티고 있다. 이들은 뭘 하던 사람이었나? 평범한 학생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반군지도자는 아시아 축구계에서 유망한 골키퍼였다. 처음 시위는 축제처럼 광장에서 북소리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무차별 포격으로 비무장한 시민을 학살했다. 광장에 모였던 이들은 노래와 춤을 거두고 무기를 들었다. 평화시위가 무력앞에서 무기력하게 되자 평화적 수단으로 자유를 얻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코끝이 찡해지면서 무슨 말인지 너무도 잘 알겠다. 현재 한국에서도 평화적 외침이나 시위는 무기력할 뿐이니...

 

<ID: 시카고걸>은 시카고에 사는 대학 신입생이 SNS를 통해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는 이야기다. 산발적 소규모의 시위를 큰 하나의 시위로 묶는 일을 하고, 현장 동영상을 유투브나 CNN에 노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집트나 튀니지가 단시간에 정권이 퇴진했는데 시리아는 벌써 3년 째라고 한다. 물론 희생자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시카고걸 역시 무기력함을 느끼고 비밀반군에 참여할 걸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기력함을 느끼는 나라의 국민의 마음을 절절히 공감하게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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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언가를 인지하고 알아차리는 행위에 대해 여러 학문영역에서 정의하려는 노력이 있다. 신경과학에서는 뇌의 작용을 연구하고 철학에서는 인식에 대한 정의를 다각도에서 내리려고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인지하고 싶은 것을 인지한다는 말이 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뇌에 새겨진 반복된 패턴대로만 사물과 현상을 본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이러한 인지적 허점에 기반을 둔 이야기다.

 

오랫동안 "남자가 연기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중국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직원으로 파견된 르네가 <나비 부인> 오페라에서 나비 부인을 연기한 여장 남자, 리링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서양인이 동양인을 보는 시선에 관한 대사가 있다. 리링이 소년같은 가슴을 가진 자기가 왜 좋냐고 묻자 르네는 대답한다. 그게 순수한 여학생이고 동양여자는 그렇다고. 르네는 동양 여자에 대한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을 굳건하게 믿는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리링의 벗은 몸을 본 적도 없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는다. 리링을 의심하는 건 자신이 구축한 환상에 대한 믿음을 깨는 것이므로 르네는 리링의 말을 무조건 믿는다. 사랑의 대상이 지닌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이가 대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요소만을 취사선택해서 재조합하는 일만이 필요하다. 환상이 깨지면 사랑도 깨진다. 현실의 많은 커플들이 예증하고 있듯이. 그럼 환상을 유지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이 영화를 개봉 당시 봤을 때, 어떻게 르네는 긴 시간동안 리링이 남자라는 걸 몰랐나, 궁금해 하면서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리링이 남자라는 걸 나중에 알았고 어제 이 영화를 볼 때는 리링이 남자라는 정보를 미리 입력하고 봤다. 리링이 남자라는 걸 알고 봐도 존 론의 연기는 여전히 레전드급이다. 살짝 장국영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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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캉스동안 아름다운 한 호수에 매일 동성애자들이 찾아온다. 아마도 호수 반대편이 이성애자들을 위한 공간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그 호수 반대쪽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태양은 이성애자의 호수나 동성애자의 호수를 고르게 비춘다. 호수 반대쪽을 찾아오는 이들은 빛으로 넘실대는 호수에서 수영을 하거나 수건을 펴고 나체로 누워 일광욕을 한다. 카메라가 다리 아래쪽에서 일광욕하는 이들을 잡는다. 마음에 드는 누군가한테 말을 건네고 마음이 통하면 호수 뒤에 있는 작은 숲으로 걸어들어가 섹스를 한다. 매일 벌어지는 풍경은 똑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해는 매일 뜨고 바람은 매일 불지만 어제의 햇빛과 바람이 오늘의 햇빛과 바람과 다른 것처럼.

 

전반부에 작은 호숫가를 나체로 돌아다니는 이들의 이미지가 주로 나온다. 동물의 왕국을 보는 기분이었다. 군살 없는 매끈한 털을 가진 맹수들이 걸을 때마다 근육질을 드러내고 짝짓기를 하고 무심히 앉아있다 또 다른 짝을 만나 또 짝짓기를 하는. 모든 동물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동물의 세계에서 짝에 대한 충성도보다는 본능에 충실하다. 이 호숫가를 찾는 이들이 그렇다. 그리고 질투도 존재한다. 그 질투가 육욕을 바탕으로 둔 거 같은 느낌이서 사랑보다는 동물의 짝짓기를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2

이렇게 동물적 욕정을 드러내는 게 규칙인 작은 호수가에서 욕정을 넘어서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프랑크는 운명의 미셸을 만난다. 프랑크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라면 저녁도 같이 먹고 밤을 같이 보내야한다고 믿는다. 미셸은 호수에서 만나는 걸로 충분하고 사생활은 비밀로 간직하자는 주의다. 연인 간에 흔히 있는 의견대립일 수 있다.

 

매일 호수에 나와서 혼자 앉아만 있다가 가는 앙리가 있다. 프랑크는 호수에 나오면 앙리 곁에 잠시 앉아 잠깜씩 대화를 나눈다. 앙리와 프랑크는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거 같다. 두 사람은  섹스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함께 밥을 먹거나 술 한 잔을 하는 데 동의한다.(실제로 그러진 않지만) 미셸을 만나 설레고 갈등하는 프랑크를 곁에서 앙리는 지켜본다. 앙리에 대한 정보를 조합해보면 섹스에 탐닉했던 적이 있으나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혼자 지낸지 한 2년 쯤. 그는 혼자 밥먹고 혼자 있는데 지친다고 말한다. 프랑크가 걸어오는 걸 보면 마음이 설렌다고 고백도 한다. 프랑크가 미셸한테 갖는 애절함만큼 앙리도 프랑크한테 애절했다. 겉으로 무뚝뚝하지만 내면의 소용돌마저 무딘게 아니듯이.

 

3

미셸은 전 애인을 살해했다. 프랑크는 목격자지만 형사의 탐문에도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미셸의 살인동기는 영화에서 안 밝혀진다. 프랑크가 목격자이면서 미셸의 살인을 숨기려한다. 미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프랑크 자신의 욕정 때문인지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앙리가 미셸의 범행을 알고 있어서 미셸은 나중에 앙리도 죽인다.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앙리를 프랑크가 본다. 그때 앙리의 말, 니가 보는 앞에서 죽어서 행복해. 어둠이 사방을 덮고 있고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바람 소리 속에서 프랑크는 애절하게 미셸, 하고 부르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어둠에 묻어둔 채 영화가 끝이 난다. 

 

4

사랑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육욕과 사랑이란 감정이 일어나는 걸 구별해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거 같다. 육욕에서 출발해서 드물게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고 둘이 혼재할 때 치명적으로 맹목적이 된다.

 

덧.

몸을 응시하는 방식에서 내 관습에 적잖게 놀랐다. 이 영화는 남자가 남자를 매력적으로 볼 때를 담는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에서 볼 수 있는 각도로, 종종 남자의 육체를 담는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육체에 대한 응시 방식은 이성애자나 혹은 남자가 여자가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해져 있는 걸 깨달았다. 카메라가 여성 신체를 대상화하는 방식에는 비교적 익숙해져 있는데 남성 신체를 대상화하는 걸 거의 처음 본 거 같고 살짝 충격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사용하는 방식은 동성애자가 동성한테 느끼는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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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엄청난 비바람을 뚫고 영상자료원에 가서 시네마 베리테의 창시자 장 루쉬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리고는 백만년 만에 에릭 바누가 쓴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를 펼쳐봤다. 책갈피가 노르스름하게 바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시네마 베리테에 밑줄도 좍좍 그어져있다. 

 

"시네마 베리테는 진실을 추구하는 실험의 개론서 격이었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긴장이 유발될 수 있는 곳에 카메라를 가져가 위기가 조성되길 바라며 위기 상황을 기다렸지만 시네마 베리테는 위기를 재촉하여 상황을 포착하였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제작자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이길 바랐지만 시네마 베리테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주체적으로 영화에 참가하게 하였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상황에 관여하지 않는 방관자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시네마 베리테는 상황의 위기를 조성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카메라에 다가올 수 있는 사건들에서 진실을 찾았지만, 시네마 베리테는 "인위적인 환경에 의해 감추어진 진실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301)

 

<조금씩 조금씩>은 시네마 베리테보다는 극영화같다. 심지어 줄거리도 있다. 니제르 출신의 다무레는 조금씩 조금씩이란 무역회사 사장이다. 멋진 고층건물을 갖고 싶어 고층건물이 많은 파리를 둘러보려고 파리로 간다. 파리의 에펠탑이 파리가 아니라고 믿는 다무레는 파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알기 위해 잠시 파리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다무레가 보는 파리와 파리인의 삶이 담긴다. 이방인인 다무레가 보기에 파리인은 탁한 공기 속에서 살고 조그만 콘크리트 벽에 갇혀 산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인 집에 사는 게 어떤 지 모르는 친구들한테 그 기이함을 적어 엽서로 보내지만 대자연 속에서 사는 친구들은 그가 도시에 가더니 미쳤다고 생각한다. 아파트에서 어떻게 가축을 기르냐고. 두 문화의 충돌이 유머스럽게 드러난다. 다무레는 니제르에서 대자본가이다. 마음에 드는 비싼 수제 자동차를 일시불 현금으로 지불하며 프랑스인 설계사한테 고층건물 도면을 의뢰한다. 길에서 그가 만난 아프리카인에게 형제라 부르며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나중에는 백인 비서를 고용해 니제르로 데려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통해 다무레는 파리란 도시를 조롱하는 같았는데 영화를 조금 더 보다보면 오히려 아프리카인의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이 더 이국적인 볼거리로 묘사되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를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이 다큐를 보면 감독의 의도와 별개로, 아프리카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관찰하고 있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시네마 다이렉트니 시네마 베리테니 해도, 일단 카메라를 쥔 사람은 권력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논쟁이 나왔다. 시선은 권력이란 말이 있듯이, 카메라에 담겨진 상황들은 감독이 선택한 상황들이다. 다큐멘터리는 관찰에서 나온 진실이라는 본질을 배반하는 연출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피사체나 인터뷰이들은 아무래도 타자화 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장 루쉬 역시 이런 비난을 좀 받았다고 한다.

 

다무레 혹은 감독이 파리를 관찰하고자 한 의도와 달리 관객은, 특히 오늘날의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아프리카인을 관찰할 수 밖에 없다. 자본과 부인의 수가 비례해서 돈이 많으니 부인을 또 안 둘 수 없다는 말이나 파리의 (아마도) 최신 의상디자이너가 아프리카 동네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광경을 본다. 다무레와 친구를 따라 온 프랑스인 세 명이 있다. 한 명은 아프리카 출신의 의상디자이너, 또 한 명은 그녀의 친구이자 나중에 다무레의 19번째 부인이 되는 백인 비서, 목동일을 하고 싶다던 노숙인. 이들이 니제르에 와서 문화적 이질감을 겪는다. 그들의 니제르행은 자발적이었지만 정작 니제르에서 도시인의 습성과 권태, 게으름을 벗지 못한다. 결국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택하고 다무레는 무역이란 게 자본의 착취와 축적의 순환이란 걸 깨닫고 도시인이길 포기한다. 고층건물을 버리고 다시 자연과 어울리는 초가집을 지으며 영화가 황망스럽게 끝난다.

 

영화에서 내린 결론은 태어난대로 살자, 이런 분위기이다. 영화는 아주 귀엽고 재밌는데 시네마 베리테의 문제의식은 안드로메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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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4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4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14-08-15 08:54   좋아요 0 | URL
저도 우아하지 못해서..ㅠㅠ
요즘은 젊어지는 거 보다 우아하게 나이드는 데 더 관심이 가는데 우아하기란 힘든 거 같아요..ㅠㅠ
 
Stoner : A Novel (Paperback) - 『스토너』원서 Vintage Classics 765
Williams, John L / Vintage Classics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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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블로그 후기를 보고 읽게 되었는데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된다. 책 뒷표지에 "<Stoner> is a perfect novel, so well told and beautifully written, so deeply moving, that it takes your breath away."라고 뉴욕타임즈의 소개글이 적혀 있다. 나는 이 말을 을 조금 바꾸고 싶다. <Stoner> is NOT a perfect novel, BUT well told and......라고.

 

2

이 소설은 전반적인 서술시점이 3인칭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1인칭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당연히 윌리엄 스토너한테 감정이 이입될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스토너의 일대기다. 연대순으로 스토너의 성장과정부터 스토너의 죽음까지를 묘사한다. 스토너의 일대기는 스토너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평생 우직한 농부였던 스토너의 부모. 스토너를 농대에 보내지만 대학에서 스토너는 농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다. 가르치는 일도 있다는 걸 스토너는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스토너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아내, 이디스. 이디스는 부서질 것처럼 예민해서 스토너의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격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보수적 시기에 형식적으로라도 모범가정을 유지하는데 두 사람 다 최선을 다 한다. 기껍지 않은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천성은 불쾌나 분노를 표현하는 편이 아니고 두 사람은 딸을 얻는다. 대학시절 전쟁이 일어나고 절친 둘이 입대를 한다. 그 중 한 친구가 죽고 사교성 좋은 한 친구는 같은 대학 학장이 된다. 같은 학과 교수와의 갈등으로 학문 정진의 기회가 닫히고 그 암흑기에 애인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그를 영문학으로 이끌었던 교수가 시들어가듯이 스토너도 시들어간다. 세월의 더께에 지적 명석함은 바래고 육체도 풍화된다. 바짝 마른 낙엽에 암이라는 강한 폭풍까지 더해져서 그의 풍화는 가속되고 결국 그는 눈을 감는다.

 

스토너 주변 인물들은 스토너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주로 이용된다. 그래서 소설이 입체적이라기 보다는 좀 진부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덮을 정도로 훌륭한게 갈등상황에서 긴장감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디스와 결혼 전에 만날 때 어쩔줄 몰라하는 초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대학원생 세미나에서 동료 교수 로맥스와 숙적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한테 F를 주자 평가위원회가 열린다. 세 사람의 평가위원으로 그 학생을 심사하는 컨퍼런스에서 마치 법정씬처럼 긴장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캠퍼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 묘사는 스토너 현재와 미래 심리를 수채화처럼 묘사해서 아름답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불타는 햇빛과 더위가 어떤 때는 스토너의 생기를 암시하고 또 어떤 때는 앞으로 다가올 사건의 긴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스토너가 생기를 잃을 때 눈 쌓인 겨울과 거리의 황량함, 스토너가 마음의 버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는 찌는 듯한 더위 등등으로 표현된다.

 

3

스토너는 작가 존 윌리엄의 자아상일 뿐 아니라 보통 우리의 자아상이다. 스토너는 원칙주의자고 완고해서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다 갔다. 그의 출신은 땅이다. 땅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정직하다. 스토너의 전공은 "중세 서정시에 대한 고전 전통의 영향"이고 그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열었던 세미나는 "헬레니즘과 르네상스 문학에서 라틴어 문법의 영향"이다. 그는 문법과 전통의 세계에서 살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원칙에서 벗어난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세미나 수업을 듣던 학생이자 신참 선생과 사랑에 빠졌다. 보통은 비난받을 상황이지만 스토너가 단 한번도 자신의 상황이나 세계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그의 윤리적 일탈을 응원하게 된다. 심지어 친구마저도 그의 일탈을 응원하는 거 처럼 보인다.

 

"In theory, your life is your own to lead. In theory, you ought to be able to screw anybody you want to, do anything you want to, and it shouldn't matter so long as it doesn't interfere with your teaching. But damn it, your life isn't your own to lead. It's-oh, hell. You know what I mean."(207)

 

스토너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산 사람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친구가 말했듯이 스토너의 방식만은 결코 스토너의 방식이 아니라 전통과 사회질서가 제시한 방식이었다. 스토너가 문학이 전통을 계승하고 중세 서정시가 라틴어 문법의 변주라고 믿었듯이. 스토너한테 묘한 애잔함을 느끼는데 아마 스토너의 삶의 방식에서 오는 모순을 어렴풋하게 들여다보았기 때문인 거 같다. 그 모순은 스토너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니까.

 

스토너가 죽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마지막 부분에서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 40년 간 가르쳤던 일이 단 한 권의 별 볼 일 없는 책으로 남아 바래가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처럼 보인다. 그가 죽음을 보는 관점은 이렇다.

 

"Roman lyricists accepted the fact of death, as if the nothing they faced were a tribute to the richness of the years they had enjoyed. Christian poets of the Latin tradition when they looked to death which promised, however vaguely, a rich and ecstatic eternity of life, as if that death and promise were a mockery that soured the days of their living."(41)

 

스토너는 불행해보였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과정을 즐겼으므로.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 영역까지 밀고 나갈 수 있겠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수 없다. 그 삶을 산 자신만이 자신의 삶을 평가할 자격을 갖는다. 그런데 나이들어 자꾸 꼰대처럼 이걸 자꾸 잊는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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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8-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네요. 넙치님..^^
정말 꼼꼼하게 읽으시는게 느껴질 정도예요...

꼰대처럼이라기보다는 보이는게 많아져서이실거예요...
~~~

넙치 2014-08-14 13: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이 쉬우면서도 묘사가 아름다워서 읽는 동안 즐거웠어요.
나이들면서 다양성에 관한 생각은 넓히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참 그게 쉽지가 않네요. 자꾸 내 기준으로 재단하는 몹쓸 행동을..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