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자의 사법활극 - 소송전문기자 주진우가 알려주는 소송에서 살아남는 법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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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 참 멋지다. "활극". 그러니까 한국사회는 활극으로 넘친다. 어쩌면 사는 게 모두 활극일지도.

 

2.  나꼼수의 팬도 아니고 주기자의 팬도 아닌, 객관적 입장에서 보면 책으로서의 가치는 별로다. 책이 일관성 없이 개인적 경험을 적다 갑자기 독자를 의식하며 실용서인척 하는 페이지들이 등장한다. 또 나처럼 주기자의 기사를 안 읽은 사람을 위해서 기사 발췌문이 있기도 하다. 말투도 반말이라 좀 거슬린다. -.-; 주로 어떤 사람들이 읽나 봤더니 주기자의 팬들이다.

 

3.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글 속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 이런 기자 한 명쯤은 있어야 하니까. 소송을 둘러싼 주기자의 경험담이 주를 이루는 글이지만 그의 기자질 궤적을 짐작할 수 있다. 나답게(?) 주기자 개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봤다. 소송으로 잡친 기분을 다음 소송으로 극복한다는 말. 처연하다. 그가 버텨내는데는 사명감이든 팬심이든 필요할 것이다. 때론 두 요소가 혼재할 것이고. 이제부터라도 팬질을 좀 해주어야지. 몸을 사리지 않는 언론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정말 필요하니까.

 

4. 이 책을 읽게된 동기는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다. 지난 해, 두 건의 민사소송이 있었다. 집에. 정확히 말하면 부모님 일이지만. 아마도 올해도 계속 될 거 같다. 포기할까 싶은 마음도 불쑥불쑥 드는데 포기하는 순간 패배자가 될 거 같은 억울함이 솟구쳐 올라 계속 진행중이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회의가 드는데 소송에 대응하지 않으면 얍삽한 이들이 법의 힘으로 당당해지는 결과에 일조하는 셈이 된다. 물리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보는 소송이라 감정적 소모도, 시간이 늘어지니까, 무시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긍정의 힘을 빌면, 법정에 출석하면서 법제도를 가까이서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주기자 말대로 법치주의나 민주주의는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는 없는 제도다. 적극적으로 찾아야하는 게 법치주의며 민주주의다.

 

5. 내가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대리인제도이다. 판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혀 모른다. 그런데도 양측의 주장과 증거를 보고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결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변호인 역시 아무 것도 모른다. 의뢰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기척 하지만 기본 서사에서 관찰자 입장이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전지적 시점을 가져야한다. 전지적 시점은 변호사 경험에서 나오기도 하고 본성에서 나오기도 하는 거 같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튼 제 삼자들이 당사자를 배제한 채 왈가왈부하는 게 재판제도다. 당사자의 억울함 따위는 참작되지 않는다. 법문은 한국말이 아닌 요상한 번역체 투성이어서 한국말로 된 외국어같다.(교정해주고 싶다;;) 이 이상한 외국어가 판정의 기준점이어서 무시할 수 없으며 변론은 그 괴상한 외국어를 얼마나 잘 끌어다 편집해서 구사하는가에 달려있는 것도 같다. 평소에 소홀히 했던 사소한 영수증이 20년 전의 진실을 대신한다. 이런 사소한 문서들을 모으다보면 대체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나, 하는 반문을 하게 된다. 변호사는 그런 반문은 재판에 무익하다고 한다.

 

6. 지난해 법원을 들락거리며 억울한 이들의 탄식을 함부로 들으면 안 되겠다, 다짐했다. 그 탄식의 주인공이 어느날 내가 될 수 있기에. 누가 알았겠는가. 소송이 내 일이 될 줄. 활극은 극장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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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2 0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2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토요일 오후 씨네큐브에서 봤는데, 만석이었다. 나는 씨네큐브용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멀티플렉스의 획일화에 지친 관객이 새로운 걸 찾는데 너무 추상적이면 안되고 다양성이란 범주에 속해야할 것이란 전제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의 태도에 놀랐다. 이미 감동 혹은 영화를 온전히 즐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이들이라 별로 안 웃기는 장면에서도 대체로 웃고 발톱이 빠지는 장면에서도 감정이입으로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낸다. 팝콘을 씹는 소리가 없는 곳이지만 과도한 리액션이 조금은 거슬리는 곳이기도 하다.(대체 나는 왜 이리 삐딱한지). 씨네큐브를 찾는 관객 심리 연구도 좋은 사회문화 연구가 될 거 같다.

 

2.

영화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여자가 모하비 사막을 94일간 걷는 이야기다. 주로 걷는 이야기가 나오며 걷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여자의 과거 편린이 배치된다. 여자는 왜 걷기라는 고행(?)을 시작했나. 엄마의 죽음 후 마약과 섹스 중독, 그리고 이혼. 이보다 더 불행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걷기 예찬을 이 영화를 통해 봤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이웃 블로거가 쓴 생생한 산티아고 순례길 대장정도 읽었고, 장 폴 뒤부아의 <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면>도 읽었다. 삶에 심드렁한 남자가 자작나무 숲에서 길을 헤매며 걷는 이야기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가 감명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셰릴이란 여자가 사막을 홀로 걷는 이미지는 투쟁보다는 모하비 사막의 풍광에 대한 이미지와 음악이 더 인상적이었다. 단 한 장면에서만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린 꼬마가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와 그 노랫말은 풍광을 압도한다.

 

3.

감독의 의도는 삶에 지친 여자가 갱생하는 과정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고 그 방법은 조금 피학적이다. 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마주하면서 몸에 멍들 정도로 걸어야하나. 육체를 혹사시키는 방법으로만 과거와 단절할 수 있나. 육체적 괴로움이 커질수록 정신적으로 힘든 기억들이 이미지로 삽입된다. 정신분석에서 제 1단계, 문제를 마주하기의 물리적 방법이다. 발화의 순간도 잊고 싶은 기억을 마주하는 첫단계인데 여자는 타인에게 말하고 자신을 잘 모르는 전문가란 타이틀을 단 타인이 조언을 하거나 본질을 건드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직접 문제와 대면할 수 있는 수단인 걷기를 택한다. 내가 흥미롭게 본 지점은 왜 걷기를 택했나이다. 걷기도 발화의 효과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나는 상상력이 없는 편인데 물리적 고통에 대한 상상력만은 출중하다.-.-; 걸으면서 겪는 고통을 읽고 보면서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 안 할 거 같다. 사람마다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두운 극장 의자에 앉아 스크린을 마주할 때, 살아있으며 계속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문득문득 생각한다.

 

5.

오늘 영화를 본 후 타인의 삶 엿보기의 흥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타인의 삶을 엿보기는 극장에서든 극장을 나와서든 계속된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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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2-0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쓰신 씨네큐브 이야기는 정말 공감해요. 저도 예전에 몇번 거슬렸던 적이 있어요.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것을 의식하게 되면 자꾸 영화보다는 관객리액션을 보게 되죠. 그리고 이상하게도 점점 영화는 그에 반비례해서 재미없어지는 것 같구요.(저도 삐딱한 모양입니다.)

씨네21에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읽고 보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육체의 고통 이런 거 좋아합니다.


넙치 2015-02-04 12:29   좋아요 0 | URL
정말 공감요! 관객의 오버리액션 때문에 영화가 진짜 별로로 느껴지는 심보는 뭘까요...ㅡ.ㅡ 다른 영화관에서 봤다면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관객이 영화를 심하게 스펙터클로 대상화하기 때문인 것도 같고..^^;; 이 영화 자체가 그런 면이 분명히 있기도 하구요.

아, 육체적 고통 애정하시는군요! 저는 걷는건 좋은데 걷기를 위한 걷기는 자신도 없고 특별한 동기도 못 찾는, 중생이랍니다.^^;;

2015-02-14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영화다. 당연히 미국영화일테지만 뼛속까지 미국인이어야만 하는 속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다. 이스트우드 옹이 만든 영화들이 그랬으니까. 이 영화를 보다보면 역시 미국적 관점이다. 그런데 미국적 관점은 뭔가. 반전영화들도 미국적 관점에서 찍힌 영화들을 보면 많이 불편하다. 그 이유가, 아마도 폭력에는 폭력으로 응징한다는 국가 이데올로기 탓인듯 싶다.

 

미국의 통치 이념은 기독교다. 기독교는 지독한 가부장제를 격력하고 부추긴다. 신은 '아버지'고 아버지의 말은 교리며 따르지 않은 자식들은 벌을 받는다. 신을 아버지로 부르는 종교는, 좁게는 가족 공동체, 넓게는 국가 공동체를 다스리는데 핵심 이념이다. 이 영화는 이 두 가지 공동체에 속하는 크리스란 인물의 개인사를 주로 다뤘다. 배경은 이라크 전이다. 스나이퍼로 전설적 기록을 남긴 인물의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한다.

 

스나이퍼로서 크리스가 행한 일은 미국적 관점에서는 옳은 일이다. 그는 가족을, 국가를 위해 적을 사살했다. 크리스의 입장을, 한편으로 이해하지만 또 한편으로 크리스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에는 아쉬움이 있다크리스가 적이라고 들은 이들이 누구인가. 민간인들이다. 아이부터 수녀,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저격한다. 그들이 폭탄을 운반하고 있기에. 그들은 왜 목숨걸고 폭탄을 운반할 수 밖에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리지 않을 거 같은 질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폭력에는 폭력이란 미국의 통치 개념 탓이다. 적으로 설정한 이들에 대해 크리스 아니 감독은 조금 더 고민했어야했다. 적이란 실체에 대한 고민이 빠져버려서 반전영화인데도 크리스의 영웅담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 크리스가 지키려 했던 것들은 허상일지도 모르는 걸 암시하지만 크리스의 내면적 갈등은 사회에서는 배척되고 크리스는 고립된다. 참전한 한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과정은 설득력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반전영화라고 하기에는 안타까운 점들이 있다.

 

이스트우드 옹에 대한 내 신뢰는 무한하다. 감독이 결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닐거다. 여러 가지 고민 후에 선택한 가지치기라고 믿는다. 개인의 신념이 영화에 전부 드러날 수는 없으니까. 캐스린 비글로우의 <제로 다크 서티>는 아마도 미국에서 만든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반전영화일 것이다. 비슷한 소재로 영화적 볼거리로서 긴장감도 비슷하다. 캐스린 비글로우가 적에 대한 고민으로 멘탈이 붕괴되어 휘청거리는 지점까지 나아갔다면 <아메리칸 스나이퍼>는미디어로 전쟁을 접하는 미국인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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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1-28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단어, 한 문단에도 핵심이 있네요..넙치님..
짧은 글이지만, 프랑스 사건도 있었고, 의미깊은 리뷰입니다..

Étienne Balibar 가 이번 사건에 붙여 기고한 짧은 글 ` Trois mots pour les morts et pour les vivants ` 의 글이 넙치님의 ` 적에 대한 실체` 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니 떠오르네요..~~
˝immigrants – whom an increasingly virulent propaganda reminiscent of the darkest hours of our history paints in the colours of invasion and terrorism in order to make them the scapegoats of our fears, our delusions or our impoverishment.˝

Je suis chalie .. 에서 je suis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어요.



넙치 2015-01-30 22:12   좋아요 0 | URL
홍세화 씨 칼럼 중에, ˝오늘날 테러 행위를 주도한다고 지목되는 이슬람근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수혜자들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란 말이 있습니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로 단순 도식화하는데, 저는 분노가...@.@

나는...이란 말이 갖는 권력이 있는 거 같죠..?
 
보헤미안의 파리 - 창조적 영혼을 위한 파리 감성 여행
에릭 메이슬 지음, 노지양 옮김 / 북노마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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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2월에 분노 게이지 급상승해서 분노 수치를 낮추려고 2월 설 연휴 파리행 티켓을 예약했다. 4박6일이란 짧은 시간. 참 무모한 짓이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책으로 보일 만큼 절박(?)했다. 왕복 24시간의 비행을 버텨낼 만큼의 그 무언가가 파리에 있나. 아니다. 파리가 아니어도 좋았을 것이다. 다만 휴식이 필요했을 뿐. 비행기 티켓 발권하고 또 일사천리로 일정을 짜고....잠시 설레임을 갖고. 여행책자 말고 이번에는 뭘 할까, 하고 도서관에 가서 파리에 관한 책 몇 권을 펼쳤다. 대부분이 쓰레기고(저자들한테는 미안하다) 그 쓰레기 중 좀 읽을만 하겠다 싶은 책이어서 빌려왔다.

 

다 읽고 나니 참 독특한 책이다. 처음에 가이드북인 줄 알았는데 읽다보면 글쓰기 책이다. 저자는 글을 쓰러 파리로 갈 것을 제안한다. 혹 하기도 하는데 읽다보면 저자가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파리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란 공통점 이외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열된다. 게다가 파리에서 글을 쓰기 위해 체류하기 위한 실전 지침, 즉 구체적 경비마련까지도 제시한다. 역으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원고료로 생활하기 힘든 작가일 확률이 높다. 즉 무명 작가일 것이다. 무명 작가는 왜 무명 작가로 남아있을까. 공감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할 경우가 있을 것이고 또는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작가일 경우일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전자가 더 비참할 것이다. 그런데 파리로 가라고 부추기면서 파리에 가서 책 한 권을 완성하는 상상을 하게 부추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팔자 좋았던 어느 해 여름, 두 달을 일정으로 새 노트북을 사서 뉴욕으로 글을 쓰러 떠났다. 돌이켜보면 핑계지만 출발 며칠 전에 새로 산 노트북만 있으면 꼭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뉴욕이라는 공간도 새 노트북이란 매력적 도구도 글을 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런 말을 한다. 집에서 글을 쓰는 습관이 없다면 어디를 가도 글을 쓸 수 없다고. 빙고!

 

그러니 이 책은, 어저면 희망고문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무명 작가들을 두 번 울게 할 지도 모르겠다. 여행자한테 이 책은 더더욱 도움이 안 된다. 저자가 파리에 대한 갖는 흥분은 오롯이 전해져오는데  그 흥분이 자신만을 위한 것처럼 보여 굉장히 유아적 시선의 글처럼 보인다.

 

다만 한 가지 도움이 되는 말이 있다. 퇴고나 탈고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무조건 초고를 완성해라. 격하게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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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2-0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박 6 일도, 엄청난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으니, 결국 가진 자의 몫일 것 같습니다. 불어도 하시고, 파리는 익숙하셔서 소중한 시간이실 것 같아요. 넙치님.. 좀 쉬실 수 있는 시간이시길.. 바래봅니다..

넙치 2015-02-06 10:06   좋아요 0 | URL
이성을 잃었을 때 지른거라 이성이 돌아온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요.ㅠㅠ 근데 모두 환불불가라..ㅠㅠ 가서도 다녀와서도 엄청난 체력방전이 예상되서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더 지배적이에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질거라고 주문을 외워야죠. 아무튼 고맙습니다^^
 

 

 

 

 

 

 

 

 

 

 

믿고 보는 다르덴 형제 영화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를 찍을 때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대체로 인물들을 상황에 던져 놓고 다큐처럼 인물이 대처하는 자세를 주로 카메라에 담는다. 기교없이 진지하게 카메라가 잡아내는 방식은 속에 다르덴 형제의 가치관이 녹아있다.

 

다르덴 형제가 다루는 주제는 주로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개인이 윤리적 선택을 할 때 처하는 딜레마다. 자칫 계몽적이나 교훈적일 수 있는 내용을 다르덴 형제만의 관점으로 전혀 훈계나 계몽을 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할 수 있는 선에서 감독은 뒤로 빠진다.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다르덴 형제는 매번 간결하게, 이런 주제를 잘 제시한다.

 

인물이 처한 상황을 전달하고 인물이 그 상황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에 대한 주변 상황을 보여준다. 사람이 살면서 선택의 상황에 늘 직면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로 극단적 상황에 놓이는데 이 극단이 결코 허구가 아니라 사실적이다. 따라서 인물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택하는 태도는 실제 우리와 몹시 닮아있다. 그 선택이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비난할 수가 없다.

 

이 영화 역시 이런 관점에서 전개된다. 산드라가 병가를 냈다가 복직을 하기 위해 투표를 통해 동료들의 과반수 표를 얻어야한다. 산드라의 복직에 맞서는 당근은 보너스다.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들을  찾아가서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이야기다. 1박2일간의 주말에 겪은 산드라의 이야기기도 하다.

 

노동자의 연대는 살얼음 같다. 각자가 보너스를 선택할 당위성이 있다. 보너스의 용도는 각 개인에게 정말 꼭 필요해 보인다. 여기서 산드라가 보이는 태도는, 한국영화가 보여주는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 산드라는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고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의견을 물어볼 뿐이고 동료가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면 자신한테 투표해달라고 애원하며 설득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애원은 연대를 강요하는 수단일 수 있는데 산드라는 연대를 강요하지 않는다.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지나치게 현실적인게 해피엔딩이 아니다. 절반의 동료가 보너스를 포기하고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를 했지만 산드라의 복직은 무산되었다. 현실에서 있음직한 결말이다. 그런데 이 때 갑이 등장한다. 공장 사장은 절반의 표를 얻은 걸 축하하며 동료들에게 보너스도 줄 거고 계약직 노동자랑 재계약을 안 할테니  대신 복직하라고 한다. 사장은 자신이 내놓은 해결책이 모든 노동자를 위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산드라는 거절한다. 그 누군가를 해고하고 자신이 복직할 수 없다고 말하고 씩식하고 담담하게 걸어나온다. 자신에게 표를 던진 동료들에 대한 예의였고 산드라 브라보!가 나오는 순간이다. 산드라의 선택은 옳지만 우리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산드라의 선택이 빛나보인다. 더불어 갑이 베푸는 호의는 언제나 을의 희생이 내포되어있다. 희생양인 을이 자신이 아니면 눈을 질끈 감고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노동자 연대란 살얼음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걸 갑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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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1-04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요일날 이 영화 보고 왔어요. 시간이 안 맞았는데, 다르덴 형제 영화니까 봐야지 싶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봤어요. 리뷰 쓸까 했는데, 먼저 쓰셨네요.^^

영화 좋았어요.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를 상당히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시킨다고 할까요. 말씀하신신대로 시작 부분만 봐도 그간 다르덴 형제 영화를 봐온 분들이라면, 역시 그 스타일이구나 했을 것 같습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넙치 2015-01-07 17:35   좋아요 0 | URL
저도 토요일에 봤어용. 다르덴 형제의 담백한 사실주의를 격하게 애정하는 1인이에요. 맥거핀님 리뷰는 언제나 갑! 올해는 갑인 맥거핀님 리뷰를 자주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