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 속에 배여있는 고통
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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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 저자를 기억하는 건, 마크 스트랜드가 쓴 <빈방의 빛>이란 역자로서 였다. 호퍼 그림을 잔잔하게 읽어주는 책인데 그림도 좋고 글도 호퍼 그림처럼 수다스럽거나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빈방의 빛>을 읽은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크 스트랜드의 글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역자 후기였다. 이 책을 읽고 <빈방의 빛>을 다시 꺼내서 역자 후기를 읽었는데 역시나 좋다. 그러니까, 박상미 씨의 글을, 글을 낳은 감성을 잊을 수 없다. 호퍼에 흠뻑 빠져서 쓴 역자 후기, 그리고 정신차리고 나서 자신의 글을 바라보면서 호퍼가 아닌 마크 스트랜드의 글을 번역한 걸 인지한 후기, 두 편이 실려있다. 호퍼에 홀딱 빠져있을 때 쓴 글을 읽노라면 스탕달리즘이 오롯이 전해지면서 호퍼를 안 좋아하던 사람도 호퍼 팬으로 만들 정도로 매력적으로 주관적이다. 손택이 말했듯이, 예술 감상에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열정을 필요로 하니까.

 

<나의 사적인 도시>는 아주 매력적 제목이다. 누가 제목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적인 도시라니. <뉴요커>란 책을 냈다는데 이 책은 안 땡긴다.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러나. 아무튼. 저자는 뉴요커다. 뉴욕에 관한 이야기가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뉴욕의 일반적 이야기가 아니다. 한 공간은 아주 많은 것들로 기억되기 마련인데 박상미 씨의 뉴욕은, 일상적이면서도 그 일상이 화가나 작가에 대한 사색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블로그의 글을 모았다고 했는데 좀 억울했다. 왜 나는 그의 블로그를 모른 채 지냈는지. 불행히도 내 검색 실력 부족인지 검색을 해 봐도 그의 블로그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책이 있다. 절제되면서도 지적인 일상적 기록 속에서 공감을 얻기도 하고 새로운 관점을 얻기도 한다. 블로그가 갖는 단편적이고 신변잡기적 실수를 극복한 책이다. 때때로 호퍼 책을 번역하고 있을 당시의 기록도 담겨있어서 마치 저자와 아는 사이 같기도 하는 착각이.ㅋ아쉬운 건 언급된 작품 사진이 없을 때가 많은데 <빈방의 빛> 후기를 읽다보니 아마도 저작권 문제 탓인 듯하다. 가끔씩 저작권법에 화가 치민다.

 

일상이 되는 공간에 애정을 갖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크림치즈 베이글과 커피로 된 아침식사가 일상이 되면 낭만이 아니라 구역질이 나면서 된장찌게와 밥을 그리워하게 된다. 로망이 실재화되면 일상이란 이름으로 권태가 찾아오는데 저자의 시각은 늘 여행자처럼 새롭고 뉴욕을 낭만적 공간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사적인 도시에 날아가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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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주인공이 각자 사랑의 대상을 찾는 영화다. 뒤적여봤더니 2006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어제 아주 새로운 영화처럼 봤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6년, 내가 내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몸부림치던 때였다. 영화 속 세실리아가 현실 도피로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며 꿈을 꾸듯이, 나도 스크린을 바라보다 불이 켜진 후 극장 밖의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그 후 9년이 흘렀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현실 밖을 꿈꾸지 않아서 평온하다.

 

꿈이 없는 비극적 나날들이지만 꼭 꿈이 있어야하나? 꿈을 갖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환상 역시 사회적 쏠림은 아니었나? 모두가 꿈을 가질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꿈을 갖고 이루기위해 노력해야 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태도 역시 꿈을 이루는 일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데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세실리아한테 격하게 공감했었다. 세실리아가 현실 탈출을 꿈꾸고 그 탈출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나도 기뻤고 다시 현실로 내팽겨쳐졌을 때, 그 황망함을 함께 느꼈다. 이제, 네 명의 인물들이 어긋난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볼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대공황기, 웨이트리스로 재능없고 일해도 가난하고 남편은 술마시고 폭력을 휘두르고. 객관적 불행 요소는 다 갖춘 세실리아. 그녀의 불행한 삶의 구성요소들은 그녀한테 예민한 감수성을 선사하고 영화 속 단역을 맡은 배우를 만났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제 막 발돋움하기 시작한 야심찬 배우한테 사람들은 심지어 극중 인물까지도 그의 배역은 하찮다고 말한다. 세실리아만 그 배역은 중요하고 말한다. 현실에서 아무리 하찮은 존재의 삶도 지우고 다시 살 수 없고 중요하듯이, 하찮은 배역도 중요하다는 걸 세실리아는 알아봤다.

 

세실리아가 삶과 영화적 환상을 혼동하는데 이 혼동은 삶을 바탕으로 한다. 아직 별 명성이 없는 배우는 세실리아의 이런 통찰력있는 시각에 반할 수 밖에 없다. 세실리아가 사랑한다고 믿는 영화 속 인물 탐과의 관계를 보면 세실리아가 실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크린 속에 자유롭고 싶다면 어느날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세실리아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한다. 영화 속 지시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다면서 영화 속 인물 탐은 왜 놀이공원에 있는가. 놀이공원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탈현실 공간이다. 탐이 놀이동산에 있는 건 당연한데 여기서 세실리아의 반응이다. 세실리아는 그건 영화에서나 그렇죠, 현실에서는 안 그래요, 라고 말한다. 세실리아는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인물이어서 처음부터 현실에서 도망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처럼.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현실이든 허구든)에서 탈출하는 걸 자유로 여기는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자신이 속한 세계로 되돌아는 자유를 택한다. 이 영화가 단순한 판타지물이 아닌 이유이다. 판타지라면 세실리아는 단역배우랑 헐리우드에 갔어야한다. 꿈을 꾸는 건 잠시 즐거울 수 있으니 꿀 것, 그러나 현실로 돌아올 것. 우디 앨런 옹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영화는 현실과 스크린을 재치있게 잘 섞어서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가 황당하다고 느낄 경우에 그럴듯함이 결여되는데 이 영화는 영화임을 알리고 시작해도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의 본성을 꿰뚫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해프닝과 유머. 다시 보니 참 정교하게 만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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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수다스럽다고 생각했다. 십 수 년만에 다시 봐도 수다스럽다. 한데 유의미한 수다로 다가온다. 우디 앨런 옹이 평생 고찰해 온 부부 혹은 연인 관계에 대한 경우의 수를 포진하고 전개하는 영화다. 한나를 중심으로 한 동생들과 가족 관계를 묘사한다. 비혼자 보다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한테 공감할 부분이 더 많을 지도 모르겠다. 전체 이야기 구조는 한국 아침드라마 같다. 표현 방법이 좀 우아해서 그렇지.

 

우디 앨런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한나(미아 패로우)의 전 남편으로 등장해서 신경쇠약증으로 건강염려증에 걸린 인물로 묘사된다. 극의 흐름과 전혀 관계없이 모노드라마를 하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한나의 동생(다이안 위스트)와 러브러브 모드로 결말 짓는다. 한나는 재혼을 하고 그 남편, 엘리엇은 또 다른 동생, 리(바바라 허쉬)와 바람을 핀다. 엘리엇의 고뇌는 한나도 사랑하고 리도 사랑하는데 있다. 어릴 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양가적이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사회화를 통해 도덕적 윤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엘리엇을 단순한 바람둥이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주기만 하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아내에 대한 반항심리를 토로한다. 배가 불렀지ㅋ.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디 앨런이 고민하는 주제는 사랑은 영원한 게 아니라 움직인다, 라는 것. 우디 앨런은 죽음을 상상하고 극도의 공포를 체험한 후 삶을 바꿔보려고 한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유대교인이 개종을 해보려고 하기도 한다. 일상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잘한 의식하지 못한 일상에는 한 개인의 취향과 성격이 묻어있는 탓이다. 그래서 타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괴벽이나 좀 더 부드럽게 말하면 개성을 지닌 독특한 한 개인이 탄생한다. 습관이나 개성은 바꾸기 어려우니까 자꾸 상대를 바꾸려 하나? 처음에 반했던 상대의 개성과 성격이 시간이 지나면 참을 수 없는 단점으로 보이는 때가 사랑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사랑은 흔들려도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이성으로 추의 무게를 옮기는 게 우디 앨런 옹의 결론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가 연상된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약한 개인을 정말 잘 다룬 영화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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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브라질의 무용수 데자와라가 막 인기를 얻을 찰라에 지구 반대편에서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일상에서 도망쳐서 낭트로 가는 기차에 타면서 시작된다. 개찰을 하지 않아서 검표원이 실랑이를 벌이지만 언어 장벽에 부딪친다. 언어란 보편적인 기호가 아니라 일정 집단의 취향과 기호다. 개찰의 개념이 브라질에는 아마도 없는 거 같은데 깐깐한 원칙주의자 검표원은 언어의 장벽 따위는 뛰어넘을 기세다. 여기에서 유머가 파생된다. 없는 개념을 그것도 언어도 안 통하는데 설명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로드무비가 그렇듯, 데자와라는 기차 안에서 변호사라는 친구를 만나고 법정에도 가고 그 친구의 친구집에도 가고 의뢰인이 사는 작은 섬에도 간다. 데자와라와 주변 인물들은 등장할 때는 주인공과 같은 비중을 갖는데 서사가 진행되면서 엑스트라의 위치로 전환된다. 같이 본 후배는 이런식의 인물배치과 사용에 대해 경악했다. 나는 어쩌면 현실에서 실제 인물간의 관계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주에 만났던 사람을 이번 주에는 안 만날 가능성이 많고 또 기차에서 마주친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다시 마주치는 일반 서사가 어쩌면 더 이상할 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함께 모인다는 면에서 굉장히 능동적이고 자발적이다. 어떤 모임에서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말을 안 하고 듣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현실적 인물 사용과 배치라고 우길 수도 있겠다.ㅎ

 

아무튼, 데자와라는 여행자로서 훌륭하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을 믿는다. 반면에 철도청 검표원은 티켓에 뚫는 구멍만한 세계에서 살다가 설득과정을 거쳐 자의로 합류하기로 하고 여러 가지 우연을 함께 겪는다. 그러다 획기적 제안을 받는다. 브라질 무용수를 찾으러 온 기획사 사장의 꼬득임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가수가 될 꿈을 잠시, 정말 잠시 갖는다. 검표원이 구멍만한 세계에서 나가려고 한 발을 내딪는 순간에 현실은 다시 검표원의 역할을 떠넘긴다. 그리하여 후반부는 이 검표원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유 섬이란 외딴 작은 섬에서 낭트역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낭트로 돌아가는 여정은 시적이다. 서해여서 썰물대라 계속 작은 배로 갈아탄다. 물은 흙과 섞여있고 바람은 분다. 어부들의 투박한 인상과 말투는 진지하다. 바다 위에서 낯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배에서 배로 이동을 하고 깐깐한 검표원은 감사하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마침내 뭍에 내려 허벅지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뻘밭을 걸어서 히치하이킹까지 하는 과정을 멀리서 수채화처럼 담는다. 소금기있는 바람과 물살을 보면서 아, 이 영화는 여름 바캉스가 아니었지, 하고 깨닫게 된다. 검표원의 바캉스였다. 검표원은 철도청 직원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고군분투했다. 그가 뉴욕에 간 거 보다 더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초긍정적 생각을 나는 한다.

 

원리원칙주의자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자기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가 평생 고수했을 원칙을 조금 덜어낸다면 그가 미국에 가서 국민가수가 되는 것만큼 가치있는 일탈이 아닐까. 검표원의 행보를 보면 우리의 맥락없이 쳐대는 몸부림하고 닮아있어서 애정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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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8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9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아트시네마에 갔다가 저녁을 먹으러 종로2가까지 걸어나는데 쿨의 노래가 사방에서 나왔다. 백만년 만에 가보는 종로2가 골목은 여전히 주점들이 정체성을 알리려고 아우성치는 큼직하고 통일성 없는 간판들로 넘쳐났다. 20대 초반이 주 고객인 샤브샤브 집에서도 쿨의 음악은 이어졌다. 밥을 먹고 있는 이들도 쿨을 알까. 나는 쿨의 노래를 듣고 자랐기에 여름에 쿨은 진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사고의 편견은 형성된다.

 

여러 블로거들이 비치보이스의 음악을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조금만 기대했는데도 많이 실망스러웠다. 비치보이스의 음악하면 여름이 떠오르고 흥겨움이 떠오른다.

 

영화는 비치보이스가 대중한테 그런 사고의 편견을 상품화하기 위해 어떻게 착취당했나를 보여준다. 곡을 쓰는 브라이언 윌슨은 어떻게 흥 넘치는 여름음악만 쓸 수 있냐고 제작자한테 대든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우울을 표현하는 곡을 쓰겠다고 하자 여러가지 약물들이 동원된다. 비치보이스는 즐거워야하니까.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든 후에도 여전히 심리치료사한테 감정을 지배받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이야기다. 가수가 아닌 한 사람의 개인사로 바라봐도 불행에 공감이 가야하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방식에 나는 어떤 연민이나 감정도 느끼질 못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존 쿠삭의 멍한 표정만이 남는다.

 

감독을 찾아보니 너무 부자네ㅋ <와일드>, <노예12년> 제작자이다. 다 별로였던 영화들이다. 영화가 플래쉬백과 현재를 교차시키면서 그 당시의 분위기는 잘 살렸는데 감정을 전달하는데 건조하다.불행한 뮤지션의 삶을 이렇게 건조하게 묘사하는 것도 재주인듯.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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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16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요. 슬픈 스토리군요. 기억해둡니다 러브 앤 머시

넙치 2015-08-17 11:5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영화보고 알았어요.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