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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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 부처님을 믿는다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구체적 행위를 안 하지만 만물을 지배하는 신은 존재를 믿는 편이다. 특정 종교에 소속되 있지 않아서 신의 이름도 없고 교리도 없다. 하지만 인간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과 신의 자기장 아래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고 믿는다. 나는 왜 신을 믿으면서 예수나 부처에 대한 '헌신'을 기꺼워하지 않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그 보다는 교리에 맞춰 일상을 재단할 신심이라고 부를만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관 교회"라는 말을 사용한다. 목사의 성경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객같은 태도를 지닌 신도들이 있는 교회를 지칭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일방적 설교를 감상하고 목사의 설교와 지침을 따르는 신도들만이 이상적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입식 해석은 비종교인이 봤을 때, 굉장한 거부감이 든다. 마음 속으로 인간의 영역 밖을 인정한다해도 그걸 표현할 단련된 매끄러운 말을 안 갖고 있을 뿐인데 교인들은 설교와 성경공부로 다져진 기름진 언어로 교회 밖 사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모른다고 해서 사탄은 아닌데 사탄의 기운을 받은 사람 취급 받기 쉽고, 그로 인해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쌓기 쉽다. 비종교인이 인정하는 신은 사탄의 신이라고 단정해버리는데 말을 이어가고 싶은 의지를 싹둑 잘라버리는 거다.

사실 교회가 교리 해석에 대한 자유를 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존경심을 성경에 적힌 문구에 따라 보여야하고 성경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게 실천은 아니지 않는가. 가족과 친구에게 양보하고 진심으로 아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면 교회가 말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중일텐데 교인들은 교회 밖에 있는 걸 커다란 행복을 놓치고 있다면 안타까워한다. 저자의 말대로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한 공동체일 뿐이데 말이다.

이 책의 챕터 중 4,5,6 장은 기독교 역사에 관한 간략한 개괄이다. 이 챕터들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뭘까, 떠올렸다. 역사 속에서도 교회는 늘 권력과 공조체제였다. 왕들은 국익이나 사익에 따라 신을, 교리를 바꾸길 주저하지 않았다. 좋게 보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지만 나쁘게 보면, 인간이 속한 사회가 신을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가 속 좁아보이는 건 기독교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에 관한 담론이 있어왔지만 교회 체제는 점점 더 편협한 공동체가 돼고 있다. 견고하고 높은 담을 쌓고 담 밖의 사람들을 배척하면서도 담장 안으로 안 들어온다고 손가락질하는 모순된 공동체. 교인이 아닌 사람한테 이런 이미지를 주는 교회는 분노나 훈계보다는 담장을 허무는 자세가 마땅하다. 한국교회의 권위적 태도는 이런 일이 당분간은 어렵다는 걸 예측할 수게 한다.

김두식 씨가 썼듯이 교회가 의식과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인간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공감과 사랑을 강조한다면 교회 속에 세상이 들어가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더불어 김두식 씨같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라면 내 발로 찾아가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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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스토리라인이 예측되는 영화다. 적절한 액션을 표피로 한국사회의 소수 이주민의 단면을 섞고 '의형제'라는 한국식 의리를 소스로 뿌린다. 그럭저럭 런닝타임은 잘 간다. 시계를 한 번 밖에 안 봤으니. 송강호는 여전히 산만하면서도 코믹한 캐릭터다. 강동원이 눈에 힘 한 번 줄 때마다 자세를 바로 잡고 설렘을 즐긴다. (강동원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모다. 사막에소 홀로 핀 꽃처럼 가녈프고 곧 쓰러질 거 같은 게 뭘 해도 가슴이 아프다..+_+)  캐릭터도 낯익고, 재현 배우가 송강호와 강동원이라는 차이점만이 있다. 액션도 골목신 아슬아슬하고 평균은 했다. 마초세계의 의리도 고만고만하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영화되시겠고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가족 영화되시겠다.

이에 비하면 장훈 감독의 전작 <영화는 영화다>는 좀 더 색깔 있는 영화다. 이번 연휴 때, 케이블에서 봤다. 소지섭의 간지는 죽음이었다.ㅋ 일반적으로 대사가 있을 거 같은 자리에 인물의 클로즈업이 인상적이었다. 각본을 김기덕 감독이 썼다는 말을 떠올리면 김기덕 감독 스타일인 거 같기도 하지만 침묵이 연출하는 분위기라는 게 또 한 간지하는 영화였다.  

그에 비하면 이 영화는 아주 수다스럽고 산만하다. 송강호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수다스러웠을 영화다. 특이할 만한 점은 총의 등장과 사용이다. 한국영화에서 총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칼 아니면 칼에 준하는 다른 무기들, 쇠방망이(조폭영화에서 종종 등장한다)같은 게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는 홍콩영화처럼 총이 등장해 사람을 죽이고 피를 보여주는 데 굉장히 낯설었다. 내가 총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도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 총기 사용이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거 같다.

메세지는, '그림자' 말대로 "쓸데없이 감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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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 경제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학 이야기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조홍식 옮김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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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문구만큼 참신하거나 창조적 생각들이 들어있는 책은 아니다. 케인즈가 프로이트를 숭배한 이야기도 아니다. 나도 제목 때문에 낚였는데-.-; 원제는 앙띠마뉘엘 데꼬노미antimanuel d'economie로 경제학 입문서에 저항하기 쯤 될까나...구성도 참 산만하게 되어있어서 책장이 안 넘어간다. 챕터별로 저자의 주장을 몇 페이지 쓰고 다음에 읽어보면 좋을 글들이 문학, 철학뿐 아니라 신문기사까지 총 망라한 여러 분야에서 발췌, 수록 되어 있다. 아마 어디 잡지나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게 아닌가, 싶은 구성이다. 발췌문은 편집자가 페이지수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은 거고.  

반자유주의 시장경제에 관해 처음 글을 읽는다면 새로운 시각이겠지만 반자유주의 경제에 관한 글을 좀 접했다면, 이 책에서는 유머러스한 독설이 눈에 들어온다. 체계도 없고 중구난방식이어서 반자유주의 경제 입문서로는 비추다.  제목을 보고 주문했던 독자로서 기대치가 너무 달라 말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쓰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라 지적재산권에 관해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하준 교수는 지적재산권이 독점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지적재산권의 확대로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경제 불균형은 더 커진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지적재산권의 범위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지적재산권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좀 더 직설적이고 국가와 국가간의 불균형보다는 일상적 불균형에 대해 비꼬고 있다. 과격하게도 발전을 저해하는 이기적 행위라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요즘 문화컨텐츠에 강력히 시행되고 있는 저작권법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종종 의문을 품곤한다. 내 일상적 예를 들면 이렇다.    

내 경우에, DVD를 살 때는 극장에서 못 본 영화도 있지만 소장한 DVD 중 절반은 (어떤 경로든)영화를 본 후에 사게 된다. CD 역시 마찬가지일 때가 많다. 들어보고 좋아서 갖고 싶다는 욕구가 발현다. 소유욕은 원래 최초의 체험이나 자극이 전제된다. 파스타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맛 있는 파스타가 있어도 주문할 줄도 모르며 사 줘도 맛 있는 줄 모른다.  

영화나 음반 다운로드 싸이트에서는 제휴 컨텐츠를 이전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에 파일을 팔고 있다. 어떤 최신 한국영화는 3천5백원이나 한다. 몇 백원이면 볼 수 있던 영화들이 열 배도 넘는 가격으로 팔린다. 소비자의 논리가 작용해 망설여진다. 각종 할인혜택을 받으면 1천원만 더 주면 질 좋은 화면으로 극장에서 볼 수 있는데 하면서 말이다. 과연 영화가 10배나 되는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을까 재보게 된다.  

어차피 볼 가치가 있는 영화는 개봉 했을 때 극장에서 봤기 때문에 열 외다. 문제는 극장에서 보기에는 거시기한 영화지만 궁금한 경우 소비자 심리는 저울질을 한다. 내가 지불한 비용에 대한 최대 효과를 점쳐본다. 다른 사람들의 별점이나 잡지의 평을 보고 포기할 때가 많다. 물론 나는 우연히 좋은 영화를 감상할 기회를 포기함과 동시에 안 봐도 그만인 영화를 포기하는 거다. 저작권을 행사하는 판매자 역시 DVD나 CD에 대한 잠재적 구매자 한 명을 잃어버린다. 판매자가 저작권을 요청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품성이 있는 창조물에 대해 마땅한 대가를 지불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험방지는 소유욕을 잠재우며 시장에서 소비자로 활동하는 걸 막는다.  

내가 공짜로 모든 걸 이용하겠다는 게 아니다. 영화나 책, 음악은 충분히 그 독창성을 보호받아야 하지만 찾는 이 없이 보호만 받는 작품이 과연 문화콘텐츠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특히 이름없는 인디싱어송라이터들이나 독립영화들은 더 보호를 받아야하지만 반면에 그 보호 때문에 관객은 접할 의지를 상실한다면 인디뮤직이나 독립영화들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런 논쟁이야 인터넷에서 음악을 규제하기 시작하면서 있었다. 그러나 기업은 완강하다. 각종 음원에 대한 수입을 늘이고 있지만 음반 판매와 수입이 규제 전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상승했는지는 발표한 적이 없다. 관객과 소비자에게 도덕적으로 접근해서 불법다운로드에 대한 죄의식을 심으려고 캠페인을 하고 있다. 죄의식 때문에 지갑을 선뜻 열게 되지는 않는게 시장경제이다. 소비자한테도 이윤추구는 마찬가지여서 이윤발생이 죄의식을 이긴다.   

요즘 예전과 다르게 B급 한국 최신영화들을 못 본다. B급의 영화들이 DVD로 만들어져도 팔리지 안을텐데 파일다운료를 1천원 미만으로 내리면 좋겠다..(거창하게 시작해서 내린 결론이 저렴하지만;;; 시장의 속성이 겉으로는 진지하지만 속으로 저렴한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는 곳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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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dia 2010-03-22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글수준이...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지 못하는 제 자신이 한심해지기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넙치 2010-03-22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난 칭찬에.^^
 
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이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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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를 읽고 작가가 독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에 완전 반했다. 어떤 확신이나 단언보다도 물음표로 문장을 끝내면서 화자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가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 역시 소설 형식을 차용하고 <더 리더>와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묵직한 질문을 한다. 악의 본질, 법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다. 잊혀진 한 통속 소설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의 변주를 교차시켜서 개인의 역사를 풀어가면서 과거 독일의 집단 역사에 대한 환기를 시킨다. 작가는 독일의 히틀러 하에서 벌어진 집단 역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다루는데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더 리더>에서는 한나의 문맹을 통해서였고 <귀향>에서는 뉴욕에서 정치학 교수로 이름을 날리는 자신의 생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제시한다.   

"세상과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했고 그 거리감 속에서 남들의 역할 파괴를 관찰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역할 파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을 뿐 아니라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지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 스스로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진정으로 노력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화자한테는 '행동'이란 중요한 삶의 요소가 결여되어있다. 행동이 가져다 주는 역동성을 관찰하는 게 화자자라면 그가 찾아나선 아버지는 오딧세우스였다. 나치 치하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고 과거를 경험삼아 법의 해체주의를 주장하는 해석가로 변신하는 모험을 즐긴다. 아버지는 이분법에 따르면, 언제나 정의를 실행하는 사람이돼 버린다. 나치 하에서는 나치의 법을 지키고 뉴욕에서는 자유주의의 법을 따른다. 그러나 화자는 정의 뒤에는 그 어떤 목적이 숨어있고 목적만이 정의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목적이 정의를 앞서는지 정의가 목적을 앞서는지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경계가 불분명한 난제에 대한 씨름 속에서 위안은 사랑이 깃든 일상이다. 낮 동안에 일에 몰입하고 성과를 거둔 후에도 저녁에 피자를 먹을지 파스타를 먹을지, 어떤 영화를 볼 지 의견을 주고 받을 사람이 있어야 성취감이 완성된다.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이성이든, 꼬마든, 할아버지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의 실재성이다. 악이 기준에 따라 선이 되고 선도 언제든 악이 될 수 있는 오딧세우스의 모험에서 진정한 귀향은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잘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때다.   

덧. 스위스 작가나 역사에 대한 관심도 0에 가까운데 작가는 스위스의 중립성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다. 한 나라가 한 명의 훌륭한 작가를 갖고 있다는 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이다. 나처럼 제3세계에 있는 독자한테도 작가가 언급한 역사와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주고 나아가 행동하는 인간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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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목이 말을 걸다 - 골목이 품은 서울의 풍경
김대홍 지음, 조정래 사진 / 넥서스BOOKS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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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아이의 뇌 차이는 사물에 대한 인지 태도에 달려있다고 한다. 어른은 어떤 대상을 볼 때 자신의 경험과 인식 범위에서 해석하고는 아는 것으로 간주해서 특징을 범주화해버린다. 아이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 낯설고 새로운 자세로 주의를 집중하고 만지고 적극적으로 다가간다고 한다. 서울은 보잘것 없는 삭막한 도시로 분류하고는 서울을 떠날 궁리만 하다가 올해는 아이같은 시선으로 서울을 좀 들여다보자고 다짐했다.  

지난 주 일요일, 첫 출발로 서울역 11번 출구에서 시작해소 남산 산책로를 걸어서 필동으로 내려왔다. 덕분에 아직 종아리가 얼얼하다. 남산 북측 산책로 역시 공사중이었고! 필동은 개발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는 곳이었다. 한 때, 시나리오 작법 강의를 듣느라 일주일에 한 번씩 갔던 곳이기도 하고 고등학교와 대학 때는 대한극장과 명보극장, 지금은 없어진 스카라 극장엘 드나들곤 했던 곳이다.  

서울이 워낙 추억 만들기를 허락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학창시절에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기도 하고 걷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로 차를 이용하니까 거리에 나섰을 때 눈은 온통 차만 보는 혹사를 당한다. 따지고보면 현대문명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내 탓도 크다.  익숙한 길에 대한 정보가 차량통행량 변화 시간을 알고 막히지 않는 뒷길을 알고 있고 어느 차선으로 주행하면 옆 차선보다 조금 더 빨리 정체구간을 빠져나갈 수 있고..등등 내비게이션이 하는 정보로 머리 속이 가득 차 있다.

저자의 말대로 골목은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다. 차에서 내려 두 발에 의지하는 순간 뇌는 내비게이션 같은 물리적 정보가 아니라 정서적 정보를 불러온다. 볕의 빛깔이 어떤 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그 길을 걸었는지..공간에 대한 기억은 결국 사람에 대한 기억라고 했다.  

저자가 자전거로 혹은 발로 찾은 골목은 시한부 생명을 갖고 있다. 개발과 재정비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첨단으로 바꾸려는 거대한 물결을 맞이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적 인물들의 얼이 배여있고 영화나 책 속에 녹아 있는 서울의 단면인데 무심코 지나쳤다. 이런 무심함이 서울을 공사지향적 도시로 만드는 데 한 몫하고 있는 거다. 골목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가 봐야지, 마음만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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