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이레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더 리더>를 읽고 작가가 독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에 완전 반했다. 어떤 확신이나 단언보다도 물음표로 문장을 끝내면서 화자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가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 역시 소설 형식을 차용하고 <더 리더>와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묵직한 질문을 한다. 악의 본질, 법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다. 잊혀진 한 통속 소설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의 변주를 교차시켜서 개인의 역사를 풀어가면서 과거 독일의 집단 역사에 대한 환기를 시킨다. 작가는 독일의 히틀러 하에서 벌어진 집단 역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다루는데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더 리더>에서는 한나의 문맹을 통해서였고 <귀향>에서는 뉴욕에서 정치학 교수로 이름을 날리는 자신의 생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제시한다.   

"세상과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했고 그 거리감 속에서 남들의 역할 파괴를 관찰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역할 파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을 뿐 아니라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지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 스스로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진정으로 노력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화자한테는 '행동'이란 중요한 삶의 요소가 결여되어있다. 행동이 가져다 주는 역동성을 관찰하는 게 화자자라면 그가 찾아나선 아버지는 오딧세우스였다. 나치 치하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고 과거를 경험삼아 법의 해체주의를 주장하는 해석가로 변신하는 모험을 즐긴다. 아버지는 이분법에 따르면, 언제나 정의를 실행하는 사람이돼 버린다. 나치 하에서는 나치의 법을 지키고 뉴욕에서는 자유주의의 법을 따른다. 그러나 화자는 정의 뒤에는 그 어떤 목적이 숨어있고 목적만이 정의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목적이 정의를 앞서는지 정의가 목적을 앞서는지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경계가 불분명한 난제에 대한 씨름 속에서 위안은 사랑이 깃든 일상이다. 낮 동안에 일에 몰입하고 성과를 거둔 후에도 저녁에 피자를 먹을지 파스타를 먹을지, 어떤 영화를 볼 지 의견을 주고 받을 사람이 있어야 성취감이 완성된다.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이성이든, 꼬마든, 할아버지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의 실재성이다. 악이 기준에 따라 선이 되고 선도 언제든 악이 될 수 있는 오딧세우스의 모험에서 진정한 귀향은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잘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때다.   

덧. 스위스 작가나 역사에 대한 관심도 0에 가까운데 작가는 스위스의 중립성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다. 한 나라가 한 명의 훌륭한 작가를 갖고 있다는 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이다. 나처럼 제3세계에 있는 독자한테도 작가가 언급한 역사와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주고 나아가 행동하는 인간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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