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2 - The Godfather: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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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고 고대했던 <대부2>가 개봉했다. 3시간20분이라는 긴 런닝타임 동안 좁은 공간에 앉아서 두 다리를 번갈아 올렸다 내렸다 밖에 못하는데, 이건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꼿꼿하게 앉아있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고통(?)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이미 한 차례 <대부>시리즈와 알 파치노에 대한 내 애정을 포스팅한 바 있다.

알 파치노의 매력이 절정에 달한 영화이기도 하다. 알 파치노의 쏘는 둣한 눈망울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완전 황홀하다. 스크린으로 본 영화는 기억 속에서 보다도 더 어둡고 슬펐다.  

명화나 명작이 시간이 흐른 후에도 생명력을 갖는데 현재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대부1>보다 <대부2>는 현대와 더 닮아있었고 마이클이 돈 콜레오네로서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은 처절했다. 이민 2세대이면서 마피아 2세대인 마이클은 아버지 비토가 죽은 후, 위기에 직면한다. 패밀리의 중의적 의미, 혈연적 관계와 사업 관계에 있는 패밀리가 모두 흔들린다. 사업 파트너들은 돈 콜레오네가를 치려고 하고 마이클의 아내, 형은 마이클한테 등을 돌린다. 안팎으로 흔들리는 다리 위에 선 마이클은 점점 더 냉혹해진다. 친형이나 다름 없는 탐 헤이건도 안 믿는 지경에 이른다. 탐 헤이건이 묻는다. "꼭 그렇게 다 쓸어버려야겠어?" 마이클은 대답한다. "내가 그동안 배운 건 한 가지야. 적은 죽어야한다는 거."

이 말이 끝나자 큰 형이 살았있던 아버지의 생일날로 플래쉬 백이 이어진다. 대학생이었던 마이클은 전쟁에 입대를 자원했다. 국가는 모두가 지켜야하고 사랑해야하는 대상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관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국가는 개인을 보호할 수 없으면 자본만이 유일한 믿을만한 대상이 돼버린다. 누구나, 말할 수 있든 없든, 자신만의 살아가는 방식과 신념이 있다. 돈 콜레오네 부자 2대를 걸쳐 만날 수 있는 건 순수했던 신념을 간직한 평범한 이들이 자본만을 믿기 시작하면서 이기적이고 더욱더 고립을 자초한다. 불신은 자본의 친구다. 자본주의의 초상 속에서 마이클은 점점 초라해져간다. 살기로 가득 찬 눈매로 유리 벽 안에 갇혀 유리창이 깨질까봐 밖을 내다봐야하는 운명이다. 모든 걸 걸고 지키려했던 패밀리를 지키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도 힘겹기만하다. 네바다 주에 쌓인 눈처럼 모든 게 차갑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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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Bedev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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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말에 따르면 사심 없는 행위는 없다. 공리주의 역시 사심에서 비롯된다. 김복남의 친구 해원은 부르디외의 말을 입증하는 인물이다. 자로 잰 틀에서 벗어난 모든 현상에 대해 까칠하고 불신한다. 해원이 무도로 복남을 찾아간 이유는, 사람들한테 갖는 불신의 농도를 좀 옅게 할 목적이었다. 복남은 해원의 등장을 반가워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해원은 복남의 지원군이 아니며 구세주는 더더욱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어렸을 때나 커서나 해원은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 복남은 해원을 절친으로 여기지만 해원은 복남이의 잔인한 결혼생활을 목격하고도 다른 사람과 같은 거리를 유지한다. 이 거리감이 해원을 무도로 내쫒은 원인다. 해원은 무도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복남의 유일한 희망은 '내 친구' 해원이었다. 그러나 해원은 복남이를 '내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복남은 폭력에 대한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폭력과 불의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는 순종과 이따금씩하는 거짓말이다. 폭력의 힘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 두려움을 유지하기 위해 강도가 더 세진다. 복남과 해원을 포함한 등장인물 모두 억압에 순종적이다. 그러나 폭력은 두려워하는 자한테만 힘이 세다. 계몽따위가 두려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개인적 사건이 두려움을 제거한다. 복남이한테는 모성이다. 딸을 잃고 복남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폭력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실체를 파악한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는 최후를 맞이한다.   

억압의 대상이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로 나설 때 한편으로 통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데... 이 영화는 계몽영화가 아니니 이런 생각이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덧. 이 영화를 보고 들어 온 날, 수다를 필요로 하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였는데 복남이가 해원이 한테 "넌 너무 불친절해"한 말이 떠올라 친구의 손을 잡았다. 친구가 손 잡아 달라고 내밀 때 모른척 한 적이 여러 번있은지라 해원이 복남의 편지를 뒤늦게 보고 후회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 손을 필요할 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사심이 있더라도 손을 잡아 주는 게 더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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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 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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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감독 영화, <빵과 장미>를 봤을 때, 영화를 왜 이렇게 만들었나 했다. <케스>에서 보여주었던 서늘한 사실적 시선은 다 어디다 뒀는 지 의아했다. 그러다 내가 이주 노동자라면, 가정해 봤다. 핍박받는 가망성 없는 현실을 화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현실과는 다른 결말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한편의 비현실적 영화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작지만 정이 넘치는 선물이 될 수 있다.  

<방가?방가!>는 여러 면에서 <빵과 장미>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서 여러 가지 소재들을 차용해왔지만 현실과는 아주 다르게 낭만적이다. 청년실업의 대표자인 방태식이 부탄에서 온 이주 노동자 방가가 되는 비극적 현실이 눈물이 아닌 웃음으로 포장된다. 뭘 해도 재수가 없는 방가는 막장 인생에 있는 거라고는 정의감과 의리 뿐인 순진한 청년이다. 정의감과 의리는 아무때나 튀어나와 극을 끌고가는 원동력이 된다.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 취업한 방가와 그 주변의 이주 노동자들 이야기인데 어떤 면에서 사실적이고 무거운 재현보다 코믹한 시선이 더 현실에 관심을 끄는데 효과적일 수도 있을 듯하다. 피부색과 말투가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처음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더. 나 역시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를 미디어나 통해서 접했지 실제로 접해 본 적이 없다. 이주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현실에서 쉽지 않은데 이런 소재의 영화를 통해 이주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도 의미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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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린든 - Barry Ly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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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몬드 배리한 한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이 배리 린든이 되는 이야기다. 즉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일생이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약간의 재능과 열정을 가졌지만 지혜와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나..뭐, 이런 시대극이다. 한편으로는 지혜와 통찰력 따위와 본래 친하지 않다면 배리 린든처럼 내키는대로 한 세상 살다보면 어떤 최후를 맞이하든 후회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까뮈도 "인생은 연소할 대상"이라 하시지 않았는가. 

배리 린든의 질곡있는 삶에 연민을 느끼는 건 힘들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타일인데 인물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음악을 사용해서 경쾌하게 만들어버린다. 후회나 회한 따위는 현실에서나 느끼고 영화 속에서는 즐겨봐, 하는 거 같다. 혹독한 장면에서도 귀를 잡아당기는 달콤한 음악으로 혹독한 장면에 너그러운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한다. 큐브릭 감독의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다. 볼 때는 즐겁지만 영화를 본 후, 이미지들이 보여준 가벼움이 현실에는 없는 걸 발견하고는 먼저 안도하고 조금씩 곱씹으면 왠지 속은 기분이 든다.

이 영화는 자연광과 촛불만을 사용한 영화로 유명한데 정말 꼭 극장에서 봐야할 비주얼이 영화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처럼 기술이 발달하다보면 언제가 스크린으로 만날 날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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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션 오브 라잉 - The Invention of L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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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메디의 결말이나 과정은 늘 예측가능한데 왜 보나? 예측가능성의 다른 표현방법 때문이다.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장치는 거짓말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시작되는 데 있다. 타인에게 순간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는 게 관습이고 당연한 사회가 있다. 사람들은 늘 상처 받기 때문에 희망이란 말을 모른다. 모두 진실만을 말하는 세계는 암울했다. 루저는 계속 루저고 이기적 유전자 소유자들은 거만하기 이를데 없다. 도둑도 그 자리에서 체포되지만(도둑이 있는 게 의아하지만) 정의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 같진 않다.

그러다 죽음을 앞둔 엄마의 두려움을 위로하기 위해 통념상 루저인 아들은 거짓말을 한다. 사후 세계는 행복만 있다고. 세상은 발칵 뒤집히고 그는 저 바닥의 루저에서 초고속으로 성공이란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간다. 곤경에 처한 사람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이 그를 성공으로 이끈다. 꽤 흥미로운 지점들이 눈에 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영화들은 사람들을 웃게 하고 대박이난다. 영화같은 예술장르는 인간의 잉여감정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비관적 세계를 낙관적으로 돌려놓기 위한 인간의 자구책일지 모른다. 신이 인간의 영역을 창조한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인간 시뮬레인션 상황을 창조해서 현실에서 못마땅한 부분을 개조해버린다. 단 두 시간 뿐일지라도 현실과 다른 세상은 희망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신의 존재가 없는 사회를 배경으로하는데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의 존재를 믿기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과 행운을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무언가 탓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행동의지나 동기에 대한 타자의 시선을 인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좋든 싫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을 타자의 확언을 듣고 싶은 욕구가 근본적인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 영화지만 심각한 영화는 물론 아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못생겨도 예쁜 아내를 얻을 수 있다는 결말이다. 단, 못생겼으면 재력과 명성이 있어야한다고 영화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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