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Bedeville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부르디외의 말에 따르면 사심 없는 행위는 없다. 공리주의 역시 사심에서 비롯된다. 김복남의 친구 해원은 부르디외의 말을 입증하는 인물이다. 자로 잰 틀에서 벗어난 모든 현상에 대해 까칠하고 불신한다. 해원이 무도로 복남을 찾아간 이유는, 사람들한테 갖는 불신의 농도를 좀 옅게 할 목적이었다. 복남은 해원의 등장을 반가워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해원은 복남의 지원군이 아니며 구세주는 더더욱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어렸을 때나 커서나 해원은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 복남은 해원을 절친으로 여기지만 해원은 복남이의 잔인한 결혼생활을 목격하고도 다른 사람과 같은 거리를 유지한다. 이 거리감이 해원을 무도로 내쫒은 원인다. 해원은 무도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복남의 유일한 희망은 '내 친구' 해원이었다. 그러나 해원은 복남이를 '내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복남은 폭력에 대한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폭력과 불의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는 순종과 이따금씩하는 거짓말이다. 폭력의 힘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 두려움을 유지하기 위해 강도가 더 세진다. 복남과 해원을 포함한 등장인물 모두 억압에 순종적이다. 그러나 폭력은 두려워하는 자한테만 힘이 세다. 계몽따위가 두려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개인적 사건이 두려움을 제거한다. 복남이한테는 모성이다. 딸을 잃고 복남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폭력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실체를 파악한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는 최후를 맞이한다.   

억압의 대상이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로 나설 때 한편으로 통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데... 이 영화는 계몽영화가 아니니 이런 생각이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덧. 이 영화를 보고 들어 온 날, 수다를 필요로 하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였는데 복남이가 해원이 한테 "넌 너무 불친절해"한 말이 떠올라 친구의 손을 잡았다. 친구가 손 잡아 달라고 내밀 때 모른척 한 적이 여러 번있은지라 해원이 복남의 편지를 뒤늦게 보고 후회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 손을 필요할 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사심이 있더라도 손을 잡아 주는 게 더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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