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 The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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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조지 클루니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이들은, 그들의 진정한 재능을 외모 때문에 무시당하는 비운을 겪어내야하지 않나, 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동안 봐왔던 조지 클루니가 아니다. <인 디 에어>에서도 조차도 조지 클루니는 할리우드 배우같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탈이아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떨어진 의지할 곳 없고 믿는 건 자신의 본능 밖에 없는 외로운 미국인일 뿐이었다. 시종일관 건조하고 초조한 표정, 공허하면서도 지친 표정이 주름의 깊이를 아름답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장면서 피 흘리면서 운전할 때 얼굴에 확장된 혈관이 보여주는 고통의 깊이는, 조지 클루니는 명배우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조이 디비전의 이안 커티의 짧은 삶을 다룬 <컨트롤>을 만든 감독인데 이 영화 역시 우울하면서도 존재의 근원적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잭이면서 에드워드인 조지 클루니는 왜 킬러로 살고 있는지 모두 생략해 버린다. 잭이면서 에드워드는 킬러로 사는 데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다닌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은퇴마저도 쉽지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데서 오는 심리적 갈등인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법은 새롭지 않지만 우울한 심리를 영상과 음악을 이용해 표현하는데 능하다. 게다가 아름다운 마을, 델 몬테의 풍경도 서정성을 부추긴다. 새해 첫날 <고독의 편린>을 봤는데 연속 우울한 영화로 새해를 열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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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클루니는 제게도 잘생긴 얼굴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요. 저도 이 영화보고 넙치님처럼 좀 바뀌면 좋겠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넙치 2011-01-06 01:18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도 웃음 가득한 새해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 영화는 썩 훌륭하진 않지만 조지 클루니는 명품연기자로 돋보이는데 반딧불이님이 좋아하실진 모르겠네요...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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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일상에서 분리된 도시는 모두, 언제나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낡은 건물이나 사람들의 화난 표정도 심지어 유쾌하게 보인다. 그러나 도시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그 모든 유쾌함이나 낭만은 흔적이 없어지고 권태와 구질구질함이 눈에 띈다. 자유와 낭만의 대명사인 파리 조차도 여행객이 되었을 때와 거주자가 되었을 때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가끔 서울 여행을 오는 외국인 친구를 맞이하면 추한 서울도 아름답고 여겨진다. 남산한옥마을, 창덕궁, 경복궁, 청계천...이런 곳은 서울을 스펙터클화하는데는 훌륭하지만 진짜 서울은 아니다. 진짜 서울은 출퇴근할 때 오가는 표정없는 길, 술집이 문 닫을 즈음 택시 타려고 몰려 나온 행인들이 점령한 길이다. 둘 다 서울이지만 익숙한 길은 구질구질해보기 마련이다.

도시의 속성이 변하는 게 아니다. 도시를 겪는 인간의 감정이 변덕스러운 탓인데 인간은 도시 탓을 한다. 이스탄불에 가기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지명이 잘 안 들어와서 돌아와서 마저 읽었다. 2002년 7월, 처음 이스탄불에 갔을 때, 거리는 온통 빛으로 넘쳐있었다. 밝은 빛은, 카페 테라스의 빈 탁자와 의자도 유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느긋해보였다. 손질이 안 된 벽들마저도 볕의 축복을 받아 아름다웠다. 12월에 찾은 이스탄불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거리는 텅비어 보이고 두꺼운 파카와 내복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했다. 스산했고 오후 5시면 어두워지는 거리는 오르한 파묵의 글에서 말하는 비애와 어울렸다.  

삼일이란 짧은 기간동안 이방인으로 당연히 가져야하는 흥분이나 설렘이 없었다. 대신 서울에서처럼 이스탄불은 그저그런 도시처럼 보였다. 이스탄불은, 물론 그대로였다. 여행객들이 차지인 술탄하흐멧의 카페와 식당가,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 아야소피아 옆 더비스 카페마저도 그대로였다. 뭐가 문제일까. 여름에 길에 나서면 들렸던 사람 소리가 빠져있었다. 노천카페와 호텔 테라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무음처리되고 이미지만 돌아가는 길을 걷는 것 같아서 심심하다 못해 나는 왜 낯선 곳에서 아침 먹고 출근 하는 것처럼 나와서 길을 헤매나, 한심한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나는 서울의 소음과 매연에 익숙해져서 적막하고 맑은 대기 속에서 이국적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불안감을 종종 느낀다. 생활공간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도시를 찾으면서도 결국은 생활공간과 닮은 곳에서 행복감 찾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이런 모순된 행동은 서울에 대한 내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르한 파묵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이스탄불에 대한 진한 애증이 묻어있다. 오스만 제국 몰락이후에 쇠락하기만 한 도시, 그러나 한 번도 떠날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벗어날 수 없는 도시를 다각도에서 바라본다. 옛날 신문 기사부터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이 여행객으로 이스탄불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자신의 가족의 삶이 녹아있는 이야기가 이스탄불의 총체적 모습이다. 탁심광장이나 술탄아흐멧이 이스탄불이 아니라 베이올루의 허름한 건물들이 존재하는 골목이 이스탄불의 속살이다. 파묵의 글을 읽으면 가이드북이 언급하지 않는 이스탄불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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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비트 - Heartb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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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특히 짝사랑에 대한 담론을 이미지로 풀어낸 감각적으로 담았다. 큐피드처럼 곱슬거리는 금발의 니콜라스에게 반한 마리에와 동성애자인 프란시스의 초조, 두근거림, 질투가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이십대 때 열광했던 왕가위 감독 영화들에서 봤던 장면들이 겹쳐진다. 가슴이나 턱을 쓰다듬는 손을 클로즈업하면서 음악이 흐른다. 섹스 씬이 따라 갈 수 없는 애로틱한 장면들다.

 

2. (짝)사랑을 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들 모두 하는 말은 "미쳤어"다. 극중 마리에 역시 "내가 미쳤지"를 연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미쳤거나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씀을 실행하는 인물들이다.

 

한 인터뷰이가 이런 말을 한다. 약속 시간에 늦은 상대를 기다리면서 삼십 분이 지나자 화가 절정에 달해서 상대가 오면 몰아붙여줘야지 했는데 40분이 다 되서 상대가 나타나고 그의 얼굴을 보자 화가 난 마음이 싹 풀어지면서 늦을 수도 있지,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이런 거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도 결국은 상대한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 혼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화나는 일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성은 안드로메다로 잠시 보내는 것. 마리에가 키콜라스한테 고백 편지를 보내고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용기 내서 니콜라스에서 내 편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니콜라스는 지금 중요한 건 오븐에 넣은 음식이 타지 않게 오븐을 끄는 거라고, 하면서 등 돌려 마리에한테서 멀어진다. 마리에는 멀어져가는 니콜라스의 등을 보면서 부들부들 손을 떨며 담배를 물 수 밖에 없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시소 놀이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니 멀미 쯤은 감수해야한다.

 

 

3. 큐피드가 나이를 먹으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만지고 싶은 머리결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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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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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일요일이면 이스탄불에 가 있을 거라 애써 다시 읽고 있다. 2006년 처음 읽고 난 후기를 읽어보니 아주 불만족했던 거 같은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몰입이 잘 안 되는 소설이다. 왜 몰입이 안 되나...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가 자꾸 바뀌는 이야기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고 있는 요즘은 이야기체가 아니라 오르한 파묵이 가진 세계관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신의 존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솔직히 짐작만할 뿐이다. 신의 존재를 필요할 때만 믿는 문화권 출신의 사람한테 목숨을 바쳐 신의 뜻을 따른다는 게 불편하다. 그림을 그리다 눈을 머는 게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믿음을 공유하기에는, 지나친 물질문명 속에 둘러싸여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여자의 위치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들여다보니 세큐레의 성격 자체는 입체적이다. 세큐레가 속한 사회는 여자가 나설 수 없는 이슬람 사회라 세큐레의 처지가 아버지한테 종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계획하는 진취적 여성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독서 후기들이 다들 좋다고만 하고 어떤 점이 좋은지 써 놓지 않았다. 궁금하다. 뭐가 좋은 걸까?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읽는 이유는 세밀화에대한 파묵의 애정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서구적 시각에 대한 부정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매혹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베네치아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법을 부정하면서도 모방하려한 노력은, 매혹과 규범은 일치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이 에니시테의 죽음과 관련된 그림 이야기와 카라와 세큐레의 사랑 이야기라는 두 가지 줄거리를 가지고 전개되지만 정교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결론은 파묵의 글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이스탄불>을 주문했다. 우울한 이스탄불을 느끼게 된다는데 파묵의 글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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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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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서전을 읽는 데는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한다. 융에 대한 애정이 있나, 하면 그렇진 않다. 그래서일까 아주 지루해서 읽다가 말았다. 스물 두어살 무렵 프로이트와 융을 읽으면서 수첩에 그들처럼 꿈을 기록했지만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꿈을 기록한 게 멋져보였던 거 같다. 프로이트를 읽으면서 가지 없는 나무들이 많이 서 있는 비탈을 많이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모두 성적으로 관련시킨 프로이트의 해석을 읽으면서 내 내면에도 호색가의 기질이 있는가, 하면서 부끄러워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맹한 짓이었는데. 

융 역시 꿈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다고 얘기하면 무덤 속에서 융이 벌떡 일어나 소리칠 거 같다. 고결한 무의식의 세계를 그렇게 밖에 말 못하냐고. 이 책이 지루한 이유는 바로 이거다. 융은 무의식을 탐구하느라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는 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실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단서를 찾느라 무의식에서 산책을 하는데 융 자신은 즐겁겠지만 무의식, 그것도 남의 무의식을 함께 거니는 건 인내심을 많이 필요로한다. 꿈이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지극히 말도 안 되는 일련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들을 찾는데 미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프로이트와의 관계였다. 융은 프로이트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은 것처럼 비춰지고 싶어했지만 그의 무의식은 프로이트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융을 라이벌로 보았고(융의 표현 속에서 드러난다) 융은 프로이트의 그런 제스처를 못마땅해한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한 노파다. 다리가 아팠던 이 여인은 얘기를 하다가 말짱하게 걸어나갔다고 한다. 융은 정확한 원인을 몰랐지만 여인은 자신이 아팠던 이유를 말하다 알았던 거다. 심리학이 왜 말하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지 말해준다. 실제로 말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걸 발견하고 치유가 되는 과정이다. 굳이 전문가한테가 아니어도 퇴근후 집에 바로 안 가고 술집이나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행위는, 우리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우리만의 방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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