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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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책이지만 이제야 손에 넣은 책이다. 모로코에 다녀온 후 이슬람 문화에 대한 좀 더 체계적 접근을 하고 싶었다면 너무 거창하고 내가 본 타일 문양이나 건물 양식에 대해 그래도 뭔가를 좀 알아야하지 않나, 하는 얄팍한 호기심에서 책을 펼쳤다.  

내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세계사는 모두 서양인, 특히 유럽인의 관점이다. 가령 십자군 전쟁사를 다룬 책을 읽다보면 당연히 주인공은 기독교고 이슬람교는 적이어서 조연 역할을 할 뿐이다. 이슬람 왕조가 번성했었다는 정보는 알 수 있지만 그 세력의 크기는 짐작할 수 없다. 기독교의 번성과 쇠퇴와 반비례해서 이슬람교는 쇠퇴하고 번성했다. 유럽인의 관점은 물론 유럽 대륙과 지중해 연안이어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을 세운 나스르Nasrid 왕조는 단지 서부 변방을 통치했던 왕조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들도 학자 부부로 보스턴 칼리지 교수로 있다니 서구인의 관점이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주인공인 책이라 관점이 많이 다르다. 이슬람교 탄생에서부터 이슬람 문화권이 얼마나 번성했었는지, 왜 동식물 문양이 발전했는지,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라도 지역 따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쭉 윤곽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역사나 미술을 해석하는 책은 필요악이다.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책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역사나 미술사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관점에 기대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저자의 편견을 무너뜨리려면 여러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다른 저자들의 책을 읽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게다가 미술은 오묘한 게 직접 봐야지 자신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미술품이나 건축물들은 접근하기 결코 쉽지 않다. 전문 연구가가 아니라면 책 속에 언급된 작품들을 평생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이슬람 미술사에 관한 책 한 권을 읽고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새로운 편견 머리속 한 켠을 차지한다. 수 많은 편견으로 머리속을 채운 후 섞어서 비워내는 일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면 다음에 이슬람 문화권에 갈 기회가 생길 때, 무슬림처럼은 아니어도, 이슬람 문화를 조금이라도 서양인들처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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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이옥전집 1 :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완역 이옥 전집 1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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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책 내용과는 무관한 말을 좀 적을테다. 나는 한국어 원어민이지만 한국어가 낯설다. 그렇다고 다른 언어에 친숙하지도 않다. 내가 쓰는 한국어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일상어와 내 생각을 휘갈기는 빈곤한 어휘력. 나는 한국어 원어민인데도 왜 빈곤한 한국어 어휘를 갖게 되었는가. 한국문학을 읽지 않아서다. 한국문학의 범주 또한 넓은데 근현대 소설만 주로 읽었지 한자 시절의 글은 멀미가 난다. 이는 내 탓이 아니다! 한자로 쓴 글은 외국어여서 누군가 번역을 해 주지않으면 읽을 수 없다. 번역서를 몇 권 들춰보기는 했지만 고어체는 우아해보이기는 하지만 서툰 외국어를 대할 때처럼 인내심과 상상력을 강도 높게 요구한다. 고로 곧 책장을 덮어버곤한다. 어휘력이나 표현력은 어디선가 반드시 읽거나 들은 적이 있어야 다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데 읽거나 들은 적없는 우리말을 내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나.-.- 

우리글에 대한 원천적 봉쇄는 좋은 번역서를 내는데 게으른 우리의 관행에 있다고, 비난하고 싶다. 제인 오스틴의 원전을, 영국인한테 읽으라고 하면 그들도 곧 책장을 덮을 것이다. 그들은 근대나 중세 시대의 글을 현대식으로 쉽게 쓰는 일을 부지런하다(적어도 제 삼자의 눈에는 그래보인다). 과거 우리글은 기품이 있고 서정적이다. 기품있고 서정적 표현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 즐겁다. 원전의 이런 느낌을 살리고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테지만 다른 외국어가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을 느낄 수 있는 책을 많이 만날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책 이야기를 하면, 역사시간에나 들었던 문체반정에 대한 해제다. 내 식대로 말하면, 지배계급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글의 주제와 문체를 지정했고, 기준에 벗어난 글을 쓴 이들을 유배시켰다는 말이다. 우리의 독재적 근본주의는 참 뿌리도 깊다.;; 이옥은 정조 시절,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집안 출신었고 소외감을 느꼈지만 후대가 존경할 만한 독자적 문체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 주제도 소소한 일상을 다룬다. 풍경, 독서의 즐거움, 시장, 심지어 벌레에 이르기까지 자잘하다. 이런 자잘한 대상을 보고 쓴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지닌 감수성의 투명도를 짐작할 수 있다.

감수성에 흠뻑 잠긴 글을 읽는다고 감수성을 익힐 수 있지는 않지만 가끔 당을 필요로하는 몸에 초콜릿을 공급해줄 때처럼 흐뭇한 포만감이 찾아온다. 우리글을 읽으면 꼭 만나게 되는 건 나의 무지다. 많은 인용된 인물이나 표현이 한문학에서 기원하는데 이런 깊숙한 맛까지 느끼려면 부지런한 독서가 필요하니 나는 평생 못 느낄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술과 비유하는 데...달콤한 동동주 한 잔 마신 후 어떤 말보다도 캬-하는 감탄사가 설득력있는 것처럼 아래 글이 그렇다.  

"먹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 그릇이 담겨 있지 않은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겠는가?(......)그런데 글을 읽고 또 다시 읽어, 읽기를 삼 일 동안 오래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즐겁고 몸이 편안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들어가게 된다. (......) 크게 취해서 취함이 극에 달한 자는 반드시 토하게 되는 것이니 마치 옛날에 이불에 토했다는 것과 혹수레의 깔개에 도했다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나는 술에 취하면 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 나의 주벽酒癖이 그런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읽고서 이것을 지은 것은 또한 내가 취하여 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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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2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갑자기 확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걸요.~ 2권으로 계속되는거지요?

넙치 2011-01-21 09:46   좋아요 0 | URL
하하. 2권...시간을 두고 읽으려구요.^^;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 우키요에를 따라 일본 에도 시대를 거닐다
이연식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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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우키요에가 지금까지 화가 이름인 줄 알았다.;;;;;;;;;;;; 이제라도 사람 이름이 아닐 걸 알았으니 안도의 숨을 내쉰다.ㅋ 그만큼 일본 문화에 관심이 없었단 말도 된다. 요즘 조금씩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져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 상 덕분이다. 내게 일본은 나쓰메 소세키다. 그의 소설들 때문에 도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딱히 마음을 끄는 그림책을 찾지 못한 지 꽤 오래됐다. 우키요에를 다룬 이 책은, 거짓말 조금 보테면 유럽인이 우케요에를 보고 들뜬 농도를 내게도 심어줬다고 할 수 있다.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에 서양에서 집안을 장식하고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고, 또 라틴어를 읽을 줄 모르는 평민들을 위해 성서화를 주문했다. 그 덕에 화가들은 초상화나 성서화를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서양화에 초상화와 성서화가 많고 발달한 이유가 실생활과 밀착된 실용적 이유였듯이, 우키요에의 판화들도 실용적 이유에서다. 우키요에의 판화들은 책에 넣을 삽화였고 만화쯤 된다고 한다. 

한 예로 춘화가 발달한 이유를 꼽을 수 있데 공창이었던 요시와라를 특권 계층만 출입할 수 있었기에 평민에게는 그림이 필요했다. 실제 존재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예술가들의 예술적 왜곡과 결합돼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녀의 그림들이 완성됐다. 우키요에의 미인도는 과장된 얼굴 표정과 판화라는 특성상 나오는 단아한 선 때문인지 묘한 매력이 들어있다. 우키요에의 풍경화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나만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우키요에가 미인도만의 영역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판화로 본 풍경화는 로모같은 색감도 색감이지만 그 선과 구도가 아주 좋다. 우리나라 풍경화에서 봐왔던 익숙한 그림을 낯설게 하기처럼.  더불어 일본 시대극도 아주 싫었는데 에도 시대에 대한 간략한 개괄이 들어있어서 에도 시대에 관한 책도 찾아볼 계획이다. 그 후에는 일본 시대극 영화도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올 한 해 작은 계획은 일본어를 익혀 나쓰메 소세키가 묘사한 도쿄에 가보는 거다. 가나도 모르는 까막눈이어서 일본어를 익히려면 근면과 성실이 요구되는 일이라 자신은 없지만 마감 시한이 있는 게 아니니 올해가 아니면 언제라도...이런 마음가짐이면 올해는 실천하기 힘든 계획일터이지만..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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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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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이 너무 감사하고 만족스러워서 감사하고 다른 삶은 꿈꾸지 않은 사람을 가끔 만나기는 한다. 그들의 자족적 말 속에서 어떤 비애를 읽는 못된 버릇이 있다. 자기가 만족한다는데도 자신의 삶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한테서 자기 최면을 본다. 누구나 자신이 꾸리는, 혹은 꾸릴 수밖에 없는 삶에 만족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거나 자기 최면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불행히도 소수라고, 나는 믿는다. 나 역시 내 삶에 대체로 만족하지만 대체로가 아닐 때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이 있다.  

주변에서 보는 나는 현실적 이상주의자다. 꿈을 간직하고 있지만 현실에 지나치게 밀착돼서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확히 맞는 말이다. 나의 커다란 짐은 내 균형감각이고 나는 비난할 대상이 있어야하기에 내 별자리, 천칭좌를 탓한다. 지인이 올해 꿈이 뭐냐고 물었고, 현상유지,라고 나는 대답했다. 지인은 깜짝 놀라며 내가 아직도 자신과 같은 이상주의라고 믿었다고, 했다. 나는 꿈 따위는 버린지 오래 전이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의 거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말이다. 내가 잘 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 내 재능은 일치하지 않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재능은 전무하다고 인정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재능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끊임없이 내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래도 재능은 중요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인생의 커다란 흐름을 믿는 편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내 노력 이상으로 눈에 띄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일도 있다는 걸 안다. 행복은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난 게으르다. 게으름은 재능도 없는 내게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쓰다보니 책 리뷰가 아니라 자학 포스트가 돼버렸다.;; 

술술 넘어가는 책장을 넘기며 이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야, 아니야 이 소설은 재밌잖아, 라는 생각이 대치했다. 주인공은 안정된 변호사였지만 실패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 우연찮게(실은 할 수 없이) 사진작가 행세를 하게 되고 모든 걸 버린 순간에 사진작가로서 급부상하게 된다. 사진작가로 이름을 얻는데 많은 우연이라는 운이 작용한다. 그러나 작가는 명성에 대해 어떤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난 후 얻은 명성을 얻지만 명성을 얻는 그 순간, 주인공을 다시 원점에 돌려 놓는다.  

라캉주의자라면, 작가는 자신이 누리는 명성이라는 외투를 벗고 싶지만 벗지 못해서 소설 속 주인공을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반복되는 일을 참아내는데는 필요조건은 자기 최면일수 있다. 자신의 능력은 반복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어떤 창조적 일에 있으며 기회만 온다면 자신의 창의력이나 숨겨진 잠재력이 빛을 발할 날이 있다는, 공허한 믿음이 하루, 일년을 지탱하는 뿌리일지도 모른다. 

벤이었지만 게리로 환생하고 절정의 순간에 다시 앤디로 태어나 세번째 삶을 사는 주인공이 결코 행복을 만끽 할 수 없는 이유는, 꿈을 실현했다는데 있다. 희망이나 갈망, 혹은 이룰 수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의미있니, 패배한 자여, 마음껏 자신의 가능성을 부풀려라. 이루지 못한 꿈은 엑스터시로 올라가는 비탈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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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1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학 포스트가 될 뻔~ 했다시지만 저는 재미있는걸요. 저도 역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커다란 흐름이 있다는 걸 인정해요. 이룰 수 없는 믿음은 그 자체의 의미를 위해 건배하고 싶군요.

넙치 2011-01-12 00:00   좋아요 0 | URL
올 한해를 살아갈 최면을 걸어봤어요.^^
 
카페 느와르 - Café Noi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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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장장 3시간 18분이라는 런닝타임을, 극장에 가서야 알았다. 정성일씨의 장황한 글처럼 영화도 장황할 것이며 재미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중간에 두 번쯤 졸고 화장실도 갔다오고...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지루하지 않았으며 재미있기까지 했다. 

프랑스 영화사에 누벨 바그 시절이 있다. 1960년대 평론을 하던 감독들이 영화에 대한 잡담이나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영화는 카메라로 쓴 문학작품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참 고마운 발상이었다. 이들의 영화는 당연히 문학 작품에 많이 빚지고 있으며 소설 속 대사를 카메라로 비추거나 등장 인물들이 대사를 그대로 말한다. 당시 감독들은 영화광일 뿐 아니라 하드보일드 장르의 미국문학이나 프랑스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1.  

정성일 씨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 바그 시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학작품에서 그대로 가져온 대사들, 서울 한복판 거리를 배회하는 카메라. 카메라를 통해 본 익숙한 서울 풍경은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인다. 청계천부터 종로 거리를 쭉 트래킹하면서 광장시장, 평화시장의 겉을 훑는다. 그림자가 늘어지는 시간, 일몰 직전의 노르스름한 빛 속에 앉아 있는 익숙한 서울은 아주 아름다웠다. 뉴욕이나 파리가 아름다운 도시로 자리잡은 이유는 영화가 단단히 한 몫 한 게 아닐까. 네러티브보다 뉴욕이나 파리의 골목 자체가 빛나는 영화가 많다. 센트럴 파크의 아찔한 단풍이나 거리, 파리의 이름 모를 골목 때문에 영화를 보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서울이라는 풍광 때문에 영화를 기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홍상수 감독 속에 나온 서울은 서구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스펙터클이었으며 <괴물>이나 <추격자>에 나온 서울은, 서울의 정체성이 필요없는 공간이었다.  <카페 느와르>에서 서울은 인물보다도 더 주인공같다. 인적 드문 청계천 한쪽 면은, 세느 강변 같고 카메라가 쭉 트랙킹하는 종로 길가는 마치 뉴욕 같다.  

2.  

영화광이며 독서광이 만든 영화답게 영화는 "인용구"로 가득 찬 영화이다. 키에슬로브스키의 <블루>의 한 장면도 보이고 레오 까락스의 영화에서 보는 공간을 압축한 이미지도 엿보인다. 물론 <극장전>, <괴물>, <올드 보이> 등 한국영화를 영화 속에서 이야기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인용구에 상당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편이다. 어떤 글이나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인용한다는 행위 속에는 인용한 사람의 주관과 시선이 들어가 있다고 여긴다. 같은 글을 읽고도 다른 인용구를 기억하는 일이 그 증거다. 게다가 인용구들로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이도 있는데(강준만 씨의 글이 대체로 그렇다) 머리 나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도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튼, 영화 속 영화를 보는 잔재미도 쏠쏠하다. 

3.  

정성일 씨 인터뷰를 보니 문학작품 속 글을 살아있는 인물들이 발화했을 때 느낌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결과는 썩 좋지 않다. 이 영화가 형편없지는 않지만 좋은 영화라고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인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문학의 가장 큰 차이는 방향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나, 작가나 감독의 목소리를 해석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나 관객의 몫이다. 문학 속 인물은 적극적이기 보다는 작가의 필요에 따라서만 움직일 때가 많다. 반면 영화는 감독의 관점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두 시간 동안 대체로 살아있다. 인물만 떼어놔도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영화다. 그런데 <카페 느와르>에서 인물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서로 주고 받는 대사가 아니라 이미 쓰여진 글 중에서 읽고 싶은 부분만 읽기 때문에 서로 주고 받지 못한다. 인물들이 하는 유의미한 말을, 관객은 당연히 무의미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인물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뭐, 현대 사회에서 익숙한 일이긴 하지만 소통을 원해 영화를 보는 관객한테는 일종의 좌절감마저도 줄 수 있다.  

인물들은 각자 진지한 사연을 지니고 있지만 듣는 이들은 귀담아 듣질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연에 관한 이야기의 속성이 자신한테는 심각하지만 제 삼자한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애정의 문제처럼 보인다. 자신의 얘기만 하는 사람은 주변에 널렸으니 남의 얘기에도 귀 기울여주는 배려심 있는 인물을 영화에서는 기대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심리기도 하고.  

4.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거 보면, 이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괜찮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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