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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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26 사태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국경일도 아닌데 갑자기 동네에 태극기들이 나부꼈다. 어린 내 눈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국경일이면 태극기를 열심히 게양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태극기의 등장은 국가와 관련된, 그런 어렴풋한 기억만이 있다. 나중에 듣기로 대통령이 죽었다는 걸 알았지만 어떤 슬픔도 걱정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일이 10.26이었음을 알았고, 앞 집에 걸린 태극기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지금까지도 10.26은 앞 집 태극기와 더 관련이 있어보인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우리는 사회의 자유화 시위보다는 학내 민주화 시위에 더 익숙했다.

 한번은 명동에 놀러나간 적이 있는데 그날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집회를 저지하는 최루가스에 익숙했던 시기였으므로 대수롭지 않았다. 옷가게가 즐비한 골목에서 우연히도 달아나고 있는 동기를 한 명 만났다. 검문이 있던 시기였지만 심하지 않았으므로 별 걱정하지 않고 가볍게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다음 날, 물론 그 친구를 학교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민주화 시위의 상투성에 길들여졌고, 쇠락해가는 구호 속에서 젊음을 보냈다. 여러 친구들이 소위 '운동'에 발을 담갔지만 바깥에서 보기에 치열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거 같다는 빛도 볼 수 없었다. 욕 먹을 말일지 모르겠지만 젊음 시절의 치기쯤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나와 같은 과 친구들은 문화 생활에 열중이었고, 사회보다는 자신에게 더 몰두해 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고 선배들은 우리 학번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도 하고 힘겨워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 하에서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우리 학번은 민주화라는 말에 흥분하거나 감동할 수 없는 세대가 되었다. 이미 내가 대학을 들어갔을 때는 군부독재가 말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고스란히 현대사 속에서 살아왔지만 체험한 것이 아니다. 광주항쟁의 처참함을 뉴스나 비디오 화면으로 보았을 뿐이다. 10.26이 일어난 날 펄럭이던 태극기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래된 정원>을 읽으면서도 배경은 아득한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이건 황석영 선생이 의도한 바인지도 모른다. 제목처럼 오래된 정원을 훗날, 가만가만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정원 속에 배어있는 눌물, 웃음, 피는 모두 바래서 이제는 하나의 추억으로 보듬을 수 있는 것처럼 아늑했다. 아픈 시간은 오래된 정원 속에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하나의 러브 스토리로 변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사는 곳, 사랑하는 부모와 형재가 사는 곳이 내가 사랑해야하고 살아가야하는 사회라는 걸 말하는 것 같다. 그곳이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또는 감옥이든.

 이 책을 읽기 전에 사실 나는 약간의 비장함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비장하지도 않고 당시의 사회적 아픔을 간접 체험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랑하자, 있는 그대로,란 실천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약간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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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0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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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무거움, 내지는 수용할 수 없는 상상력 부족이 있다. 이건 순전히 학부시절 수업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라신느의 비극, 몰리에르의 희곡을 발췌해서 강독하고,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 장 꼭또의 희곡 등등을 읽었던 시간은 내 주리를 트는 시간이었다. 심오한 깊이의 희곡들을 견뎌내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다. 소중한 수업 시간이 다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검찰관이 희곡인지 책을 받아보고서 알았다. 희곡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득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대략 난감했다. 그러나 고골이고 또 나는 이제 철이 없지도 않고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희곡을 읽을 수도 있을거란, 최면을 걸고 심호흡을 했다. 인물 설명을 읽고 역시 고골다움에 미소짓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시골 마을에 검찰관이 오기로 되어있는데 마침 한 말단 관리인 흘레스따꼬프가 여행 중이었다. 시장을 비롯한 단체 장들이 그를 검찰관으로 오해하면서 빚어지는 해프닝이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인식의 한계점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떤 한 공간이나 위치에 오래 있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런 오류가 외부인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그 안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우스꽝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분노하며 비난하기까지 한다.

정주하는 자, 멸망할 것이고 이동하는 자 흥할 지니. .대략 이런 자끄 아탈리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동하는 노마드가 되는 것은 불편함을 감내하고, 욕심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관습에 갇힌 전형적인 정주형 인간형인 시장을 비롯한 등장 인물들. 그들은 바로 우리의 초상이다.

덧. 고골은 풍자적 인물을 창조하는 데는 재능을 지녔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긍적적 인물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했다. <죽은 농노>의 속편들을 긍정적 시선으로 쓰려고 10년간 노력했지만 실패했단다. 번쩍이는 기지를 지닌 글을 써서 두 세기를 넘어 읽히고 있지만 고골 본인은 정작 자신의 인물에 만족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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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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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는 눈물 주머니는 눈물을 요구하는 장면이나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눈물 주머니는 인심 좋게 눈물을 내준다. 눈물 인심은,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아주아주 인색하다. 왠만한 일에는 울지도 않고, 그러니 감동이나 기쁨도 줄어드는 댓가를 치루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주말, 나랑 비슷한 감정구조를 가진 M이 자신의 단단한 가슴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그닥 없는 만큼 사람에 대한 실망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이 아니라 잘 지내고 있는 것에 애도를 표현했다. 그리고 내게도 애도를 표현했다.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이따금씩 동경하기 마련이다. M이나 내가 갖지 못한 것은 풍부한 감정이다. 그렇다고 비관하거나 다른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기엔  너무 게으르다. 그냥 그럭저럭 살겠다고 결론을 내리며 수다를 마감했다.

M이나 나 같은 사람과는 정반대의 좌표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M'는 실연을 하고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키우기에는 안좋은 상황인데도 말이다. 분가해서 혼자 살고 있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고, 또 결정적으로 강아지 엘러지가 있다. 팔과 손은 두드러기로 덮여있지만 강아지는 실연을 극복하게 해 준 매개이며 식구로 여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기도 쉽지만 정 때문에 상처받아 부서지기 쉽다.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인 요조는 바로 정으로 가득 차 부서진 심약한 인물이다. 사람과 소통하는 법에 서툴어서 불안과 공포감을 느끼는 요조는 어렸을 때는 익살쟁이로, 성인이 되어서는 알콜 중독이 되어간다.  익살이나 알콜은 인간 세계로 들어가려는 방법이지만 오히려 실제 세계와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결국 "인간 생의 완성이라는 자살"로 이끌어가는 결과에 이른다. 어린 시절에 읽었다면 요조의 삶을 별난 생 또는 제목처럼 실격한 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실격한 삶도 인간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안다. 심장이 말랑거리는 사람은 두려움이나 슬픔에 잠식당하는 것이지 실격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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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0
롤프 귄터 레너 지음, 정재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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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그림 읽어주는 책은 그만 읽고 싶단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기록이 아닌 이상 그림 해설서에 가깝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림을 자꾸 해석에 맞추어 보려는 습성이 생긴다. 그러니까 학습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이 책을 쓴 저자는 다분히 프로이트적 관점으로 그림을 해석하는 데 상당히 거슬린다. 그림 속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 특히 여성의 이미지를 말이다.

호퍼의 그림은 보면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이유를 호퍼가 한 말에서 찾았다.

"어쩌면 나에겐 인간적 면모가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햇빛을 그리더라도 집의 벽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그리고 싶었다."라는 바로 이말이 열쇠다. 호퍼의 그림들은 금속성 차가움이 느껴진다. 이런 차가움이 배인 영화나 글, 사진을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림은 보면서는 불만이 생긴다. 왜 저렇게 차가운거야. 따뜻한 온기가 있는 게 좋아 하면서 투덜거리고 있다. 내가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싶어하는 것을 그린 그림을 보고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통증을 느낀다. 마치 까칠한 표면에 살갗이 닿은 것처럼 말이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 보다는 풍경이 주를 이루고, 풍경 중에서도 실내가 주를 이룬다. 틀에 박힌 삶 속에서 트인 외부를 응시하지만 그 외부 세계는 늘 닫혀 있고 미지의 세계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창들이 그러한 이루지 못하는 갈망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창을 뛰어 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의지다. 그러니까 칼 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이다. 창과 벽이 만들어주는 익숙한 실내에 있을지 또는 문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갈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다.

호퍼는 평이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이런 이력과 그림 속에서 풍기는 이미지들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호퍼는 익숙한 세계에 머물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무얼 선택할 것인가. 많이 흔들리는 요즘이다.

 

사족.. 안타까운 점. 2004년에 뉴욕에 갔을 때 호퍼를 몰랐다. 호퍼 그림들이 있는 휘트니 미술관을 방문할 리 없었다.ㅠ.ㅠ 하루에 한 번은 꼭 지나게 되는 메디슨 가에 있었건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날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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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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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르네 마그리트전을 하고 있다. 전시회에 갈때마다 인물중심의 회화나 사진, 소품에 한정된 작품들 때문에 차라리 책을 사 볼 걸 하면서 후회를 하고 온다. 결정적으로 지난 번 만 레이 사진전에 갔었을 때다. 많은 작품 수에 다시 한번 속아 설레는 마음으로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나 였다. 전시 작품들은 전성기 때를 벗어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마그리트 전 역시나 그럴 것을 확신하고 전시회 대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그리트 해설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지만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 사물을 관념화하는 그의 노트나 습작들을 보니 더더욱 그의 그림들로부터는 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가령, <헤겔의 휴일>이란 그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가 적어 놓은 글을 보자.

"...나는 헤겔(또 다른 천재)이 두 개의 대비되는 기능을 지닌 이 오브제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가지 기능이란 어떠한 물도 인정하지 않는(물을 거부하는) 동시에 물을 인정하기도(물을 담는) 하는 것입니다. ..."

마그리트의 이러한 사유체계를 존경하지만 그림을 보고는 아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내 기준이란 그야말로 시각적 아름다움, 더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시적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마그리트는 철학적(특히 비트겐슈타인) 사유를 했던 사람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그리고 사물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려는 그의 노력을 닮고 싶지만..그림은..흠.

회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보다는 현상과 사물의 정반합에 대한 연구가 우선시되는 마그리트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 끌리는걸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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