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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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재미있었지만 읽고 나서는 책 값이 아까운 책이다. 부제에 쓰여있듯이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이외에는 내 시각을 기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현대미술의 의도들은 알겠지만 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해서 저자가 말했듯이, 현대예술은 유머에 있다는 데 나는 현대미술을 보고는 웃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에 무관심하게 되고 오히려 고전미술로 무게중심을 두게된다.

키숀의 말 중 가장 마음에 든 말은 바로 요것.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은 예술로부터 추방다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

그러니까 키숀의 말에 따르면, 현대미술에 대한 내 무관심은 무죄인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은 아니다. 작가가 느끼는 것을 관객이 함께 느끼도록 하는 것, 이것은 미술 뿐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모른 예술 범주에 해당하는 불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키숀은 비평가를 백해무익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듯한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키숀도 예로 들고있듯이 미디어를 통한 비평가의 힘은 세다. 대중은 미디어를 믿고 비평가의 명성을 믿기 때문이다. 묻혀진 작가를 재조명해서 작품과 작가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비평가일 수 있다. 문제는 작가가 지닌 예술적 지능이나 작품의 완성도에 관계없이 선동해서 대중을 부화뇌동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대중심리를 이용한 상업 환경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도미노 현상이다. 예술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예술의 이름으로 상업적 성공만 추구하는 거짓 예술은 장기적으로 보면 예술의 토대를 척박하게 만들 것이다.

어쨌거나 양적으로 풍부한 예술활동이 선행되어야 질적으로도 발전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 양적 풍요로움이 이끌 결과는 조금 있으면 윤곽이 잡힐 것이다. 나야 취미삼아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정도니 내 바람은 딱 한가지다. 질적으로 풍요로와져서 전시다운 전시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요즘 경향대로라면 초등학생들이 숙제든 엄마의 교육열에 이끌려서든 각종 전시회 주고객이다. 이들이 대학을 들어갈 때쯤이면  비록 강제적으로 학습되었지만 안목이 높아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지금같은 졸렬한 전시기획은 없어지지 않을까나. 더불어 미술전문 서적의 풍요로움도 기대해본다. 우리나라의 미술서적은 참으로 민망하다. 수필같은 책이 많아서 작가에 대해 구체적 정보를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미술학자의 책이 없다는 것도 참 아쉬운 점이다. (아님 내가 못찾았나) 일단 한국작가가 쓴 책보다는 번역서를 먼저 택하게 된다. 적어도 미술서에서만은. 이건 번역세계의 문제일수도 있겠고나.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니 고만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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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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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책에 대해 화두가 되고 있는 진정성 내지 실재성으로 꼬투리를 잡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김훈의 소설이란 것이 역사성과는 별개로 시학 또는 시인으로서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각각 다시 살펴보았다. 먼저 김훈 문장의 광팬으로서 옹호할 말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다. "역사가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시인이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한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김훈의 소설은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모든 소설이 다 역사소설은 아니다. 또 모든 역사소재소설이 역사적일 필요는 없다. 역사소재소설을 읽는 이들이 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은 이런 역사적 진성성의 유무도 아니었고 소설이란 완벽한 틀을 갖춘 서사구조도 아니었다. 내가 유일하게 책장을 펼치며 기대했던 건 <칼의 노래>에서 맛보았던 정서적 호소였다. 물론 문장은 단정하면서도 날카롭고 비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남한산성의 정경을 그림 그리듯이 문장으로 묘사한다. 처참함, 곤궁함, 말의 누린내를 간혹 맡기는 했지만 문장 간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서도 객관적일 수 있다는 건 작가가 마음을 담아 쓰지 않고 거리를 두고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고독을 그토록 가슴저미게 다가오는 것은 김훈의 고독이 녹아있는 탓이다.

역사서가 아닌 감정에 기대야할 이런 장르의 소설에 감정이 빠져 있다면 다음 소설에 대한 기대치는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다. 나란 독자란, 작가의 마음이 쓰여진대로 읽을 수 있도록 길들여진 독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독자가 아름다운 문체에만 감탄하기에는 공허하다. 문체란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것인데 김훈이 정말 중요한 마음을 문체에 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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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3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동감입니다...
읽고나서, 읽으면서 상당히 공허했어요. 바로 그런 이유겠지요..

넙치 2007-07-02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서재 열고 첫 댓글입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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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또 읽었다. 이 책은 단편소설집이라고 하지만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다. 이야기를 전개하다 불쑥 작가가 등장해서 소설이 형편없다는 둥, 어떻게 끝낼지 모르겠다는 둥, 자신이 쓰고있는 이야기의 완성도에 대한 불안과 좌절을 특유의 어조로 늘어놓는다. 소설이 주는 형식미, 소설이란 서사구조에 대한 감동이나 아름다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다자이의 책을 읽다 분명히 던져버릴 것이고 그를 영원히 형편없는 작가라고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늘 다자이 오사무에게 관대한가? 내 인생이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남의 삶을 기웃거리도록 운명지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은 강하게 든다.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많은 이들의 인터뷰며 급조된 책이나 넘쳐나는 정보들을 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또한 나의 운명이니 말이다. 한때는 그런 인터뷰에서 감동을 받은 적도 있긴하다.

그러나 인터뷰란 것이, 그리고 대중매체라는 것이 그들의 고뇌나 단점보다는 장점과 일반인과 다른 점을 부각시키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에 그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작은 습관 하나조차도 유별나게 다른 사람들이 되버리고 만다.즉 떡잎이 다른 것처럼 묘사한다. 이런 천편 일률적 접근 방법은 금방 싫증나기 마련이고 내 습관은 몹쓸 것이라고 자학하고 있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 영웅을 만드는지 알면 이런 접근방법은 더더욱 염증이 날 수 밖에 없다. 영웅, 그들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실체를 알지못한 채 만들어진 이미지, 즉 매체가 조작한 이미지만을 믿게 된다. 물론 책은 대중매체와는 조금 다르긴하지만 평전이나 전기가 대체로 이런 범주에 든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런 일반적 영웅의 이미지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확신이 없고, 젠체하지 않으며 불안으로 가득차있다. 그렇다고 자신감이 없진 않다. 어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교만하다. 그 교만을 지탱하는 것이 불안과 조울증이라는 걸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낄 때 그의 작품과 그는 일치한다.(뭐, 많은 작가들이 자신과 작품을 별개로 생각하길 바랬지만 난 아직도 일치점을 찾고 있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작품들이 소설이란 범주에서 벗어나있지만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형식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의 문체가 어떠한 것인지, 그는 불안을 어떤 단어와 문장조합으로 구성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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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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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쏙 드는 책을 읽고 난 후 대체로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한 가지는, 하고 싶은 말이 머리 속에 가득차지만 실제로 마음은 흥분해서 그 말을 제대로 끄집어 낼 수 없다.  또 하나는 문장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울림에 경건해져서 선뜻 느낀 점을 말할 수가 없다. 두 가지 경우의 공통점은 말문을 막는 다는 것. 이 책은 전자에 해당한다. 읽고 난후 흥분으로 가득차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1장을 천천히 읽었다.  

이웃 블로그에서 보기 전까지는 플로베르와는 관련없는 소설인줄로만 알았다. 이웃의 포스트를 읽고는 플로베르의 평전인줄 알았다. 읽고 난 지금, 이 책은 소설도 평전도 아닌 삶과 예술의 관계를 고찰하는 유머있고, 발랄할 에세이라고 말하고 싶다. 플로베르의 <순박한 마음>의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해서 곳곳에서 플로베르의 작품들을 인용하지만 플로베르의 작품을 모른다고 해도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일 것 같다.

화자 내지 작가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예술과 삶의 태도에 대해, 그리고 비평가들의 멀미나는 발언들에 대해, 독자는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해,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가치 있는지에 관해. 가령, "책이란 아무리 우리가 그것이 곧 삶이기를 바란다하더라도 삶 그 자체는 아니다....삶의 연관 정도는 작가가 선택한다. 작가는 바다에 걸어 들어가듯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물이 배꼽에 다다르는 데까지만 들어가야 한다....만약 작가가 독자와 좀 더 비슷하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고 독자가 되었을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삶은 사람이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이라는 점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두 주먹 불끈(!)쥐고 삶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앵무새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화자는 <순박한 마음>에서 플로베르가 묘사한 앵무새를 찾아나선다. 마지막 장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세 마리가 되버린다. 어느 것이 플로베르가 순박한 마음을 창착할 때 썼던 진짜 앵무새인지 알 수 없다. 진짜 앵무새는 보는 사람의 마음과 해석에 달려있다고 암시하는 것같다. 삶에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실현되지 멋한 것 또한 삶이나니 가장 확실한 쾌락은 성취가 아니라 기대의 쾌락이라고 반스는 플로베르의 기질을 해석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대의 쾌락으로 영원히 남겨져야 한다고. 나의 기대의 쾌락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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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 -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
아리프 딜릭 지음, 황동연 옮김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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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의 화두가 포스트모더니티였다면, 21세기 초의 화두는 탈식민이었을 것이다. 탈식민을 제외하고는 문화담론은 물론이고 역사담론를 말할 수 없었다. 더불어 탈식민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왔고, 모더니티와 탈근대성의 대안으로 여겨져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탈post'이란 말만큼 모호하고 광범위한 말도 없을 것이다. 단순히 시간적으로 이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 딜릭이 언급했듯이, 전체성과 토대적 범주를 포함한다. "'탈'의 번성은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상상된 미래기 단지 잔여residuality로만 계속되기 때문에 파괴적 유토피아를 나타내기도한다."(10쪽)

이런 탈식민의 권력을 저자는 날카롭게 바라본다. 포스트모더니티나 탈식민의 업적을 인정하는 동시에 비판한다. 가령, 탈식민주의가 본질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잡종성' '제3의 공간' 등의 개념에 한정된 본질화된 정체성의 전제들에 기초한다고 한다. 또 탈식민주의는 문화라는 명목하에 정치 경제학의 구조를 거부함으로써 저치 경제학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근대화 담론의 문화주의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근대화 담론과 같다고 본다.

그간 접해온 탈식민 비평서들이 문화이론가들이 쓴 책들이어서 아프리 딜릭의 관점은 다소 혼란스러우면서도 신선하다. 저자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같다. 현재를 탐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역사 인식을 통해서이고, 이 역사 인식은 기억과 망강의 변주에 기초한다. 따라서 기억이 재현되는 방식이 중요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과거는 기억의 파편들이 아니라 새로운 망각의 방식이라는! ! 기억은 단순한 역사의 원재료일 뿐 아니라 역사의 경쟁자로 등장한다고 한다.

그 예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예로 들고 있다. 혁명을 겪은 이들의 기억의 편차와 혁명을 바라보는 이들의 편차로 이어진 간극에서 인식의 중심점을 잡는 방향을 서술한다. 이 책의 부제는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과거를 전제로 하며 과거에 대한 패스티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문제는 패스티쉬 이면에 감춰진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할 터인데 이건 내 능력 밖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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