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게된 동기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원제도 London Observed: Stories and Sketches. 영문학계에서는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져있나본데 내 유일한 관심은 '런던'이었다. 한 친구가 겨울에 두달쯤 뉴욕을 갈까, 런던을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런던 스케치를 산 것 같다. 표지에 실린 타워 브리지의 포스하며..

굉장히 짧은 단편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런던어들의 한 단면을 스케치이긴 하지만 무덥고 습한 여름에 읽기에는 너무 무겁다. 이 책의 첫 단편 <데비와 줄리>에서 십대인 줄리가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고 버리는 과정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범상치 않은 이 강렬함이 다음 책장을 넘기도록 자극하긴 했지만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은 아니다.

단편 속 인물들은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외로움은 우리 문화와 많이 다른 가족체계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사회체계에 이르겠지만. 출가 전에는 공식적으로 부모의 품에 기대어 사는 걸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주장하고 싶다. 특히 나처럼 이기적인 캥거루족한테 서양의 가족제도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것이다.

오늘 피부과에서 필링의 자극에 대해 미리 호들갑을 떨었다. 내 호들갑에 주춤해서 의사는 오늘 내려야 할 처방도 다음으로 미뤘다. 나는 참 신체적 고통을 무서워한다. 도리스 레싱의 관점으로 둘러본 런던은 런던어가 아닌 관광객 신분에 감사하도록 한다. 거주자의 고통을 안 겪어도 되니까. 그렇담, 서울 거주자로서의 고통은 무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줄리언 반즈의 책을 읽고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10년도 더 지난 후에 다시 읽고 역시 고전이란 생각을 했다. 반즈의 덕분에 엠마의 눈동자 색 변화를 유심히 읽었다. 그리고 이 표지의 그림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읽으니 엠마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타의 학습으로 이 소설의 가치를 줄줄 읊을 수 있지만 학습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면서 좋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이런 깊이의 소설의 참맛을 알수있으니 좋고 그 정도로 나는 이제 나이든게 아닌가 하면 서글프고. 쩝.

기본적으로 엠마는 관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체적 삶을 사는 인물이다. 엠마는 왜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며 정념의 화신으로 변해가는걸까. 로돌프의 입을 통해서 플로베르는 설명하고 있다.

"정열을 반대해야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정열이야말로 이 지상에 있는 유일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웅적인 행동과 감격, 시, 음악, 예술, 그 밖의 모든 것의 원천이 아니겠습니까?"

정열은 내게 있어 결핍된 요소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플로베르에게도 결핍된 요소라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결핍에서 엠마를 창조했고 엠마를 통해 결핍을 충족시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처럼 . 내 결핍을 충족시킬 플로베르의 엠마,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은 무얼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8-0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핍이 생산을 가져온다는 말이 여기서도 생각나네요. 추천^^
 
앤디 워홀의 철학
앤디 워홀 지음, 김정신 옮김 / 미메시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있어서 앤디 워홀=뉴요커라는 등식이 성립해 있는데 철학이란 제목으로 쓰여진 이 에세이는 이민2세인 워홀은 역시 뉴요커임을 증명한다. 특유의 가벼움과 조롱, 키치적 혼합에서 볼 수 있는 어지러움이 에세이에 스며있다. 맥락없는 단락들이 수다스럽게 늘어져있다. 특히 속옷에 대한 취향, 쇼핑에 대한 취향의 장황한 에세이는 부산한 뉴욕 한복판을 이리저리 걷게 하도록 하기도 한다.

다른 주에 가보진 않았지만 뉴욕에서 받은 인상은 뉴욕임을 강조해서 또 다른 미국같았다. 뉴욕은 일찍이 이민자의 도시로 뉴욕의 역사란 이민사나 마찬가지다. 뉴욕의 이민사 박물관에서 초창기 이민자들이 사용한 가방, 타고 왔던 배, 그려진 각국에서 오는 이민자의 숫자를 표시한 그래프를 보고나면 뉴욕이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이 후세에게 알려줘야하는 또는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몇 년도에 어느 나라에서 몇 명이 왔고 다음 해에는 어떻게 증감했는지 보고있노라면 이민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게 다야,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집 족보를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봤자 과거의 가족사 밖에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런 뉴욕에서 앤디 워홀의 명성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되어 개화한 곳. 워홀은 그 중심에 있었고 당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이용했을 것이다. 대량생산을 찬양하는 시대사조, 소비를 조장하고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예술도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한 그다. 화가에 대한 그가 내린 정의를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후원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가치 있는 행위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더 가치 있는 일-그것은 그에게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하는 시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나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내가 <작업하는> 시간에 대한 보상만을 받기를 바란다."

이 말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예술가보다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에세이를 읽다보면 워홀이 저절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재능과 함께 주변 환경을 잘 이용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영웅 만들기를 잘 하는 미국 사회는 워홀을 이용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봤다. 역사가 없는 미국에서 역사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겼고 시기 적절하게 워홀이 그 중심에 섰다. (파시스트적 생각일 수도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긍정적 영향이 그렇듯, 워홀은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간극을 좁히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다. 그가 죽은 후 더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과거에 대한 일종의 집단적 향수는 아닐까.

이 에세이에는 작품은 하나도 실리지 않았지만 안타깝지 않다. 앤디 워홀의 작품 보다는 그가 살았던 방식에 더 끌리기 때문이다. 올 초 앤디 워홀의 전시 마케팅과 더불어 번역된 책인 듯 싶다. 나중에 시간날 때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 그 특유의 가벼움과 모자이크 같은 산만함이 워홀스러움을 잘 전해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향연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 후>의 후일담이란 말에 읽게 되었다. <그 후>에서는 다이스케, <문>에서는 소스케. 두 이물은 결국 한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소스케를 보면서 내내 불만스러웠다. 다이스케보다 더 머리로 움직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아내, 요오이와 사랑에 빠져 하늘의 듯을 따랐지만 인간의 도리는 어긴 삶의 단면을 그린 소설이다.

이들 부부의 삶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삶은 평온하면서도 매우 수동적이고 물이 흐르듯 고요했다. 소스케는 너무 관념적이고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 나처럼. 나는 소스케처럼 내 단점을 알고 있으면서 고칠 수 없다. 그 어떤 비극 보다도 더 비.극.적.이다. 그리고 비겁하다. 소스케는 아니 나는. 한편으로는 특별히 그들의 일상만 그런 것이 아니란 생각에 더욱 쓸쓸했다.

오늘 한 친구와 삶의 지리함에 관해 잠시 이야기 했다. 요즘 내 생활이란, 일하고 공부고.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말을 적지 않게 한다. 그러나 소통의 언어는 분명히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접대용 말들로 가득 차 있다. 당연히 마음 깊은 곳에서 소통에 갈증난 내가 보인다.

오늘 일 마친 후 맥주 한 잔 하자고 친구에게 전화할까 말까 아침부터 망설였다. 집에 돌아오기 두 시간 전까지 망설였다. 맥주 한 잔 하는데 쓰잘데기 없는 망설임의 근원은? 바로 소통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내가 친구와 맥주잔을 기울이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라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말들을 꺼내놓고 싶어서다. 일터 가까이 사는, 가까운 친구는, 참 좋은 친구지만 이렇게 소통에 갈증나 있을 때는 그 장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친구이기도 하다. 물론 그 원인은 내게 있지만 말이다.

몸도 마음도 추스리기 힘든 요즘 이 친구의 입담을 치고 받기에는,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리하여 다른 친구와 운전하는 중에 내내 전화로 수다떨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퍼에 들렀다. 맥주를 사고 과자를 사면서 계속 전화로 쫑알거렸다. 집에 거의 다 와서 전화를 끊고 사온 맥주를 마시며 리뷰를 쓰고 있으면서 소스케와 오요이의 고즈넉한 생활에 불현듯 화가 치민다. 내 삶을 보고 있는 듯해서.

 

덧. 나쓰메 소세키는 참으로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고 이 점이 마음에 든다. 특히 기분을 묘사할 때, 햇볕의 색채 묘사를 많이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헤밍웨이의 글이 떠오른다. 기분을 자연을 이용해 전달할 수 있는 기법, 사랑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밤은 깊어가고 몸과 머리 속은 피로로 덮여있었다. 그런데도 잠은 오지않아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 불을 켜고 집어들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실망할까봐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잔잔한 이야기 속 주인공인 다이스케에게 빨려드는데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표면상 서사구조는 히라카오란 친구의 아내 미치요와 주인공인 다이스케의 사랑의 삼각형이 중심이다. 그러나 미치요와 다이스케의 다정다감 내지는 격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이스케란 인물의 심리변화를 묘사하는 소설이다. 다이스케를 책 속의 말로 정의하면 이런 인물이다.

"그는 원래 태도가 불분명한 편이었다. 누구의 명령도 그대로 따른 적이 없는 대신에 그 누구의 의견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저항해 본 적이 없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약삭빠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처럼 보이기도 하는 태도였다. 그 자신조차도 그 두 가지 비난 중 어느 쪽을 들어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주된 원인은...오히려 그가 융통성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이제까지 외곬으로 돌진하려는 용기를 상실하곤 했다."

자발적 백수인 다이스케는 머리와 가슴 중 머리가 발달한 매력없는 인간처럼 처음에는 보인다. 남아있는 책장이 줄어들수록 그는 니체나 루소가 주창하는 자연인에 가까운 걸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근대화의 최고 가치인 성실과 근면의 상징이다. 아버지에 대한 저항, 즉 근대화의 가치에 대한 저항을 다이스케는 게으름으로 실행한다.

게으르게 빈둥거리는 것이 근대화의 기준에서는 지탄받을 만한 것이지만 다이스케의 입장에서는 빵만을 위한 노동은 정신을 죽이는 행위로 무경험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배부른 먹물의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노동은 까뮈의 말대로 "삶을 송두리째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하고 귀중하다. 

그러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주언진 모든 시간을 노동에 바치는 것은 게으름보다도 더 하찮다. 근면이 대접을 받는 것은 산업화기에 자본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의 가치를 계몽하고 교육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맥락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와서 게으름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난 원래 게으르지만 내 게으름을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부끄러워할 때가 더 많다. 이런 점에서 다이스케는 소설 속 인물이기는 하지만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배짱 하나만으로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성격을 지닌 그에게 결단을 요하는 일이 바로 친구의 아내인 미치요와의 사랑이다. 자연의 힘을 따를지 인간의 도리를 따를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다이스케는 자연의 힘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미치요와의 사랑을 선택하기로 한 마지막 묘사는 에너지로 넘실거린다.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해서 뱅글뱅글 불길을 내뿜으며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

그의 결심에 응원을 보내면서 그들이 제도권에 대항해서 끝까지 그들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가는지 후일담이 궁금하다.  <문>이 내 궁금증에 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