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 여행기 -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4
마크 트웨인 지음, 박미선 옮김 / 범우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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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독서가 저조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고 휴가를 떠나지 않고 일상을 지켜냈다. 여러가지 악재 속에서 8월 주문한 책들은 몸은 이곳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데려다줄 여행기에 쏠렸다. 요즘 여행기의 종류가 많다. 긍정적 측면으로 보자면 자신만의 주관을 갖고 여행지에서 느낀 속삭임을 들으며 시야가 넓어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반면에 부정적 측면으로 보자면 한없이 가벼운 여행기들은 단지 소비욕망을 부추기는 일종의 광고와 같은 자극제일 뿐이다.

고로 여행기는 누가 썼는가, 어떤 취향의 사람인가가 구매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겠다. 마크 트웨인은 우리에게 <톰 소여의 모험>이란 동화작가로 축소되어 알려진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의  글은 일단 젠체하지 않으며 솔직하고 위트가 넘친다. 1896년에 쓰여졌으니까 한 세기도 훌쩍 넘긴 이 책을 선택한 데는 마크 트웨인의 기질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19세기에 유럽일주를 하면서 주관적 감정을 서술하고 있다. 서문에 썼듯이 마크 트웨인은 "흥미로운 대상들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였는지" 쓰고 있다.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여행기만큼 재미없는 게 또 있을까. 그런 점에서 트웨인의 "소풍"에 관한 기록은 일단 안심이다.

상권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할애되어 있다. 후반부는 이탈리아에 할애되어 있는데 지금 읽어도 공감할 수 있을만큼 보편적 시각이 눈에 띈다. 르네상스기에 회화에 대한 반응은 귀엽고 <최후의 만찬>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박수를 보낸다.

"<최후의 만찬> 앞에 서서 사람들이 자기들이 태어나기 100여년 전에 이미 그림에서 없어져 버린 경이와 아름다움, 완벽함에 감탄하는 걸 듣고 있자니 바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미 나이든 얼굴에 있었던 예전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말라빠진 그루터기를 보면서 숲을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거기에 있지 않을 떄는 절대 볼 수 없는 것이다. 능란한 예술가가 <최후의 만찬>에 쏠려서 암시로만 남아 있는 광채를 되살려서 이젠 없어져 버린 색조를 새로이 부여하여 사라져버린 표정을 복구할 수 있다고 믿으련다. 또 그들은 마침내 그림 속의 인물들이 생명력과 신선함, 정말이지 처음 거장들의 손에서 나온 그 고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로 번쩍이며 화가 앞에 드러날 때까지 개칠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아무런 영감이 없는 다른 방문자들은 할 수 있을가 혹은 할 수 있다고 행복하게 상상만 하는 것일까?"

솔직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대목말고도 이런 구절들이 도처에서 즐거움을 준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이, 여행이란 안내서에 나온 설명에서 희열을 얻는 게 아니다. 예측하지 못하게 만났던 사소한 풍경, 사물과 에피소드에서 여행은 개인의 역사 속에 각인된다. 비오는 날에 한적한 공원을 걷다 만난 개의 표정이라든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기 전 청소 중인 거리라든지..어떤 도시나 공간을 떠올릴 때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평소에는 무심코 흘려보내는 하찮은 것들이다. 마크 트웨인 덕분에 앉아서, 게다가 크루즈 여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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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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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된 동기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원제도 London Observed: Stories and Sketches. 영문학계에서는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져있나본데 내 유일한 관심은 '런던'이었다. 한 친구가 겨울에 두달쯤 뉴욕을 갈까, 런던을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런던 스케치를 산 것 같다. 표지에 실린 타워 브리지의 포스하며..

굉장히 짧은 단편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런던어들의 한 단면을 스케치이긴 하지만 무덥고 습한 여름에 읽기에는 너무 무겁다. 이 책의 첫 단편 <데비와 줄리>에서 십대인 줄리가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고 버리는 과정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범상치 않은 이 강렬함이 다음 책장을 넘기도록 자극하긴 했지만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은 아니다.

단편 속 인물들은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외로움은 우리 문화와 많이 다른 가족체계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사회체계에 이르겠지만. 출가 전에는 공식적으로 부모의 품에 기대어 사는 걸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주장하고 싶다. 특히 나처럼 이기적인 캥거루족한테 서양의 가족제도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것이다.

오늘 피부과에서 필링의 자극에 대해 미리 호들갑을 떨었다. 내 호들갑에 주춤해서 의사는 오늘 내려야 할 처방도 다음으로 미뤘다. 나는 참 신체적 고통을 무서워한다. 도리스 레싱의 관점으로 둘러본 런던은 런던어가 아닌 관광객 신분에 감사하도록 한다. 거주자의 고통을 안 겪어도 되니까. 그렇담, 서울 거주자로서의 고통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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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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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즈의 책을 읽고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10년도 더 지난 후에 다시 읽고 역시 고전이란 생각을 했다. 반즈의 덕분에 엠마의 눈동자 색 변화를 유심히 읽었다. 그리고 이 표지의 그림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읽으니 엠마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타의 학습으로 이 소설의 가치를 줄줄 읊을 수 있지만 학습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면서 좋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이런 깊이의 소설의 참맛을 알수있으니 좋고 그 정도로 나는 이제 나이든게 아닌가 하면 서글프고. 쩝.

기본적으로 엠마는 관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체적 삶을 사는 인물이다. 엠마는 왜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며 정념의 화신으로 변해가는걸까. 로돌프의 입을 통해서 플로베르는 설명하고 있다.

"정열을 반대해야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정열이야말로 이 지상에 있는 유일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웅적인 행동과 감격, 시, 음악, 예술, 그 밖의 모든 것의 원천이 아니겠습니까?"

정열은 내게 있어 결핍된 요소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플로베르에게도 결핍된 요소라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결핍에서 엠마를 창조했고 엠마를 통해 결핍을 충족시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처럼 . 내 결핍을 충족시킬 플로베르의 엠마,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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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0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핍이 생산을 가져온다는 말이 여기서도 생각나네요. 추천^^
 
앤디 워홀의 철학
앤디 워홀 지음, 김정신 옮김 / 미메시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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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앤디 워홀=뉴요커라는 등식이 성립해 있는데 철학이란 제목으로 쓰여진 이 에세이는 이민2세인 워홀은 역시 뉴요커임을 증명한다. 특유의 가벼움과 조롱, 키치적 혼합에서 볼 수 있는 어지러움이 에세이에 스며있다. 맥락없는 단락들이 수다스럽게 늘어져있다. 특히 속옷에 대한 취향, 쇼핑에 대한 취향의 장황한 에세이는 부산한 뉴욕 한복판을 이리저리 걷게 하도록 하기도 한다.

다른 주에 가보진 않았지만 뉴욕에서 받은 인상은 뉴욕임을 강조해서 또 다른 미국같았다. 뉴욕은 일찍이 이민자의 도시로 뉴욕의 역사란 이민사나 마찬가지다. 뉴욕의 이민사 박물관에서 초창기 이민자들이 사용한 가방, 타고 왔던 배, 그려진 각국에서 오는 이민자의 숫자를 표시한 그래프를 보고나면 뉴욕이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이 후세에게 알려줘야하는 또는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몇 년도에 어느 나라에서 몇 명이 왔고 다음 해에는 어떻게 증감했는지 보고있노라면 이민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게 다야,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집 족보를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봤자 과거의 가족사 밖에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런 뉴욕에서 앤디 워홀의 명성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되어 개화한 곳. 워홀은 그 중심에 있었고 당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이용했을 것이다. 대량생산을 찬양하는 시대사조, 소비를 조장하고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예술도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한 그다. 화가에 대한 그가 내린 정의를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후원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가치 있는 행위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더 가치 있는 일-그것은 그에게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하는 시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나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내가 <작업하는> 시간에 대한 보상만을 받기를 바란다."

이 말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예술가보다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에세이를 읽다보면 워홀이 저절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재능과 함께 주변 환경을 잘 이용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영웅 만들기를 잘 하는 미국 사회는 워홀을 이용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봤다. 역사가 없는 미국에서 역사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겼고 시기 적절하게 워홀이 그 중심에 섰다. (파시스트적 생각일 수도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긍정적 영향이 그렇듯, 워홀은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간극을 좁히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다. 그가 죽은 후 더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과거에 대한 일종의 집단적 향수는 아닐까.

이 에세이에는 작품은 하나도 실리지 않았지만 안타깝지 않다. 앤디 워홀의 작품 보다는 그가 살았던 방식에 더 끌리기 때문이다. 올 초 앤디 워홀의 전시 마케팅과 더불어 번역된 책인 듯 싶다. 나중에 시간날 때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 그 특유의 가벼움과 모자이크 같은 산만함이 워홀스러움을 잘 전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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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향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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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의 후일담이란 말에 읽게 되었다. <그 후>에서는 다이스케, <문>에서는 소스케. 두 이물은 결국 한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소스케를 보면서 내내 불만스러웠다. 다이스케보다 더 머리로 움직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아내, 요오이와 사랑에 빠져 하늘의 듯을 따랐지만 인간의 도리는 어긴 삶의 단면을 그린 소설이다.

이들 부부의 삶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삶은 평온하면서도 매우 수동적이고 물이 흐르듯 고요했다. 소스케는 너무 관념적이고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 나처럼. 나는 소스케처럼 내 단점을 알고 있으면서 고칠 수 없다. 그 어떤 비극 보다도 더 비.극.적.이다. 그리고 비겁하다. 소스케는 아니 나는. 한편으로는 특별히 그들의 일상만 그런 것이 아니란 생각에 더욱 쓸쓸했다.

오늘 한 친구와 삶의 지리함에 관해 잠시 이야기 했다. 요즘 내 생활이란, 일하고 공부고.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말을 적지 않게 한다. 그러나 소통의 언어는 분명히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접대용 말들로 가득 차 있다. 당연히 마음 깊은 곳에서 소통에 갈증난 내가 보인다.

오늘 일 마친 후 맥주 한 잔 하자고 친구에게 전화할까 말까 아침부터 망설였다. 집에 돌아오기 두 시간 전까지 망설였다. 맥주 한 잔 하는데 쓰잘데기 없는 망설임의 근원은? 바로 소통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내가 친구와 맥주잔을 기울이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라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말들을 꺼내놓고 싶어서다. 일터 가까이 사는, 가까운 친구는, 참 좋은 친구지만 이렇게 소통에 갈증나 있을 때는 그 장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친구이기도 하다. 물론 그 원인은 내게 있지만 말이다.

몸도 마음도 추스리기 힘든 요즘 이 친구의 입담을 치고 받기에는,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리하여 다른 친구와 운전하는 중에 내내 전화로 수다떨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퍼에 들렀다. 맥주를 사고 과자를 사면서 계속 전화로 쫑알거렸다. 집에 거의 다 와서 전화를 끊고 사온 맥주를 마시며 리뷰를 쓰고 있으면서 소스케와 오요이의 고즈넉한 생활에 불현듯 화가 치민다. 내 삶을 보고 있는 듯해서.

 

덧. 나쓰메 소세키는 참으로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고 이 점이 마음에 든다. 특히 기분을 묘사할 때, 햇볕의 색채 묘사를 많이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헤밍웨이의 글이 떠오른다. 기분을 자연을 이용해 전달할 수 있는 기법,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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