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올해 십자군에 관한 마지막 독서로 기록될 것이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책장을 넘겼지만 중반을 넘기면서 언제 결말을 보게 되나 남아있는 책장의 두께를 계속 가늠했다. 책장이 줄어드는 아쉬움보다는 여전히 읽어야할 두께를 버거워하면서. 이야기체인데도 이갸기 구조의 밀도는 떨어져서 각 챕터가 한 편의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인데, 장점인 동시에 소설로서는 단점일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살라딘의 일대기가 중심이지만 살라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좀 구체적인 역사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했지만 역사소설보다는 이야기 소설에 가깝다. 아니 아랍의 역사를 잘 모르니까 단정은 할 수 없지만 그런 것 같다. 서술방식이 유태인 서기인 이븐 야쿠브가 술탄과 그의 주변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슬람교도의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 유태인을 내세운 것은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또는 작가가 후기에서 썼듯이 이슬람 왕국에서 유태인이 호의적 대접을 받았다는 걸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븐 야쿠브는 술탄과 술타나(술탄의 조강지처를 이렇게 부른다)에 대한 존경을 여러 번 표현한다. 난 참 의도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븐 야쿠브가 술탄에게 바치는 맹목적 열정과 존경이 평면적이다. (난 호전적인 걸 좋아하는 걸까?)

내가 살라딘의 이야기에서 지식적으로 더 얻은 것 아쉽게도 거의 없다. 아마도 작가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어떤 문제점을 던져주기보다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에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초점을 맞춘다. 그가 후기에서 브레히트의 말,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를 가엾이 여겨라"를 인용했듯이 영웅 살라딘의 모습도다는 인간 살라딘을 그리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 여러 전투에 임하면서 흔들리는 모습과 어린 시절 성에 대한 호기심, 자신에게 술탄의 자리를 넘겨준 숙부와의 애잔한 관계가 잔잔한 물결처럼 펼쳐진다.

며칠 전, 텔리비전에서 방영된 한 다큐에서 타리크 알리 작가의 모습을 보았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푸근한 그의 외모처럼 이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외모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교 이슬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몇 번 등장한다.

"여러분의 종교는 지상의 쾌락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경전에만 의지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얻은 제국들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하디스를 만들어내도록 권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하디스는 많은 부분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어느 쪽을 믿을지는 누가 결정합니까?"(192)

"우리 종교의 추진력은 성교가 아니라 신과 믿는 자 사이의 관계요. ...알라는 최고의 상인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가 셈하는 것의 일부라고 할수도 있소. 모든 것을 셈하지. 모든 것을 재고. 결국 인생이란 이익도 보고 손해도 보는 장사요. 신자는 알라께 대출을 해준다고 할 수 있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슬람의 낙원에서 차지할 자리에 대해 미리 돈을 치른다는 거요. 알라는 마지막 셈을 할 때 장부책을 꺼내놓고 사람들이 한 행동을 읽어보고 세심하게 평가를 하오. 모든 사람에게 제 몫을 주려는 것이지. 이것이 우리 종교요. 우리 세계의 영향력을 나타내지." (195-196)

종교는 사람이 필요해서 만들었고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어떤 대의명분도 자신의 피부로 체감하지 못한다면 하찮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싸우려면 그 싸움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진정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거요."(516)라고 했듯이, 서구에서는 십자군 전쟁,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프랑크 족의 침입은 모두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비록 그 명분이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할지라도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카엘 하네케의 <라 피아니스트>를 보고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영화화된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이지만 하네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지 않는데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하네케가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해서 섬뜩하다. 그러나 끌린다.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건조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통찰력을 찾아 볼 수 없어서 아쉬웠고 찝찝했다. 책 읽기에 심드렁해진 와중에 책장이 술술 넘어갈 책을 고르다 피아노 치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몰입하는 데 꽤나 시간을 끌었다. 앞부분에서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그러나 일단 3분의 1쯤 넘어서니 속도가 났다. 처음에 엘프리데 엘리네크의 독특한 문체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직유법을 많이 사용한다. 처음에는 거슬리는데 익숙해지다보면 직유가 담고있는 날카로운 성찰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고 건조하다. 기계로 채를 써는 것처럼 고르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리듬감이 있어서 채 써는 소리에 심장이 박자를 맞추고 있게 된다. 가령, 이런 문장이다.

"작은 상점들 안에서는 밝은 빛깔 옷을 입은 현대적 어머니들이 푄 바람이 부는 담장 뒤에서 대담한 과제나 수행하고 있는 양, 어깨를 으쓱하며 상품들 위로 몸을 굽히고 있다. 젊은 주부들이 화려한 요리잡지들에서 얻은 지식들을 애꿎은 가지 따위 이국적 채소들을 놓고 실험해보는 동안, 이들이 아이들을 당기던 줄은 좀 느슨해진다. 나쁜 품질을 만나면 이 여자들은 호박 사이로 흉한 머리를 내미는 독사 앞에서처럼 놀라서 움츠린다...."

이런 식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더 없이 냉정하고 차갑다. 동정이나 연민을 느끼는 게 마치 죄악처럼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전지적 시점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를 펼친다. 피아노 선생 에리카, 그녀의 어머니, 그녀를 정복해보려고 하는 발터 클레머.

세 사람 모두 가부장적 권위를 지닌 인물인 동시에 그 권위에 서로를 억압하고 억압당한다. 이들은 몸과 마음을 옭죄는 그물망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지만 겁이 많고 관습적이다. 이런 인물들의 이중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에리카는 어머니에게 인간적 욕망을 억압당한 채 금욕적 삶을 강요당하지만 발터의 남성성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발터의 남성성에 지배당하고 싶어한다. 이런 심리가 기묘한 섹스 장면-정확히 말하자면, 가학적인-을 통해 설명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발터의 심리 역시 흥미롭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권위라고 불려진 것을 빼았기고 나서 되찾으려는 심리는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냉소적 시선은 처음인 것 같다. 어떤 애정도 없이 인물을 버려버리는 서늘함. 이 싸늘한 시선 때문에 이 소설은 명작이지만 따뜻한 시선이 그리운 건 부인할 수 없다.

에리카의 입을 빌어 예술이 최고 가치로 여기는(적어도 나는 그렇다)감정이나 열정이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예술가라면, 감정이나 정열을 벗어던지는 것이 얼마나 더 쉽겠어요. 클레머씨가 그토록 존경한다는 극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결국 예술가가 진정한 수단을 소홀히 하고 거짓 수단을 붙잡는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나는 교사로서 극적이지 않은 예술을 옹호하는데, 예를 들면 슈만이죠. 극이란 항상 더 쉽게 마련이지요! 감정과 정열은 항상 대용, 이지적인 것의 대용일 뿐이잖아요."

새로운 발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편지글의 매력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뚜렷한 서사가 있거나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과 책을 구해주는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들의 일상을 훔쳐볼 수 있다. 훔쳐보기는 좀처럼 뿌리칠 수 없는 강력한 매혹의 수단이다.

구매자의 직업이 무엇인지 어떤 취향인지, 공급자의 심성은 어떤지 그의 가족 구성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을 알아낸다. 그리고는 이들의 외모를 상상하면서 읽고 있었고 그들이 주고 받는 정에 잠시지만 훈훈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글은 그 사람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논문을 읽고서 저자의 외모라든가 개인적 취향을 아무도 궁금해 하진 않는다. 구매자 헬렌 한프가 적은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 저는 전 주인이 글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헬렌 한프의 이 말은, 새 책만 읽기 좋아하는 독자인 내게도 해당된다. 단지 동지애를 느끼는 대상이 내 경우는, 책의 전 주인이 아니라 책을 쓴 작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책 속의 문장에 밑줄을 치거나 책장 모서리를 접을 때마다 나는 동지애를 느끼고 마음 가득 한 외로움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 독서는 사람한테서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위안을 준다.

 

p.s. 원서로 찾아 볼 것. <84, Charing Cross> Helene Hanff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유럽인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똑같은 역사를 읽어보는 일 자체만으로 흥미있다.

이 책을 통해 먼저 알게 된걸 정리해 보면,

1. 아랍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이란 말은 없다는 것. 대신 그들은 프랑크인들les Francs의 전쟁 또는 침략이라고 부른다는 것. 프랑크인들의 전쟁이란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중세 아랍인들에게 조금 실망했다. 프랑크인들이 계속해서 전쟁을 할 수 있었던 동인 중 하나가 당시 아랍 지도권의 무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파와 계파의 분열로 안정보다는 내분이 더 심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즉 외세의 침략에 대해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단결이나 연대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눈이 먼 결과이다. 반면에 유럽인들은 결단력, 우수한 전사들과 강한 연대감으로 오랫동안 전쟁을 할 수 있었다.

2. 유럽인의 시각에서 쓴 십자군사는 주로 통사론적 관점을 취한다. 따라서 당시의 정세에 집중하는 면이 있지만 이 책은 통사론 형태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미시사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 점은 저자의 서술방식이긴 하지만 아무튼 주변 정세보다는 전쟁의 참혹과 잔인함을 강조한다. 유럽인들이 중세사를 종교와 신심에서 비롯된 연대감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들은 침략당한 입장에서 그들이 남긴 만행을 깊이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의 역사라는 것이 주체와 비주체의 태생적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

3. 아랍권의 성군으로는 알려진 누르 알 딘과 살라딘이 있다. 살라딘이야 영국왕인 사자심왕 리처드마저도 그 인품을 칭찬했다고 했었고 서양에도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이책에서 살라딘에 관해 흥미로운 건 살라딘의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이다. 살라딘은 피보다는 관용과 용서를 프랑크인들에게 베풀었고, 그 결과 그들이 다시 침략할 수 있는 여지를 결국에는 제공한 것이 돼버린다. 원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유럽인들의 호전성을 간과했던 것처럼 보인다. 살라딘에 관해서는 책 두 권이 나와 있으니 따로 읽을 계획이다.

4. 결론

역사책을 읽으면서 늘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역사는 참 닮은 꼴이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더불어 아시아의 기질적 특성이 분열인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점이 '연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역사가 짦은 우리가 다수결의 원칙의 변주인 연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파생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임없이 회전되고 있다.

가령,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 진행중인 현재, 그들의 주요 선거정책 중 하나가 이라크전에 관한 해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시의 정책에 반대했지만 부시는 전쟁을 일으켰고 끝낼 의지가 없어보인다.(내가 얻은 정보로는) 미국 사회 내에서 부시 지지도는 전쟁을 일으킨 후에도,  많은 매체들이 부시의 선택이 사기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루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미국 국민들은 단결한다. 전쟁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선택한 길이라면 어쩔 수 없고 그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정책이 결정되기 전에도 분열이 심하지만 결정된 후에도 단결은 이루어지질 않으면 각종 스캔들에 정책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풍토다. 물론 지도층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중요한 작용을 하겠지만 진정한 의미의-어쩌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적 원칙-연대를 본적이 없다. 연대란 늘 자신과 자신을 지지하는 소그룹의 무리를 위해 결성되었다가 해체되기를 반복한다. 이런 얄팍한 연대는 나라 문제뿐 아니라 개인이 속한 회사나 단체에서도 중요한 특징이다. 어려우면 뭉친다기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뭉치고 그렇지않으면 언제든지 해체할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고로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연대감을 가벼이 여기고 타인의 연대를 우습게 보거나 또는 의혹의 눈길로 본다.

서양인에게는 십자군 전쟁, 아랍인들에게는 프랑크인들의 침략 전쟁은 연대감에 대한 생각을 내게 깊이 던져주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보았듯이, 종교의 역할이 큰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본다.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튜튼 기사단' 등에서 알 수 있들이 그들 역시 분열했다. 무엇이 그들을 단단한 연대로 이끄는 걸까.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연대를 막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다보면 나는 쉽게 싫증내는 편이다. 그래서 한꺼번에 쭉 읽지 않고 간격을 두고 읽는다. 그러면 싫증이 덜 난다. 물론 처음 만나는 책만큼 강렬한 인상은 아니어도 시간을 두고 읽다보면 왜 좋은지 그리고 왜 싫은지, 작가의 정신세계는 어떤지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읽을수록 싫증나지 않고 맞아, 이래서 좋았지..하는 새로움을 하나씩 더하는 즐거움을 준다.

<마음>의 줄거리 역시 전작들, <그 후>, <문>과 중첩되는 면이 있지만 인간에 대한 통찰력만은 빼어나다. 소세키의 인물들은 참 우유부단하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겉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쿨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내면은 기복이 심해서 괴롭다. 그의 인물들은 내성적이고 외롭다.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해서 외롭다. 도의와 의리를 소중히 하는 그의 인물을을 보면서 작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들은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저항하거나 원망하는 법이 없다. 외로움을 담담히 받아들여 읽는 나도 외롭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어쩌면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세상 아래 나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소세키의 글에서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차니 이곳저곳에서 외롭다는 말을 듣는다. 음주를 요청하는 이도 있고 수다를 떨자고 손길을 뻗는 이도 있다. 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외로운 이들이 만나 알콜을 뜨거움을 하룻밤 즐긴 다음 날, 겉으로만 말을 쏟아내고 돌아오는 길에 외로움은 훨씬 더 깊어져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처럼 비관적이되기 때문이다. 쓸쓸한 마음을 소세키의 쓸쓸한 글로 채우는 게 만추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넙치 2007-11-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에 썼던 독후감을 읽으니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군. 한 여름에 가졌던 마음도 지금과 비슷했나보다. 재밌기도 하고 급쓸쓸하기도 하다.